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꼬이기만 했던 퍼즐이 완성되자.
페트로는 음산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칼을 지지했던 것은 데제스를 경계하기 위해서였어.’
릴리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페트로는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데, 정체를 밝혀낸 것까지는 좋지만 설마 아무 대책 없이 내 앞에 서려는 건 아니겠지?”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기류가 변했다.
지금 당장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었다.
촤르르륵!
페트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결계 마법 속박의 사슬이 두 사람을 묶으려고 했지만.
스팟!
사슬이 두 사람을 묶기 전에 이미 릴리와 델피나의 신형이 사라졌다.
단거리 텔레포트 마법의 일종인 블링크를 연달아 사용해 이미 학교 정원 쪽으로 탈출했다.
그러면서도 도망치기 직전 델피나는 페트로에게 공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화르르르륵!
페트로의 눈앞에 곧 폭발할 것 같은 파이어 볼이 한가득했다.
“정말 끝을 모를 재능이군. 허허허허, 5년 뒤라면 제법 해볼 만한 승부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페트로는 델피나의 재능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콰아아앙!
학장실은 곧 불길로 가득 메워지며 모든 것이 산산이 불살라져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 * *
페트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델피나는 헤이스트를 시전한 다음 릴리와 함께 정원을 가로질렀다.
드르르륵.
콰아아앙!
하지만 두 사람이 학교에 벗어나기도 전에 지면에서 거대한 암석의 블록들이 연달아 솟구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릴리는 이마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라비란스.”
페트로의 결계 마법의 일종인 미궁 마법이었다.
7서클 이상의 마도사도 쉽게 파헤칠 수 없는 결계 마법이 펼쳐졌지만.
델피나는 전신에서 연보랏빛의 마력을 발산하며 영창을 읊었다.
“데, 델피나.”
그 모습이 실로 경건해 보여 릴리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모여라. 대지조차 일그러뜨릴 수 있는 원초의 힘이여. 폭동의 힘을 잠재우고 길을 열어라.”
처음에는 전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조용했다.
하지만 마력은 곧 델피나의 의지에 따라 한 뭉텅이로 뭉쳐지더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반투명한 구가 되었다.
“그래비티 코어.”
콰아아아아앙!
반투명한 구들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눈앞에 있는 라비란스를 모조리 타파하고 새롭게 길을 열었다.
하지만 재난은 연달아 일어났다.
허공에 생성된 것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뾰족한 얼음송곳이었다.
소나기로 착각할 만큼 뒤덮인 그 공격에 델피나는 또 다른 영창을 읊었다.
“다시 한번 집결을 표명한다. 나약한 의지는 배제. 성곽 위에 꽂힌 깃발은 개전의 시작이니, 깃발 앞에 모인 용자들은 검을 들어 반격하노라. 오라. 맹자의 검, 용기의 방패를 든 전사들이여.”
쏴아아아아!
영창과 동시에 하늘에서 빙결의 창이 무자비하게 쏟아졌지만.
“그래비티 캐슬.”
콰콰콰콰콰쾅!
이번에는 반투명하게 응축된 구체가 빙결의 창을 찌부러뜨리며 공격을 모조리 무마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수백 자루의 빙결의 창은 일제히 궤도를 선회해 이 어마어마한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에게 돌아갔다.
쿠구구구구.
“에클라 세트는 터무니없는 괴물들이군.”
빙결의 창에 의해 한차례 휩쓸린 자리에서 흙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페트로는 그 사이를 뚫고 걸어 나오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수준이 너무 높아.’
릴리 역시 어느 정도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델피나와 페트로의 전투는 그녀가 끼어들기에는 너무나 수준 높은 마법이 오가고 있었다.
휘리릭.
이 정도로 택도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델피나는 완드를 돌리며 페트로에게 말했다.
“저는 슬슬 몸이 풀리려고 하는데, 메노스 템벨의 수장님은 어떤가요?”
“호오. 설마 자네 혼자 날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가소롭다는 뉘앙스에 델피나는 싱긋 웃으며 맞받아쳤다.
“대륙에서 칭송하는 전설인데, 그 정도쯤 해줘야 되지 않겠어요?”
“재밌겠군. 심심풀이로 좋겠어.”
울컥!
“심심풀이라고 했나요?”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는지, 델피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암.”
페트로는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곧 게어트너가 눈을 뜰 걸세. 그때가 되면 이 섬은 끝이 날 거라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면 곤란한데요.”
반박을 한 델피나는 릴리에게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세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릴리가 무어라고 반박하기도 전이었다.
스팟!
델피나의 완드가 연보랏빛을 내며 릴리의 몸을 파르테스 밖으로 텔레포트 시켰다.
“놓아줘도 의미는 없네. 자네는 게어트너의 힘을 모르고 있구먼.”
페트로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자,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
“뭘 모르는 건, 당신이 아닌가 싶네요.”
“무슨 소리지?”
“파르테스의 망나니의 힘을 너무 얕보면 곤란하답니다. 실제로 학장님의 결계도 얼마 전에 송두리째 무너뜨렸잖아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가 온 뒤로 예정대로 순탄히 풀린 일이 몇 개나 되나요?”
