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별들의 모임은 고요한 가운데 몰아닥친 돌풍 같았다.
그 돌풍이 분 여파는 상당히 컸다.
에클라 세트로 호명된 이가 파르테스에 네 명이나 있다는 것을 인지한 학생들은 저마다 경외심 어린 시선으로 칼과 동행하고 있는 델피나와 베르데를 주목했다.
웅성웅성.
평소에도 남의 이목을 잘 끌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갖춘 둘이었기에 칼은 슬슬 짜증이 났다.
홱!
결국 칼은 등을 돌려 베르데와 델피나에게 말했다.
“거슬리니까 떨어져.”
“유학 오라고 협박할 때는 언제고?”
베르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고, 델피나는 바바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표정에는 불만이 한가득해 보였다.
“애초에 그 자리에서 제일 눈에 띈 것은 선배였는데, 저희를 탓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다른 누구도 아닌 페트로의 결계를 깡그리 부숴버렸으니, 누구라도 칼의 저력에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슬며시 주변을 살핀 칼은 슬쩍슬쩍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을 느꼈다.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쫓아온 이유는 뭐야?”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 서요.”
“뭐가?”
칼의 반문에 베르데는 정원에 있는 한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 보여주었다.
초록색 나뭇잎은 평소에는 활기가 생생했으나, 지금은 묘하게 그 생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지력을 강탈당하고 있어. 너는 벌써 이 이유에 대해 조사하고 있겠지.”
“…….”
미미한 변화라 눈치채기 어려웠으나.
파라디스라는 광활한 숲을 지키는 수호자로 활동한 베르데에게는 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맥캘리 교수님도 감당 못 할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할 말이 있다고 했거든요.”
“…….”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했을 때, 혼자 힘으로 감당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마음대로 하든지.”
칼은 다시 걷자 델피나는 슬쩍 옆에 붙으며 말했다.
“선배. 이번 학기에 조기 졸업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무슨 마음의 심경변화라도 있는 건가요? 겨울까지 여기서 느긋하게 보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학기 말까지 불과 보름이 남았을뿐더러, 졸업 대상자는 이틀 후에 발표된다.
파르테스의 정책상, 논문이 통과된 사람만 졸업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기에 졸업하는 이는 극히 일부뿐이었다.
해당 학생이 소속된 학파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학파에서 논문을 검증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기에, 난이도는 실로 극악이었다.
물론 칼이 떨어질 일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스첼레투스의 교수, 첸 리들러마저 어쩔 수 없이 논문 통과에 손을 들어줄 정도로 칼의 논문은 흠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교수들 이외에는 몰랐다.
칼은 델피나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추측해 보았다.
‘출처는 에리 녀석이겠군.’
분명 또 타산적인 계산이 들어가겠지만, 칼은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어.”
“맥캘리 교수님 밑에 있는 데도요?”
“평생 배울 수는 없잖아.”
“아.”
맥캘리가 창안한 이론은 실로 방대하고 그 실험에 어울리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테어로의 조기 복귀를 결심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아쉽다는 감정인 건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려고 할 때.
베르데가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섬의 불운을 바로잡는 것은 졸업식 전 가장 화끈한 축제가 되겠군. 어울려주지.”
“?!”
깜짝 놀란 칼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킬러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걸.”
“…….”
“…….”
그 순간 베르데와 델피나는 마치 생소한 것을 본 것 마냥, 멀뚱히 칼을 쳐다봤다.
“뭐야? 왜 그래?”
칼은 조금 당황했고, 베르데와 델피나는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아니. 너도 나이대에 맞는 미소를 지을 수 있구나 싶어서.”
“솔직히 너무 귀여워서 깜짝 놀랐어요.”
칼의 미소에 여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흠칫흠칫 쳐다봤고.
남자들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는 소릴.”
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베르데와 델피나는 서로를 쳐다보다 피식 웃으며 그 뒤를 쫓아갔다.
* * *
해상 무역 국가인 이실리아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의 수가 타국에 비해 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중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많은 부를 지닌 바아라나 상선이 정체불명의 해적에 의해 침몰당한 사건이다.
여기서 기이했던 건 해적들이 금은보화나 귀금속은 건들지 않고 사람만을 납치한 뒤, 상선은 침몰시켰다는 점이다.
그 뒤로 3년 뒤.
귀족들이 탄 호화로운 여객선이 항로를 잃어버려 표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이실리아는 급히 수색대를 편성해 군함까지 띄워 수색에 나섰지만.
찾아낼 수 있던 것은 너덜너덜한 여객선, 로헤리안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넝마 짝이 돼버린 돛, 이곳저곳 녹이 슬어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철제구조물, 반쯤 쪼개진 갑판.
불과 나흘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 치고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듯 보였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저명한 마도사들까지 왔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건 모두 아직까지 그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오닉스 스퀘어의 오두막.
“내가 알아본 것 중에 가장 의문이 풀리지 않는 사건이야. 칼이 원하는 건, 아마 이런 종류의 사건이겠지.”
릴리는 앞서 두 사건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맥캘리는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중얼거리다가 곧 진지한 눈빛으로 칼을 쳐다봤다.
“행방불명자는 타라를 위한 실험체로 사용됐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맞아.”
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서 봤던 무수한 시체, 행방불명자의 숫자랑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베르데가 팔짱을 낀 상태로 칼에게 물었다.
“행방불명자는 왜 전부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이지?”
군에 의한 위험한 인체 실험이나 흑마법사의 키메라 실험은 타국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실험 대상은 보통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난민, 혹은 하층민이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칼 대신 델피나가 입을 열었다.
