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쪼르륵.
칼은 한 손에 와인잔에 든 채로 벽에 기대어 연회장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는 루콘의 관료, 베허트가 와인을 음미하고선 입을 열었다.
“참으로 진한 향이군요. 역시 이실리아의 연회는 어떤 나라에서도 보지 못하는 즐거운 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자고 한 이유는?”
베허트로서는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며 대화를 하려는 의도였지만.
칼은 쉽사리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스윽.
결국 베허트는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왜 그동안 슈타크 가문에서 학대를 받아왔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게다가 에클라 세트와 동등한 재능을 지녔다는 것은 장차 큰 무기가 될 텐데, 너무 성급하게 힘을 선보인 게 아닐까 싶어 우려스럽습니다.”
“…….”
칼은 흥미가 없는지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허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파르테스의 학력은 우수하지만,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망나니란 별명이 붙었더군요. 무엇보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단절한 엘프들의 유학 계획을 성공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당신이라고 할 때 저는 크게 놀랐습니다.”
“내 칭찬이나 하려고 온 건가?”
칼의 말에 베허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타까웠습니다.”
“안타깝다니?”
“그런 출중한 재능을 두고도 최악의 지역, 알테어의 사령관으로 부임해야 된다는 사실이요. 슈타크 가문에서는 당신의 재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루콘의 황가에 기대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
발설 도중, 칼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야.”
“야, 야?”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호칭에 베허트는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고, 칼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꺼. 쓸데없는 짓 하면 죽인다.”
“히끅!”
그 살벌한 눈빛에 놀란 베허트는 당황한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칼의 등을 보면, 베허트는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광견의 목에 목줄을 채우려고 한 게 실수였을지도 모르겠군.”
* * *
어느 정도 기력이 살아난 여우 수인 이리스는 레인과 칼의 보호 아래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 발걸음은 그녀의 주인인 마르첼 발렌티노에게로 향했다.
각 국가의 관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는 달갑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리스는 헤실헤실 웃으며 자연히 그의 옆에 붙었다.
‘저런 녀석이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그녀의 태도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딱히 할 말도 없고 관심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컥!
오히려 그런 칼의 무심한 행동에 자극을 받은 것은 마르첼이었다.
“데제스란 놈도 그렇고 너도 상당히 나를 얕잡아 보고 있군.”
“하수라고 생각하고는 있지.”
칼은 딱히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스멀스멀.
마르첼이 다시 한번 짙은 농도의 살기가 몸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순간.
칼이 입을 열었다.
“장소를 가릴 생각이 없다면,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주지.”
마치 ‘괜찮겠어?’라고 내뱉는 말에 마르첼은 이빨을 빠득 갈았다.
지금은 에클라 세트의 탄생을 축복하는 자리, 괜스레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나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연회가 점점 진행돼 가면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무뚝뚝하게 지켜보던 칼이었지만. 데제스의 기이한 행보 때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함께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데제스의 손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릴리아나였다.
“…….”
크게 놀란 릴리는 동공을 파르르 떨며, 어찌해야 될지 몰라 곤혹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보통이라면 몸이 피곤하다며 거절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거절하기에는 시기가 매우 적절치 않았다.
곡은 이제 막 연주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상대는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이었다.
이런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녀의 입지도 조금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스윽.
“영광이죠.”
결국 릴리는 데제스의 손에 손을 올리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흐음.”
칼은 마음에 안 드는지,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선배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름 신선한데요.”
어느새 마도사 복장에서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델피나가 그의 앞에 섰다.
“질투가 뭔데?”
칼 역시 사전적인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을 의심하고 있기에 내뱉는 질문일 뿐이다.
이에 델피나는 난감한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선배. 항상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 순진한 사람이네요.”
“쓸데없는 소릴.”
칼은 투덜거리면서 슬그머니 델피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뭐에요?”
의외의 행동에 델피나는 크게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고, 칼은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춤추자고. 싫으면 말던가.”
델피나는 황급히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귀여운 후배가 방치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나 보네요.”
“자기 입으로 귀엽다는 말은 하지 말지.”
“어라? 언젠가 내 귀여운 후배라는 말 한 적 없나요?”
“……없어.”
내심 양심에 찔렸는지, 칼은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고 델피나는 그런 칼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편, 데제스와 춤을 추고 있던 릴리는 자신을 자연스럽게 리드하는 데제스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하나부터 열까지 오만한 것을 제하고는 어느 것도 폄하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데제스였다.
