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브로켄 마운틴에 구축한 세 개의 진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시체 사이에서 모습을 숨긴 채로 성장한 타라는 마을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
그 기생식목을 키워내는 것은 눈이 없는 거대한 거인, 게어트너.
[크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마을에 집결한 게어트너의 우렁찬 포효에 게어트너를 막으려던 병사들은 그대로 경직됐고.
“꺄아아아악!”
“도, 도망가!!!”
그 압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다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앗!
그걸 본 게어트너가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우측 측면에서 날아온 아인벨레가 게어트너의 손목의 힘줄을 베어낸 다음 지면에 꽂혔다.
-크아아아앙!!!
분노한 게어트너가 창날을 뽑아 그대로 투척했다.
날아오는 창을 본 에릭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날려 창날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콰앙!
아인벨레는 건물 외벽에 고스란히 박혔고, 충격의 여파가 에릭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어린애 장난감처럼 다뤄버리는군.”
에릭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창날을 빼냈다.
푸푸푸푸푹!
다행히 에릭의 활약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는지, 베르데의 화살이 마을 곳곳에 핀 타라의 눈동자를 보는 족족 꿰뚫었다. 그 바람에 게어트너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쇄액!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게어트너의 목을 향해 비어벨이 붉은 오러를 품고서 날아들었다.
카아아앙!
붉은 오러는 게어트너의 목을 가르지 못한 채 불똥만 요란하게 튀었으나, 다시 게어트너를 날려버리는 데는 성공했다.
에릭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철퇴를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다쳤는데도 어디서 저만한 힘이 튀어나오는 건지. 아니. 그보다 상태가 조금 이상한데.”
칼에게서 왠지 모를 엄청난 기세를 느낀 에릭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 무시무시한 게어트너가 칼에게서 공포를 느꼈던 걸 생각하면, 분명 칼에게는 무언가 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 다 부숴버릴 생각인 것 같아.”
때마침 베르데가 말하자 합류하자, 에릭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래도 너가 엄호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화살이 다 떨어졌어.”
베르데는 텅텅 빈 자신의 화살통을 가리킨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혼자 상대한다더군.”
“뭐? 저 괴물을?”
콰앙! 콰앙!
혼자 상대한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칼은 게어트너 주변을 맴돌며 연달아 비어벨을 휘둘러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콰앙!
그 와중에 게이트너가 휘두른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왼팔을 스치며 칼의 건틀렛이 박살 났다.
콰앙!
비어벨은 계속해서 게어트너의 목을 파고들었다.
“한군데만 집중적으로 퍼붓는다고 해서 잘릴 강도가 아닌데.”
주륵.
하지만 어째서일까?
말과 다르게 지금 이 순간 에릭은 게어트너가 아니라 칼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칼이 지금까지와 달라질 것만 같았다.
“당연히 말려야지. 빡쳤다고 저렇게 무모하게 나서는데 몸이 남아나겠어?”
그때 맥캘리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법이 있습니까?”
에릭의 질문에 맥캘리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목과 어깨 등을 풀며 말했다.
“당연히 있지. 역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알아?”
맥캘리는 어깨에 메고 있던 화살통을 베르데에게 건네줬다.
“우선 타라부터 저지하자고.”
이어서 자수정으로 이루어진, 비수 디센트캔슬 역시 베르데에게 건네줬다.
“이건.”
“심장의 위치는 내가 탐색할 거야. 넌 정확히 그 표적을 노리면 돼.”
맥캘리는 평소의 철부지였던 말투와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하고 이지적인 얼굴로 왼손에 두 개씩 착용한 팔찌를 들어 보였다.
“자, 잠깐 칼리언트는 어떻게 말릴 건데?”
“그 역할은 가장 믿을만한 녀석한테 맡겼어.”
미소를 지은 맥캘리의 팔찌가 선분홍색의 빛을 강하게 발하더니…….
콰칭!
곧 엄청난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변화는 곧바로 일어났다.
콰아아앙아앙!
건물 곳곳을 휘감은 굵은 넝쿨들이 일제히 타라를 파고들며 도시 전체로 뻗어 나갔다.
