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게어트너와 타라의 출현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갔다.
피해를 복구하는 것부터 시작해 이곳 아카데미에 자식들을 보낸 각국의 귀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나마 체계가 잘 잡힌 나라인 만큼 복원하는 속도도 빨랐다.
무엇보다 예상외로 학생들은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난 이후에도 파르테스를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게어트너를 상대로 분발한 에클라 세트의 활약을 보며 이들과 같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다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피해를 최소화로 하며 빠르게 대처하는 이실리아의 체계에 호기심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 남자의 졸업을 보고 싶은 욕구에 대다수 학생들이 파르테스에 남았다.
화제의 중심이 되는 남자는 파르테스의 망나니라 불리는 칼리언트였다.
게어트너를 쓰러뜨림으로써 그 자신이 에클라 세트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재목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데다…… 학창 시절 내내 늘 포식자로 군림하던 데제스의 라이벌로 불리는 남자.
이실리아에 온 뒤로 끊임없이 화제를 불리는 이 남자가 막상 졸업을 한다고 하니, 모두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성격이 괴팍할 뿐이지, 알고 보면 늘 잘못된 걸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칼리언트는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도 파르테스에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졸업식에 맞춰 여왕, 예카테리나 2세의 훈장 수여식도 같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선배 진짜 졸업하나?”
“데제스 선배님이랑 좀 더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표정으로 수군덕거리던 여학생들은 자신들과 나란히 걷고 있는 델피나에게 말했다.
“델피나하고도 잘 어울렸는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백해보지, 그래?”
“그래. 회장님하고 더 가까워지기 전에…….”
피식.
그녀들의 말에 델피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게 모르게 학생들 사이에서는 칼의 연인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학생회장인 릴리였고, 두 번째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아마 선배는 좋아하는 게 뭔데? 라며 귀찮다며 저리 가라고 할걸.”
칼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델피나는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네.’
“……델피나.”
동정 어린 시선에 델피나는 음산하게 웃으며 그녀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보면 화낸다.”
“미, 미안.”
의도치 않게 약 올렸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들은 황급히 사과했고.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배가 떠나는 건 아쉽지만,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지 기대되지 않아?”
“……그건.”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했는지, 그녀들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 * *
“거추장스럽군.”
졸업식과 훈장 수여식을 동시에 앞두고, 교복 위에 고풍스런 휘장을 두른 그 모습은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 같았다.
“뭐 어때? 입만 다물고 있으면 괜찮구먼.”
맥캘리의 감평에 칼은 그녀의 볼을 꼭 꼬집었다.
“우갸갸갸. 요놈 자식. 끝까지 스승에 대한 예우가 없구먼.”
칼을 노려보는 그 눈빛에는 왠지 모를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일부러 아픈 척하면서 티를 안 내려는 그 모습에 칼은 슬쩍 손을 떼며 엄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뭐, 뭐야?”
조금 당황했는지, 맥캘리는 뒤로 슬쩍 물러나며 눈총을 줬다.
“안 어울리게 눈물 흘리지 마.”
“이제는 눈물 흘리는 것도 허락받아야 되냐? 이 망나니 제자 같으니라고.”
“난 내 스승이 웃는 모습이 더 보기 좋거든.”
“…….”
경애가 담긴 ‘스승’이란 단어에 맥캘리는 다시금 눈가가 시큼해졌다.
“그리고 울 거면, 나중에 시집가서 울라고.”
“이 자식! 죽고 싶냐!!!”
졸업식이고 뭐고 가만 안 둔다.
맥캘리는 서슬 퍼런 표정을 지으며 칼의 멱살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
* * *
파르테스의 광장.
이날은 칼의 조기 졸업식보다는 이실리아를 구한 영웅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에 좀 더 초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지금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엄청난 인파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때 교복 위로 화려한 휘장을 걸친 에클라 세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클라 세트는 에릭, 베르데, 델피나, 맥캘리까지 총 4명.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가 순서대로 가슴팍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여왕이 다소곳하게 자리에 섰다.
이에 맞춰 수여식을 진행하는 관료가 대중의 앞에 소리쳤다.
“이실리아는 별의 총애를 받는 기적의 재목들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타국의 시민을 주저하지 않고 게어트너와 타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그 공로를 치하하여 각자 금괴 100개를 수여한다.”
4명의 에클라 세트는 정중히 예식에 맞춰 고개를 조아렸고.
“와아아아아아!!!”
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들을 축복했다.
금괴 100개는 어마어마한 가치지만 그들이 이룬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오히려 소소해 보였다.
그러나 누구 한 명 쉽게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이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그는 오만하게 모두를 내려다보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폭주하는 게어트너를 쓰러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소년이었다.
여왕의 앞에 선 칼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그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곁으로 신하들이 이번 공로에 대해 내릴 포상을 가져왔다.
여왕의 눈치를 살피던 관료는 목청껏 외쳤다.
