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이실리아를 떠나기 전.
디아나와 슈미트와 길을 걷고 있는 중 파르테스의 입구에서 맥캘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툴툴거리는 그 입에서는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정떨어지는 자식.’이라며 비난과 욕설을 내뱉는 중이었다.
“……또 시작됐군.”
“그러게요.”
슈미트와 디아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멀찍이 떨어져 두 사제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스윽.
그녀를 쳐다본 칼은 평소처럼 장난을 걸었다.
“일찍 들어가서 자지 않으면 키 안 큰다.”
“이미 다 컸어! 이 자식아!”
맥캘리는 쯧 혀를 차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칼에게 전해주었다.
그것은 두 개의 팔찌였다. 칼은 팔찌 주변에 새겨진 글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건.”
그 문양은 그동안 일회용으로 써왔던 트리거의 주문이었다.
촉매가 된 금속 팔찌는 일전에 검의 성지에서 획득한 쇠사슬을 재가공해서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문양이 없어도 충분히 세련된 장신구였다.
맥킬리는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슈미트 녀석이 명계석으로 만든 팔찌에 5회분의 마력을 축적해서 담아둘 수 있게 만들었어. 계속 일회용으로도 쓸 수 없잖아.”
팔찌를 착용해본 칼은……
“……고마워.”
라고 새침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말도 거의 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낯간지러웠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하지 마라.”
맥캘리는 인상을 홱 찌푸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큼해지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든 재수 없게 다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모하게는 굴지 마라. 나한테까지 클레임 들어오니까.”
덕담을 하는 건지, 혼을 내는 건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맥캘리는 입을 꼭 다물었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음에 내 앞에 설 때는 네가 바라던 기사의 모습으로 있으라고. 나도 훌륭한 제자를 뒀다고 떳떳해지고 싶으니까.”
“몇 번인가 말하지 않았나? 스승의 격을 실추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말은 잘한다.”
푸념 어린 소리와 달리 답변에 만족했는지, 맥캘리는 입꼬리를 빙긋 올렸다.
스륵.
그런 맥캘리 앞에 칼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
맥캘리는 조금 깜짝 놀란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편안한 미소로…….
“힘내라.”
한마디를 남겼다.
이른 아침.
배에 승선하기 전 레인은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항구 쪽으로 걸어온 칼에게 허리를 숙였다.
“승선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이제는 아카데미의 교복 대신 슈타크 가문의 예복을 갖춰 입은 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레인에게 물었다.
“목표는 알테어인가?”
칼의 말에 레인은 짤막하게 답했다.
“본가로 향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날 시험해보고 싶다는 거로군.’
전이라면 가소롭다며 짜증을 낼 판국이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졸업을 한 이후 칼에게서는 전에 없었던 관록이 묻어나왔다.
칼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레인은 그런 칼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팔락!
세찬 바람에 망토가 펄럭였고 칼은 그대로 배에 올라탔다.
* * *
루콘의 변경백, 슈타크 가문의 영지.
험난한 지형에 있기에 이곳은 대체로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철저하게 약육강식을 따르는 가문의 자제들은 뛰어난 무위와 통솔력을 지니고 있어 외부의 적으로부터 루콘을 지켰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슈타크 가문의 일원을 ‘디아블로 롯소(붉은 악마)’라 칭하기도 했다.
특히 장남인 라마스 슈타크와 삼녀인 키이라 슈타크는 각자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장남인 라마스 슈타크는 남쪽에서 날뛰는 야만 민족, ‘타우젠트’의 전사 일만 명의 목을 베어 전장을 피바다로 만드는 전적이 있었으며…….
키이라 슈타크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성을 중심으로 이웃 국가 샤텐의 성 7개를 탈취하는 전적을 지니고 있었다.
두 전적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성과로, 이 둘은 슈타크 가문이 루콘 최강의 무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 일이었다.
그 때문에 차기 가주는 이 둘 중에 한 명이 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에는 바빠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슈타크 가문의 일원들이 본가에 집결했다.
단 한 명, 알테어를 지키고 있는 프루아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 사람이 모인 건 아니었다.
부재중인 자리는 두 자리.
한 자리는 루드거 슈타크의 자리.
다른 자리는 권좌에서 가장 먼‘ 곳에 놓여 있는 칼리언트의 자리였다.
“…….”
이야기할 시간은 생각보다 많았지만.
모처럼 만났음에도 형제들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우애나 의리는 슈타크 가문하고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이 경쟁의 구도에서 자신이 위에 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막내가 뭐라고 이렇게 다 모이는 걸까?’
키이라 슈타크는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칼의 복귀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도망치는 줄 알았어.’