-키에에에에엑!
자신의 몸을 파고들며 성장하는 수목에 타라는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변화의 조짐에 대해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은 베르데였다.
“……가하라스.”
타라를 파고들며 생장한 수목은 파라디스에 깊게 뿌리를 뻗은 나무인 가하라스였다.
부정한 것을 집어삼키는 수호의 상징.
하지만 파라디스만큼 비옥한 토지가 아니라면 뿌리를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는 자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맥캘리는 이지적인 눈빛으로 파르테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인간은 그에 맞춰 진보했죠. 한낮 과거에 사로잡혀있기에는 시대는 너무나 변해서 그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에릭은 무어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도시 전체로 광활하게 퍼져나가는 맥캘리의 서킷을 보며 입을 꼭 다물었다.
“현시대의 인류를 발전시키는 중심은 에클라 세트, 아니면 그에 준하는 인재들이 될 겁니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그런 하찮은 호기심 때문에 미래를 져버리려는 오늘의 만행은 역사가 기록할 겁니다. 어리석은 마도사여.”
동시에 파르테스에서부터 강대한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맥캘리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한낮 하찮은 계집한테 그렇게 애를 먹는 건가요?”
의미불명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맥캘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곧 번뜩 뜨며 본격적으로 서킷을 활용했다.
“탐색 시작.”
파직!
그녀의 의지에 맞춰 선분홍빛 마력이 일제히 서킷을 타고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도시 전체가 타라에 의해 침식당할 위기.
하지만 선분홍빛 마력과 함께 줄기를 뻗은 가하라스에 의해 타라는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성장을 멈추었다.
뿐만 아니라 맥캘리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가하라스는 타라의 생기를 흡수하며 뿌리를 깊게 뻗었다.
[타라!!!]
이에 제일 당황한 것은 바로 게어트너였다.
게어트너는 즉각 칼과의 싸움을 멈추고 양손으로 가하라스를 붙들려고 했다.
콰앙!
하지만 어림없다는 듯 비어벨이 그의 목을 강타했다.
[방해하지 마!!!]
그러자 순간 게어트너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파앗!
칼의 공격에 의해 몸이 뒤로 넘어가던 녀석은 양손으로 지면을 받친 다음 몸을 회전시켜 칼을 걷어찼다.
공격을 허용한 칼을 건물더미에 처박혔다.
후두두둑.
가까스로 지혈했던 상처가 또 터져나갔다.
뚜벅뚜벅.
이제는 분노로 인해 통증조차 제대로 못 느끼는지, 칼은 그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난동을 부리는 게어트너로 향했다.
죽인다.
칼의 머릿속은 굴욕으로 인한 분노가 한가득했다.
분명 현재의 그를 초월한 강자는 많았으나, 이렇게 완벽히 깨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목숨보다 자신의 긍지를 더 중요시 여기는 칼에게 있어 이것은 결코 지면 안 되는 싸움이었다.
‘갱생이든 뭐든 상관없어. 손에 잡히는 대로 죽인다.’
스멀스멀.
감정에 몸을 맡긴 칼이 붉은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응애!”
무너져 가는 건물 속에서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파직!
때마침 천장이 부서지면서 그녀를 덮치려고 했다.
“?!”
깜짝 놀란 칼이 움직이려고 했지만.
후우웅!
그보다 먼저 뒤편에서 날아온 에어블래스터 마법이 무너져 내리는 잔해들을 밀어내 두 모녀를 구출했다.
“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
에어블래스트를 시전한 릴리아나는 칼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고초를 겪었는지, 옷과 얼굴이 흙먼지투성이였지만, 그 모습은 평소보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
격분으로 인해 말을 하는 방법조차 잊었는지, 칼은 동공을 파르르 떨며 그녀를 지켜봤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최대한 대피시킬게. 난 이것밖에 하지 못하니까.”
릴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칼에게 자수정으로 이루어진 비수인 디센트캔슬을 건네주었다.
“아까 표정 무서웠어. 물론 평소에도 인상은 사납고 무모하고 툭 내뱉는 한마디가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빠직!