“귀족만 노리는 집단이자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평등이라는 이념을 가진 단체가 생각나네요. 이름이 분명 메노스 템벨이었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향후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해야 할지 의논을 해야 한다.
“…….”
대략적인 추측은 끝났지만,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쯤.
맥캘리가 입을 열었다.
“인원을 쪼개서 다시 한번 던전 탐사를 진행해 봐야겠어. 이 부분은 여왕 폐하께도 보고를 올릴 거야. 인원은 나, 델피나, 베르데, 그리고 미친 제자. 넷으로 편성하는 게 좋겠네.”
“…….”
‘미친 제자’라는 말에 베르데와 델피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빠직!
칼은 슬며시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적어도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이름으로 부를 줄은 알아야지.”
“으갸갸갸갸. 이 망나니 제자가. 누굴 가르쳐!!!”
맥캘리는 겸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제자를 향해 주먹질을 하려고 했지만.
리치가 짧은 탓에 이번에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씨이!”
맥캘리는 살짝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며 칼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그때 릴리가 재빨리 앞에 나섰다.
“교수님. 잠시만요. 저도 같이 참여하고 싶어요.”
“……너.”
당황한 맥캘리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안 돼.”
칼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참여를 거부했다.
“이유는?”
마음에 안 드는지 릴리가 슬쩍 눈썹을 꿈틀거리며 즉각 그 이유를 물었다.
“위험해. 온전하게 지켜낼 자신이 없어.”
전생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칼에게는 한계란 게 명백히 존재했다.
칼이 에클라 세트와 비견되는 무위를 지니긴 했으나, 에클라 세트는 어디까지나 성장 중인 원석을 뜻한다.
현시대를 지배하는 기사나 마법사 중에서는 칼을 월등히 뛰어넘는 이는 존재했다.
예시로 한 명을 꼽자면, 파르테스의 학장이자 백색의 마도사인 페트로 스타니슬라프가 있었다.
릴리는 그런 칼의 말에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그리고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 그런 것도 아니야.”
“이유는?”
이번에는 칼이 무어라고 하기 전에 맥캘리가 질문을 던졌다.
“타라가 있다면, 타라를 쓰러뜨린 뭔가도 같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사람은 많으면 좋고, 이런 말을 드려 부끄럽지만, 저 제법 유능해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피력한 게 부끄러웠는지, 릴리의 귀 끝은 새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웃고 있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가 유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같이 가자고. 대신 델피나가 릴리를 엄호해줘.”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델피나는 활짝 웃어 보였고 릴리의 표정도 저도 모르게 밝아졌다.
스승이 한 결정에 토를 달 수 없었는지,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다 검지를 말아 릴리의 머리를 툭 쳤다.
“몸조심해라.”
기분이 좋아졌는지, 릴리는 얄궂게 웃으며 칼에게 말했다.
“누가 할 소릴.”
* * *
밤하늘 위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쏴아아아아.
거뭇하게 변해버린 파도가 모래사장 위를 덮쳤다.
그곳에 발을 내디딘 교복 차림의 데제스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은백발과 푸른 동공.
이질적이면서도 신비한 인상을 주는 그 외모는 남녀 모두를 현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벅저벅.
그리고 그런 데제스를 향해 다수의 무리가 다가왔다.
스첼레투스의 학파의 모리스는 학생 시절 때는 데제스를 서슴없이 대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엄숙하게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모두 데제스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글라우벤 학파의 리더, 리브스 뒤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데제스는 공식적으로 조기 졸업이 확정된 상태기에 졸업식 행사는 건너뛰는 셈 치고 가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자퇴 처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와서 상관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데제스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제법 즐거운 학창 생활이었지?”
“…….”
데제스의 말에 아무도 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건 말건 데제스는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일 즐거운 것을 목전에 두고 떠나가는 게 아쉽네.”
“하지만 계획은 아직 완전히…….”
모리스가 급하게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데제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녀석들은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어. 그걸로 충분해.”
확신에 가득 찬 답변에 모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데제스가 틀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저벅저벅.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데제스를 향해 걸어왔다.
바싹 경직된 꼬리를 세우는 여우 수인 이리스와 흑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마르첼이었다.
그는 굵직하면서도 짤막하게 답했다.
“너의 뜻에 동조하지.”
“?!”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이 자처해서 부하로 들어오겠다는 말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고.
데제스는 ‘최고의 수혜를 누렸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다음 계획을 진행하지.”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한 번씩 모래사장과 섬의 경관을 훑어봤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었다.
물론 그것은 파르테스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머릿속에 그려진 한 인물 때문이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대항하던 심홍색 머리칼의 숙적.
‘그 녀석이랑은 제대로 결판을 내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번에도 내 예상을 깨주려나.’
잠시 칼을 생각을 하던 데제스는 푸훗 하고 자신을 비웃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데제스는 모래사장 위에 놓인 거대한 바위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콰아아아앙!
별 힘도 가미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묵직한 해머로 내리찍은 것처럼 갈라져 쪼개졌다.
타라에 의해 지력이 빨렸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앙!
그 증거를 보여주려는 건지, 모래사장에서 흉측한 눈동자가 박힌 타라의 줄기가 데제스와 그 무리를 에워쌌지만.
끼에에에에엑!
하늘에서부터 날아온 그리지아종 그리폰, 자우버가 뿜어낸 브레스에 의해 순식간에 불타 사라져버렸다.
바스락.
데제스는 검게 그을린 타라의 줄기들을 밟고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죽어가고 있는 섬에서 녀석들은 무엇을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