제128화
칼의 도발에 슈타크 가의 형제들이 모두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발산할 때.
키이라 슈타크는 기가 차서 분노가 실린 눈으로 칼을 쳐다봤다.
여기서 더욱 가관인 것은 정작 도발을 던진 칼은 팔짱을 낀 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를 기만하고 있어.’
실력도 공적도 인정받지 못한 주제에 그 눈빛은 무척이나 오만했다.
빠득!
삼남, 로가하 슈타크는 이를 갈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놈은 이 가문에서 네놈의 위치가 어디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그런 발언을 할 거라면, 나를 쓰러뜨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그렇습니까?”
가소롭다는 듯 칼이 제안을 수락하려는 순간.
끼익!
회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루드거 슈타크가 기사단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새 사내답게 배짱이 두둑해졌구나. 칼리언트.”
문 너머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루드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라마스와 키이라 모든 형제자매가 루드거에게 예를 표했다.
가족끼리의 모임이지만 슈타크 가문은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보니 생겨난 인사법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루드거 슈타크를 무인으로서 존경함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강해졌구나.”
칼을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루드거.
하지만 그 얼굴에서 자애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대신 엄숙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거만을 떤 대가는 어떻게 치를 거지?”
분위기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인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자리에 있던 칼의 형제자매들은 루드거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아무래도 제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로가하 형님께서 직접 결투를 해주신다고 하더군요.”
‘안 될 노릇이지.’
칼의 소식이라면, 루드거 그 자신이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거인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데다, 세계의 별이라고 칭송받는 에클라 세트와의 경쟁에서도 뒤처지기는커녕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인정받았다.
로가하는 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칼이 로가하를 가뿐하게 쓰러뜨린다면, 계승권 서열 문제는 물론 주변의 사기 역시 크게 위축되고 만다.
루드거는 어느새 주변의 상황을 망각하고 칼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건 아니다만, 분명 그에 준하는 힘을 손에 넣은 건 틀림없어.’
소드 마스터는 깨달음을 얻어 9성 이상에 오른 이를 지칭한다.
신체 능력부터 오러를 활용하는 능력까지, 단순히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그들은 각국을 지탱해주고 있는 중요한 기둥으로 취급받는다.
루드거 슈타크는 10성급의 경지로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강자 중 한 명이었다.
놀랍게도 그런 루드거 슈타크의 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슈타크가의 막내아들인 칼이었다.
루드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언제 전시가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니 누구 한 명이라도 상처가 생기는 건 곤란하지. 다른 방법을 제안하마.”
“다른 방법 말씀입니까?”
칼과 로가하는 동시에 반문했고.
피식.
루드거의 입은 음산하게 올라갔다.
그 속내를 짐작해낸 라마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거겠군.”
“네 그것밖에 없죠.”
아주 드물게 라마스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준 키이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버님도 정말 짓궂으시네.’
* * *
장소는 슈타크 가에서 좀 떨어진 장소였다.
주변의 숲을 모조리 밀어내고 만들어진 거대한 훈련장이었는데, 그 스케일이 칼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드르륵.
놀랍게도 눈앞에서는 고삐가 달린 와이번들이 거대한 석판을 옮기고 있었다.
석판에는 글자가 잔뜩 쓰여 있을뿐더러, 다른 암석과 달리 검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각 판의 크기는 대략 5미터.
와이번들은 그것들을 일렬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칼은 눈매를 좁히며 곁에 있는 키이라에게 물었다.
“저게 뭡니까?”
“너 오만한 것 치고는 너무 가문의 상식에서 뒤떨어져 있는데.”
그녀는 호기로운 표정을 지으며 칼을 쳐다봤다.
‘이 녀석도 피곤한 성격이군.’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순순히 눈앞에 있는 석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저건 슈타크 가문의 연금술사들이 만든 인조 아다만티움이야.”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겁니까?”
세상에는 특별히 단단하면서도 무기로써 제련이 가능한 3대 금속이 존재한다.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오리하르콘.
검은 금속이라 불리는 오리하르콘보다 더욱 희소성을 갖춘 아다만티움.
그리고 북해 빙하 대륙에 있다고 전해지는 프리징 다이트였다.
책을 통해서 이런 배경까지 알고 있던 칼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저 대륙 최강의 무가로 손꼽히는 곳이라 생각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전설의 금속을 만들어 낼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다.
키이라는 냉정하게 인조 아다만티움 석판을 평했다.
“당연히 실패작이지. 강도는 단단하지만, 무게가 진짜 아다만티움에 비해 훨씬 무거워서 활용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렇게 많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 실력을 평가하기 꽤나 유용한 시험 방식이지.”
“시험 방식?”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에 어리둥절해 할 때.
칼과 로가하 앞에 각자 열 장의 인조 아다만티움이 세워졌다.
장엄하고 큰 풍경에 로가하 역시 크게 놀란 듯 보였다. 석판의 배치를 끝낸 것을 확인한 루드거는 피식 웃으며 두 아들에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검으로 눈앞에 있는 석판을 베어내면 된다.”
그의 말에 칼은 눈매를 좁히며 시험의 의도를 알아챘다.
‘오러의 사출을 시험하는구나.’
대개 일반적인 상식으로 소드 마스터는 근접전에만 강할 뿐.
