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게어트너는 온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자신의 심장에 비수를 박아 넣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종말의 시간이 다가왔는지 게어트너의 몸은 석상처럼 굳더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부가 완전히 날아가 입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게어트너는 힘겹게 한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타……라.]
게어트너는 가하라스에게 힘을 빼앗기고 있는 타라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어 보였다.
닿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이 정도로 많은 인간을 죽였으니, 타라의 양분으로는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었다.
곧 하늘에서 짙은 초록색의 섬광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더니.
푸욱!
정확하게 타라의 핵심부를 꿰뚫어버렸다.
[키에에에에엑!]
이실리아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타라는 다시금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다 시들어졌다. 그리고 이내 가하라스에 의해 완전히 집어 삼켜졌다.
[타라!!!!]
마치 애타게 기다려온 여인이 죽은 것처럼 게어트너는 절규했다. 타라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게어트너의 얼굴을…….
콰앙!
칼은 지체없이 주먹으로 박살 내버렸다.
“…….”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분명 절망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라고 여겼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칼리언트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게어트너를 쓰러뜨렸다.
꿀꺽!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없이 있을 때였다.
누군가 말했다.
“영웅이다. 영웅이야!!”
“와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은 일파만파 퍼졌다.
“……시끄러워. 귀 따가워.”
칼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대중에게 말했으나, 흥분한 군중의 귀에 칼의 작은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의 눈에 칼은 여신이 보낸 사도이자, 다시 한번 이 섬에서 게어트너를 몰아낸 영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웅의 푸념 따위는 귀에 담지 않고 더욱 칭송했다.
바로 그때.
이실리아의 병사들을 대동한 에드윈 하딩턴이 칼에게 달려왔다.
“모, 몸은 무사하십니까?”
“괜찮으니까 신경 꺼.”
“네, 네?”
부상이 심한 걸 보고서 의료병을 데려온 에드원은 심하게 당황했다.
“그 상처는 위험합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지혈이 되기는 했으나, 칼의 몸은 누가 봐도 중상이었다.
골절부터 시작해서 이곳저곳에 난 상처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칼의 손아귀에 박힌 디센트캔슬의 파편을 떼어낼 때, 에드원은 그가 통증을 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비수의 날을 게어트너의 심장과 같이 같이 붙들고 터뜨릴 때 난 상처였다.
“역시 아프시면, 빨리 상처를 치료하는 게…….”
보다 못한 에드윈이 한 번 더 부추겼지만, 칼의 반응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직 할 일이 있어.”
“……칼. 고집 진짜 세구나.”
칼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릴리에게 물었다.
“이 음모를 꾸민 건 누구지?”
데제스 역시 관계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모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릴리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페트로 스타니슬라프. 그가 메노스 템벨의 수장이야.”
* * *
“타라가…… 소멸했어. 게어트너마저.”
델피나와 격전을 벌이고 있던 페트로는 크게 당황했다.
게어트너.
그것은 10성급 이상의 기사들이 한데 모여도 잡을 수 없는 궁극의 마물이었다.
제아무리 이제 막 잠에서 깨 기력을 회복할 틈새도 없이 격전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지금 그는 파밀리아 마법으로 계약한 동물의 시야를 빌려 파르테스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정면에서 그와 격전을 벌이고 있던 델피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았나 보네요.”
“…….”
본래의 계획이라면 섬의 지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타라가 굳게 뿌리를 내렸어야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현시점으로 이실리아의 병력이 파르테스를 에워싸고 있었고, 칼리언트, 베르데, 에릭이 내부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는지 모르지만, 델피나 역시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페트로에게 물었다.
“4대 1은 아무래도 버겁겠죠? 도망가실 생각인가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묘하게 얄미웠지만, 페트로는 선뜻 부정하지 못했다.
이전이라면, 능히 제압하고도 남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은 다르다.
폭주하는 재능을 가진 이 괴물들은 게어트너와의 사투로 그 역량이 현격히 증가한 상태였다.
쇄액!
그 증거로 파르테스에 진입한 베르데는 결계의 핵심부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침입하는 여유를 보였다.
‘설마 대륙에서 한두 명밖에 도달하지 못한 10성의 경지에 들어선 거란 말인가? 아니, 그거랑은 달라. 저건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될 이질적인 재능이야.’
하지만 그 예상조차 페트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칼은 그만큼 이질적이고 불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콰콰콰콰콰쾅!
지금 이 순간에도 칼은 페트로가 구축한 결계를 서킷을 통해 접속한 뒤, 연달아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체가 뭐지?’
페트로는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끝없는 지혜와 마도의 진리를 터득했음에도 단 두 사람만큼은 쉽사리 평가할 수 없었다.
데제스와 칼리언트.
“……릴리아나 녀석도 포함시켜야 되겠군.”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뒤, 페트로는 델피나에게 말했다.