“영웅들의 업적은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다만 게어트너를 쓰러뜨리는데, 가장 큰 활약을 한 영웅을 칭송하지 않는 것 또한 마땅치 않다. 또한 오늘은 경사에 경사가 겹쳐 파르테스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수료한 인물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
“슈타크?”
“슈타크라고? 설마 슈타크 가에서도 에클라 세트를 두고 있는 거야?”
군중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설마 루콘 최강 무가의 일원이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영웅이라니…….
훗날 적이 될 수 있는 인재를 과연 축하하는 게 맞는 일일까?
그런 생각으로 주저하는 귀족들과 달리…….
“와아아아아!!!”
“칼리언트!”
“칼리언트!”
일반 서민들은 일제히 칼의 이름을 칭송했다.
칼이 모두를 지키며 게어트너와 싸우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건넨 훈장보다 조금 더 화려한 훈장과 엠블러를 달아주었다.
엠블러는 붉은 갈기를 가진 위엄찬 사자의 형상이었다.
“저, 저건?!!!”
깜짝 놀란 파르테스의 교수들과 귀족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응으로 보아 이것은 분명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는 특혜임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맥캘리도 ‘뜨악’ 소리를 조용히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관료는 선포했다.
“그 공로를 치하하여 칼리언트 슈타크에게는 금괴 300개, 그리고 수호기사의 칭호를 선사한다.”
“세, 세상에!!”
“개국 이래로 단 한 명밖에 받지 못한 호칭을…….”
“조국도 아닌 타국의 사람에게, 그것도 저렇게 어린 녀석한테…….”
스첼레투스의 교수, 첸 리들러는 믿기지 않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실리아의 수호기사.
그 칭호는 이실리아의 큰 은혜를 베푼 자에게 주어진다.
이실리아는 수호기사의 칭호를 부여받은 기사가 이실리라에 자신의 기사단을 구축할 때 병력과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받는다.
조국의 사람에게 이러한 칭호를 내리는 것도 큰 부담이거늘.
타국의 사람에게 수호기사란 칭호를 하사하다니…….
귀족들은 일제히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런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왕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과거 이실리아의 건국을 도운 그랜드 마스터에게 주어진 호칭.”
“…….”
단순히 한마디를 내뱉은 것인데, 군중은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그 엄숙한 분위기에 귀족들도 노골적으로 내보이던 감정을 감췄다.
그녀는 면사 너머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닉스 스퀘어에서 그랜드 마스터의 비전을 복원하고 계승한 그대에게는 충분히 합당한 포상이라고 생각했다. 칼리언트 슈타크여. 앞으로도 이실리아는 수호기사인 그대를 지지한다. 졸업을 축하한다. 앞으로 그대가 갈 길을 응원하겠노라.”
척!
칼은 절도 있게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백성들은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보냈다.
“칼리언트!”
“칼리언트!”
그 이름은 파르테스를 너머 이실리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두근두근.
가슴이 벅찬 느낌에 칼은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묘하게 마음을 간질이는데, 그 느낌이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두려움 없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전생에서는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이름, 벨리앗.
그러나 칼리언트 슈타크란 이름은 그와는 반대로 모두가 칭송하고 있었다.
낯선 기분에 칼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 * *
졸업식 겸 훈장 수여식이 끝난 밤.
칼은 파르테스의 정원에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툭.
그때 누군가 어깨를 쳤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릴리의 손가락이 칼의 뺨을 꼭 누르고 있었다.
“……뭐야?”
칼은 슬쩍 그녀의 손을 치우며 바라보았다.
“뭔가 아쉬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놀래켜 주려고.”
“딱히 아쉽지 않아.”
“또 고집부린다.”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떠나기 전, 파르테스를 담아두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 힘들면 다시 돌아와도 돼.”
“돌아가지 않아.”
이미 알테어 복귀를 선언했고 이 상황이 가문에 보고되었다.
애초에 내정되었던 3년이란 시간의 절반만 채운 채, 복귀한다는 소식에 가문의 사람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릴리는 그네에 앉아 푸념 어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아, 일 다 끝나고 칼이랑 놀기로 했었는데. 치사하게 먼저 가네.”
의도치 않게 약속을 어긴 게 돼버렸기에 마음이 불편해진 칼은 고개를 돌렸다.
릴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칼에게 말했다.
“칼 이거 밀어줄래?”
그녀의 요구에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그네를 밀어주었다.
릴리는 그네를 타며 말했다.
“……재밌었어, 칼이 와서. 나 솔직히 견디기 어려웠는데 칼 덕분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넌 충분히 잘하고 있었어.”
뚝.
왠지 모르게 그녀의 뺨을 타고 옥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지만.
“…….”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5분쯤 시간이 흐르자…….
“준비가 끝났습니다.”
뒤편에서 슈미트와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으로 보아 그들 역시 이 섬에 떠날 채비를 마친 것 같았다.
“간다. 아프지 마라.”
칼은 마지막으로 검지를 말아 그녀의 머리를 살짝 때리며 걸음을 옮겼다.
“진짜. 마지막까지 정 없게 떠나네.”
릴리는 검지로 눈물을 훑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