원거리에서는 크게 힘을 못 쓴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소드 마스터가 휘두르는 오러의 범위를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직선으로 뻗어 나간 오러는 멀찍이 떨어진 마법사나 궁수라고 해도 심장을 찔러 단번에 죽일 수 있다.
검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부족하면 당연히 그런 파괴적인 힘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루드거는 쉽고 간단하게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시험 방식으로 석판 베기를 채택한 것이다.
장녀인 락티아를 비롯해 실력 있는 몇몇은 이 시험 방식을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낯선 시험 방식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루드거는 칼과 로가하에게 말했다.
“라마스는 여기서 여섯 개를 완벽하게 베어냈고, 키이라는 마지막 석판을 완벽하게 가르진 못했어도 어쨌든 여섯 개를 베어냈지.”
“칫!”
라마스에게 졌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키이라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참고로 석판의 강도는 하나를 뛰어넘을 때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 생각하면 된다.”
범위뿐만 아니라 오러의 절삭력도 시험할 수 있었다
스릉.
룰을 이해한 칼과 로가하는 각자의 검을 빼 들었으나.
“명검의 힘을 빌리는 건 곤란하지.”
루드거의 말에 둘은 주변에 있던 신하들에게 자신들의 검을 건네주었다.
이후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또 다른 신하들이 칼과 로가하에게 똑같은 양질의 검을 건네주었다.
‘너무 가벼워서 못 써먹겠군.’
철검을 집은 칼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비어벨의 손맛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무게감도 칼날의 상태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가하는 그런 칼을 보며 조용히 한마디를 남겼다.
“자신 없나 보네.”
“뭐?”
서툰 도발이었지만 제대로 먹혔는지 칼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로가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인조 아다만티움의 앞에 섰다.
“흐읍!”
서서히 호흡을 갈무리하는 로가하.
평정심을 찾았는지, 그의 검신에는 스산한 푸른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검을 추켜세운 그는…….
“흐럅!”
콰쾅!
있는 힘껏 허공에 오러로 한 줄의 선을 그려 넣었고, 직선으로 뻗어 나간 검격은 인조 아다만티움을 파괴해나가기 시작했다.
석판이 부서지면서 충격으로 흙먼지가 요란스럽게 피어올랐다.
“로가하 녀석. 꽤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녀, 락티아가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외의 다른 형제자매들은 로가하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있는 힘껏 검격을 날렸음에도 부서진 석판은 고작 두 장밖에 되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로가하는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라마스나 키이라, 그리고 바로 밑에 동생인 프루아만큼은 못 되더라도 나름 자기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루드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음을 재촉했고.
이번에는 칼이 석판의 앞에 섰다.
꿀꺽!
모두가 고인 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칼은 대수롭지 않게 오러를 뿜어냈다.
그러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쩌걱!
마나 브레이크의 성질이 띤 오러를 검신이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균열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런?!’
깜짝 놀란 칼은 눈을 부릅떴고.
카아아앙!
검이 깨지더니 그 파편들이 지면에 흩뿌려졌다.
“푸훗!”
형제 중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험담이 이어졌다.
“허세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
“게어트너를 쓰러뜨려? 에클라 세트에게 빌붙은 거겠지.”
“그래도 저 조그만게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게 어디야?”
형제자매들은 노골적으로 비하하며 그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오러를 두른 것만으로 검이 깨졌다는 것은 그만큼 숙련도가 모자라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루드거 역시 실망의 기색을 내비쳤다.
‘……이건 예상 못 했군.’
칼은 쯧 혀를 차며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뒤, 역량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오러의 질이 이렇게까지 올라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비어벨이란 명검이 있어 오러를 제어하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여기까지인 건가?’
큰소리친 거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주자, 키이라도 이맛살을 구겼다.
바로 그때.
사락.
두두둑!
칼은 망토를 풀어헤치고 그대로 상의의 단추를 모조리 뜯어내며 상의를 벗어 던졌다.
상반신의 굴곡진 근육을 목격한 형제자매들은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저 등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몸에는 근육이 군살 하나 없이 꽉 차 있었고, 그 위에는 수많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슬며시 왼발로 흙을 밀어낸 칼은 자세를 다잡았다.
“후우.”
호흡을 갈무리한 칼의 주먹에 심홍색의 오러가 불타오를 듯이 맺혔다.
‘흥!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별 짓거리를 다 하는군.’
로가하는 같잖다는 미소를 지으며 칼을 지켜봤다.
그와 동시에…….
희번득!
칼날처럼 서늘하게 눈을 뜬 칼이 인조 아다만티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쾅!
오러가 응축된 주먹은 순식간에 석판들을 쓰러뜨렸고.
“워, 워. 진정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와이번들이 크게 놀라 용기사들의 통제를 거역했다.
하늘까지 자욱하게 낀 흙먼지들이 어느 정도 걷히자, 그 자리에는 여섯 개의 인조 아다만티움이 두 갈래로 쪼개져 널브러져 있었다.
“…….”
그 광경에 칼의 형제자매들 눈 밑에 거뭇한 그늘이 자리 잡혔다.
“검도 아니고 맨손으로…….”
그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로가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칼은 그런 로가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멀찍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라마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