겁쟁이라고 비하하기보다는 가련하게 여겼다.
무가에 태어나서 무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신이 내린 최악의 저주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칼이 아카데미로 도망갔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가문을 등지고 파르테스에서 관료로 망명을 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칼은 모두의 예상을 가볍게 뒤집어 놓았다.
2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카데미 수료를 마치고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전 세계로 퍼지는 칼의 이야기였다.
루콘의 광견.
상대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는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 별명은 유약하던 칼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칼은 세계 곳곳에서 온 엘리트들을 가뿐히 제쳐버리고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것은 라마스나 키이라도 해내지 못한 성과였다.
그러나 칼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칼은 이실리아 역사상 최악의 마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게어트너를 쓰러뜨렸다.
그로 인해 이실리아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무려 ‘수호 기사’란 칭호도 하사받았다.
“…….”
그 사실에 같은 형제자매들은 칭찬 대신 위화감에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늘 죽는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던 유약한 공자가 영웅으로 칭송받는 걸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형제자매들은 그 호기심 하나 때문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끼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망토를 휘날리며 들어온 이는 칼리언트였다.
1년 반 사이에 십 센티 넘게 훌쩍 자란 키와 다부진 근육이 유독 눈에 뛰었다.
그리고 이지적인 느낌이 드는 심홍색의 눈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칼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착석했다.
칼은 무릎을 꼬며 오랜만에 보는 형제, 남매들에게 말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
실로 건방진 인사에 모두의 안색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차남 리슈타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칼은 양손에 깍지를 끼며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가 봐도 리슈타를 얕보는 것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벌인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
콰앙!
리슈타는 격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특수한 금속을 이용해 제작한 테이블은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모두의 찻잔이 들썩거렸다.
놀랍게도 그중에 흘러넘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리슈타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칼이 앉은 자리는 루드거 슈타크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장난이 지나치군. 거기는 아버님의 자리다.”
라마스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좁히며 칼을 쏘아봤다.
“아무래도 우리 막내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장녀 락티아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보내기까지 했다.
스윽!
칼은 바로 내려오는 대신에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들 절 우러러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듣고 있던 형제들 전체가 칼을 향해 적대감을 표출했다.
예상을 넘어선 싸가지없는 행동에 하마터면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달그락!
차녀 라미에 슈타크는 노골적으로 칼의 급소를 훑어보았다.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루드거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있던 라마스는 그런 칼을 노려보며 말했다.
“광견이란 별명을 얻었어도 적어도 본가에서는 광견 흉내를 내면 안 되지. 네놈은 저 자리가 가진 힘을 알면서도 우리를 기만한 거다.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해라.”
“자리 하나에 연연하다니 정말 그릇이 작군요. 형님.”
칼은 노골적으로 라마스를 향해 비웃음을 터뜨렸다.
콰아아앙!
바로 그 순간 라마스는 전신에 기도를 해방했다.
‘크윽!’
해방된 기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그 노골적인 살기에도 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기고만장해졌구나.”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내부에 저를 죽이려는 살수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실득실한대.”
칼의 대답에는 네가 범인이 아니냐는 도발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 칼을 보고 웃는 사람은 키이라 슈타크. 단 한 명뿐이었다.
“칼리언트, 배짱 두둑해졌네. 잘도 누님의 편지를 무시하더구먼.”
“그랬나요?”
칼은 대충 대답하며 시녀가 따라준 홍차를 슬쩍 입에 댔다.
“흐음.”
차를 살짝 음미하던 칼은 무언가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입을 열었다.
“재밌는 독이 섞여 있네요. 어떤 종류의 독일까요?”
“?!”
칼의 말에 깜짝 놀란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독을 분별하기 시작했다.
쨍그랑!
칼은 마시던 차를 뒤로 던졌다. 과격한 그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처음은 그냥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두 번은 없다는 건 꼭 기억해주시고요.”
‘미친 놈?!’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매서운 표정으로 모두를 쏘아보던 칼이 말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절 시험할 예정입니까?”
“네 녀석, 아까부터 혼자 멋대로 뭐라 중얼거리는 거야!”
분노한 리슈타가 으름장을 놓자,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절 시험하려고 부르신 거잖습니까?”
꽈악!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삼남 로가하 슈타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험이야 언제나 간단하지. 무가에서 검을 빼고 시험을 치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상대해주지.”
로가하의 말에 칼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표정은 무슨 의미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로가하는 분노가 잔뜩 깃든 눈으로 칼을 노려보았다.
칼은 그런 로가하를 제쳐두고 모두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귀찮으니 전부 덤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들 강한 척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칼의 형제자매들은 일제히 전신의 기도를 해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