“…….”
페트로는 일순간 말문을 잃었고.
델피나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없나 보네요.”
울컥!
그때의 기억은 페트로에게 있어 굴욕이자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힌 기분 나쁜 순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페트로의 눈 밑에는 거뭇한 음영이 서렸다.
“……아무래도 자네에게는 절망이란 것을 가르쳐줘야 되겠군.”
스스스스스.
페트로의 전신에서 불길한 오오라가 피어올랐고, 델피나는 주륵 식은땀을 흘리며 반격할 준비에 나섰다.
* * *
지력이 강탈당하고 있는 이실리아.
사태의 긴박함을 깨달은 예카테리나 2세는 병력을 게이트너와 타라의 본체가 숨겨진 장소로 추정되는 브로켄 마운틴에 집결시켰다.
벙력 전체를 아우르는 이는 푸른 물결의 단장이자 에클라 세트 일원 중 한 명인 에릭 듀란트였다.
칼과 베르데는 병력이 집결된 곳과 반대 방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독한 안개군.”
벌레의 그림자조차 지나치게 커다랗게 확대되어 음산한 기분이 드는 브로켄 마운틴.
숲에서 타고난 강함을 선보이는 베르데조차 이 기이한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하지만 칼은 베르데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베르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칼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온다.”
다가오는 무언가의 기척을 읽어내고 내뱉은 발언은 아니다.
다만, 수천 년 동안 전장에서 살아온 마족 시절에 터득한 직감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칼의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브로켄 마운틴에서 얌전히 잠에 빠져있던 게어트너의 전신 근육이 꿈틀거렸다.
[배고파.]
잠에서 깬 이유는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타라의 작은 속삭임 때문이었다.
[크르르르르. 타라.]
눈이 없는 생명체는 타라에게 영양분을 주기 위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났다.
스윽.
가느다라면서도 두꺼운 팔과 다리의 근육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내 고개를 드는 순간 붕대로 눈을 가린 4미터 크기의 거인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오와 열을 이루고 있는 군사들을 발견했다.
게이트너는 그들을 거대한 기생식목을 키우기 위한 거름으로 판단했다.
[타라!!!]
거대한 노호성을 내지른 게이트너는 집채만 한 몸을 날려 정확히 군사들이 있는 자리에 착지했다.
콰아아아앙!
“뭐, 뭐야?!!”
순식간에 균열이 일어난 지반.
히이잉!
놀란 말들은 앞발을 들며 도망가려고 했다.
덥석!
콰지지지직!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손을 뻗은 게이트너는 병사의 몸을 한 손에 움켜쥔 다음 그대로 짓눌러 터트렸다.
순식간에 터진 인간의 붉은 피가 지면을 가득 적셨다.
“히, 히익!”
“…….”
압도적인 힘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게어트너를 지켜봤다.
이것이 이실리아를 한때 공포로 몰아넣은 괴물의 정체.
히죽!
게어트너는 잇몸을 드러내며 힘껏 병사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뛰어난 무위는 필요 없다.
카카카캉!
그 몸은 어떤 병장기로도 꿰뚫을 수도 없었다.
죽이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간단했다.
손으로 찌부러뜨리거나 발로 밟아 죽이거나 손으로 쥔 시체를 병사들 사이로 던졌다.
[타라!!]
게어트너가 본격적으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으아아아아!”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은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지금 여기서 녀석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실리아가 붕괴된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통제가 먹히지 않았다.
콰아아앙!
무엇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곳곳에 균열이 가더니 그 틈으로 타라가 피를 흡입하며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타앙.
게어트너의 돌격에 전의를 상실한 어린 병사는 그대로 검을 지면에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끝이야.”
병사의 머릿속으로 절망이 가득 차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 섬광이 게어트너의 발목을 도려내며 그대로 고꾸라뜨렸다.
쿠웅!
균형을 잃은 게어트너는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 대체 누가?!”
“다, 단장님!!”
푸른 섬광의 실체가 아인벨레를 들고 서 있는 에릭 듀란트라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모두 안도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에릭은 호되게 야단쳤다.
“구축한 진지로 전원 대피! 게어트너가 마을에 들어가게 놔두면 안 된다!”
“하, 하지만 단장님은!!!”
“명령 불복종은 엄벌에 처한다!”
에릭의 명령에 그들은 그제야 자신의 본분을 깨달은 듯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에릭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알았나?!”
“네!”
그 일갈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하며 일제히 타라를 베며 진지로 복귀하려고 했다.
서걱! 서걱!
[타라!!]
눈앞에서 잘려나가는 타라를 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던 게이트너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한 손으로 지면을 내리쳤다.
쩌저저저적!
콰아아아앙!
“우와아아아아!”
지면이 순식간에 와해되면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병사들은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자식이!”
그 광경에 분노한 에릭은…….
콰앙!
그대로 아인벨레로 게어트너의 목을 후려쳤다.
하지만 아인벨레는 두꺼운 근육이 밀집한 게어트너의 목을 부러뜨리기는커녕, 생채기 하나도 내지 못했다.
“꼼짝도 안 해?”
[크르르르르.]
게어트너는 가소롭다는 듯 낮게 포효하며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