“일전에 연회의 행사로 개최하던 결계 돌파 시험은 기억하겠지? 사실 그때 난 꽤나 진지했다네.”
“…….”
여유로웠던 눈빛에서는 어느새 진지하고 강렬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난 방금 전까지 서킷을 통해서 맥캘리와 대화를 하고 있었네. 마도사란 항상 진리를 찾기 위해서 헤매는 자들이지. 근데 녀석이 보고 있는 건 항상 인류사의 미래야. 쓸데없는 이상과 긍지를 품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에클라 세트든 뭐든 난 더 이상 결함품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다는 거지. 게어트너가 무너졌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뿐이야.”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원에 구축되어 있던 결계가 깨지며 칼과 베르데, 그리고 에릭이 일제히 페트로를 향해 기습을 감행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날 방해하지 말게.”
페트로는 시선은 세 사람 중 칼을 향하고 있었다.
파파파파파팟!
허공에 생성된 빙결의 창이 칼에게 지체없이 쏟아지더니…….
파앗!
순식간에 칼의 팔찌를 끊어버렸다.
“뭐?!”
당황한 칼이 경악하는 순간.
촤르르르륵.
이번에는 원형 테두리의 펜타그램이 빛을 발하며, 봉인의 사슬이 지면 위로 튀어나오더니 칼의 몸을 옥죄였다.
“네 녀석!!!”
격분한 칼은 사슬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는지, 오른손부터 시작해서 이내 전신이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구속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은 두 사람의 움직임에는 지체가 없었다.
베르데는 오러를 응축한 화살을 페트로에게 쏘았고, 에릭은 바로 뒤에서 페트로의 심장을 겨눴다.
푸욱!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어느새 베르데의 화살은 에릭의 이마를, 에릭의 창은 베르데의 심장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움찔!
깜짝 놀란 두 남자는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 없었는지, 서로의 공격을 맞고 말았다.
주륵.
“크으으윽!”
“이게 무슨?!”
에릭과 베르데는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에 당황해하며 입가의 피를 닦았다. 어째서인지 몸은 기력이 쇠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활시위를 당기면, 팔의 핏줄이 터질 것 같고 들고 있는 창은 처박힌 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스스스.
“이건.”
에릭은 자신의 손에 주름이 맺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순식간에 기습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을 제압한 페트로는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로헤리안의 유령선 사건…… 당시 배에 들어섰을 때, 꽤나 위험한 호위들이 많이 있었지. 그때 생각난 게 바로 노화의 결계였네. 배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세월의 앞에 무너져 시체조차 남지 않더군. 아아. 물론 타라를 위한 실험 재료인 귀족들은 모조리 생포했었지.”
“단단히 미친 새끼였군.”
마치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회상하는 듯한 모습에 에릭은 혐오감에 몸서리치며 결계에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적장 결계 깨뜨리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칼은 사슬에 묶여 결계를 벗어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이 지대에서 자유로운 것은 결계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는 결계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델피나뿐이었다.
그런 델피나를 본 페트로는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말했다.
“정체불명의 해적에 의해 일어난 바아라나 상선 격침 사건.”
동시에 페트로의 등 뒤로 파문이 형성됐다.
달그락, 달그락.
스슥, 스슥, 스슥.
파문을 통과하며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보랏빛 피부에 흐느적거리는 인간들이었다.
“드디어 탈출을…….”
“드디어 나갈 수 있어.”
그들은 혼잣말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다…….
콰앙!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 하는 베르데와 칼, 에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몰골로 검과 병장기를 휘두르는 그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기력을 억지로 쥐어짜 상대한 세 남자는 몸에 난 상처 때문에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욕을 치르고 있는 그들에게 페트로는 말했다.
“과거 전성기조차 겪지 못한 강자들이었고, 지금은 내 소장품으로써 전락한 존재지. 이들이 정체불명의 해적의 정체라네.”
“그게 무슨…….”
아직 이야기를 완전히 듣지도 않았지만 델피나는 꺼림칙한 감정이 들었다.
페트로의 대답은 어김없이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는 일찌감치 그 재능을 알아보고 안개의 미로 속에서 영원히 그들을 헤매게 만들었지. 갈증과 허기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결단코 죽을 수 없는 운명. 누군가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네. 나올 수 있는 조건은 딱 한 가지. 결계에서 벗어나와 나를 열 번 돕는다.”
겨우 그거라고?
이해가 되지 않는 조건에 델피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페트로는 그에 대한 대답도 확실히 해주었다.
“근데, 그 도움이란 게 별로 필요한 적이 없어서 꺼낸 건, 두 번 정도 됐겠군.”
상상을 초월한 잔혹함에 델피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의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평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보고 있지. 하지만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것도 인간하고 여기고 있지.”
희번득!
“웃기지 마!”
분노한 델피나는 완드를 통해 삽시간에 불꽃을 집약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