“싸우자는 거냐?”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칼이 으르렁거리자, 릴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난 평소 기사를 지향하는 칼이 멋있어 보여.”
“……쓸데없는 소릴.”
칼은 릴리가 건네주는 디센트캔슬을 집어 들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델피나가 위험해. 오래 끌면 안 돼.”
릴리는 분한 듯 주먹을 쥐며 파르르 떨었다.
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5분.”
“너무 빠른데?”
릴리가 쓴웃음을 짓자, 칼은 우드득 관절을 풀며 말했다.
“1분.”
* * *
온몸의 근육이 찢겨질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뼈마디 곳곳은 균열이 가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윽.
다시 한번 게어트너의 앞에 선 칼의 표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비어벨의 성능을 제대로 못 살렸어. 게다가 오러의 힘에 치중한 나머지 검의 본질인 벤다는 개념 자체를 잊고 있었고. 이래저래 참 형편없었군.’
맥캘리에게 전수받은 그랜드 마스터의 비전 검술.
그 첫 장에는 검을 쥘 때, 딱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담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파라디스에 있는 리스벨리오 폰테에서 칼은 스스로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하겠다고 맹세했다.
칼은 곧장 트리거를 발동해 주변 지대에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켰다.
엄청난 힘의 격류에 그나마 있던 기력마저 잃었는지, 타라가 시들어지기 시작했고.
두둑!
게어트너는 전신에 핏대를 세우며 칼 쪽을 쳐다봤다.
[타라를 방해하지 마!!]
이제 끝을 내겠다는 듯 게어트너가 칼을 향해 힘껏 돌격했다.
칼 역시 곧장 비어벨을 빼들어 반격했다.
키기기기깃!
어김없이 게어트너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불똥을 튀기며 튕겨 나갈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
게어트너의 오른팔이 잘려나간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절단된 팔에서 붉은 피를 잔뜩 뿜어내던 게어트너는 칼을 향해 팔과 다리를 거칠게 휘둘렀다.
칼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공격들을 피해냈다.
그리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십자인대를 도려낸 다음 이어지는 공격을 흘려 넘겼다.
콰앙!
주저앉은 게어트너의 무릎을 밟고 점프한 칼은 오른쪽 무릎으로 게어트너의 턱을 가격했다.
게어트너의 고개가 크게 들썩이며 뒤로 넘어갈 뻔했다.
[타라!!]
거칠게 소리친 게어트너가 칼에게 남은 손을 휘둘렀다.
칼은 검 끝을 날아드는 손에 갖다 붙였고, 다시 한번 불똥이 튀기며 게어트너의 왼팔이 갈라졌다.
서걱! 서걱!
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게어트너의 오른쪽 무릎마저 도려내 버렸다.
콰아아앙!
위험을 느낀 게어트너가 등을 돌려 도주를 꾀하려고 했다.
물론 이를 허용할 리 없던 칼은 그 목덜미를 손으로 붙들어 지면에 처박았다. 그러곤 힘껏 발을 굴렸다.
콰콰콰콰콰콰쾅!
팔다리가 잘린 게어트너는 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콰앙!
결국 게어트너의 몸이 광장에 위치한 분수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게어트너는 경이적인 힘을 이용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칼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타라가 좋으면, 네가 거름이 돼주라고. 버러지.”
오싹!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게어트너는 겁을 먹은 아이처럼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타라의 눈으로 살펴본 칼은 적색의 불길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악마.]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지.”
칼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게어트너의 머리에 서킷을 그려 넣었다.
콰아아앙!
이어서 마나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게어트너의 얼굴이 완전히 날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어트너는 몸을 일으키며 칼을 향해 잘린 팔을 뻗어 반격을 가했다.
하나, 칼의 공격이 그보다 한발 일찍 게어트너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칼의 손에는 게어트너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디센트캔슬이 쥐어져 있었다
푸욱!
심장에 비수가 박히자, 크게 당황한 녀석은 허둥지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했다.
“꺼져라.”
콰직!
칼은 디센트캔슬과 함께 게어트너의 심장을 직접 손으로 옥죄어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