데제스는 그윽한 눈으로 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너에게 언제나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 나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거든.”
“이제 아니야.”
과거의 트라우마는 이미 극복했다.
신념이 담긴 릴리의 눈을 본 데제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춤을 권한 이유는 진지하게 대화할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대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데제스는 그녀의 귓가에 넌지시 말을 남겼다.
“졸업 후 나를 따라와. 산크투아리움의 여왕의 자리를 내주겠어. 교황의 혈족이 된다면 너는 신에 버금가는 권력을 얻게 될 거야.”
“?!”
진지한 내용이 청혼이란 것에 릴리는 크게 놀랐다.
제정신도 아니고 산크투아리움이라는 거대한 성국에서 한낮 평민인 자신이 여왕의 자리에 앉는 걸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런 릴리의 의중을 파악한 건지,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내 의사지, 성국의 뜻이 아니야. 출세를 원하지 않았나? 릴리아나 아베티스트.”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여유롭게 모든 것을 괄시하는 그 눈빛에 릴리의 눈빛도 차가워졌다.
“난 그런 출세는 필요 없어. 무엇보다 네 길에 동참하지 않을 거야.”
“어째서?”
실연의 상처조차 없는지 데제스는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웃음 뒤에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파멸을 맞이하는 미래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
릴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도는 몰라. 네 생각도 모르고. 다만 네가 가는 길은 절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니야.”
“푸훗!”
그녀의 답변이 만족스러웠는지, 데제스는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그런 이유로 내 청혼을 거절하다니…… 참 용기가 가상해.”
“겨우 거절했다는 이유로 보복이라도 하게?”
릴리의 반박에 데제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어. 졸업할 때까지는 지켜볼 생각이야. 근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학생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답해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조만간 깨닫게 될 거야.”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춤은 끝이 났다.
“…….”
절묘한 타이밍이라 릴리는 반박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데제스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뒤, 물러났다.
* * *
별의 모임은 기대 이상의 흥미와 관심을 끌었다.
오늘 만남을 통해 에클라 세트들은 자신들과 동격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하고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모임은 거사를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깊숙한 지하 던전.
그곳에서 발을 내디딘 한 인영은 이제는 유령 도시가 된 검의 신전을 걷고 있었다.
혹여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칼이 배치한 쿠라빌이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지만.
뚜벅뚜벅.
쿠라빌은 바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인식하지 못했다.
남자의 발길이 향한 곳은 백골이 묻혀있는 지면 위였는데.
스윽.
남자가 품에 있던 붉은 피를 유해에 떨어뜨리자…….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 모를 살점과 파편들이 다다닥 들러붙더니, 이내 쏟아진 피를 잔뜩 머금으며 나신의 몸을 지닌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다시 한번 부활한 남자, 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이프시시마스(궁극의 자)여. 서, 설마 저를 살려주신 겁니까?”
“이날을 위해 폰, 너의 피를 보관해왔던 것이니까. 자네의 역할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거든. 그래도 진성 뱀파이어에서 일반 뱀파이어로 강등됐으니,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해야 될 거야.”
“영광입니다.”
폰은 한쪽 무릎을 꿇어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그러고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변 곳곳에는 타라를 돋게 하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이 한가득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타라를 지배한 것이 이프시시마스의 계획입니까?”
“물론 나의 계획이지. 묻고 싶은 게 뭔가?”
꿀꺽!
지금 상황에서 하려는 질문이 적절한가 싶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알고 싶기에 그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데제스 역시 이곳에서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계획을 강탈하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의문인 점이 있는 게…….”
면목 없다는 듯 폰이 고개를 수그리며 말을 이어나가려고 할 때.
이프시시마스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접점이 아예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다만 서로 분야가 겹치지 않았을 뿐이야.”
“겹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땅에는 또 하나의 악몽이 있지 않은가.”
그의 말에 폰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게어트너?!”
게어트너.
그것은 분명 타라를 지키는 정원사이자, 거인인 마물이었다.
“녀석은 게어트너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지. 하지만 내가 그 남자보다 한발 빨리 게어트너를 깨우는 방법을 찾았지.”
“시, 실존하고 있는 거라면,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게어트너는…….”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은가.”
대답과 함께 이프시시마스는 마력을 움직여 신전의 바닥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블록들이 하나둘 바닥을 벗어나 두둥실 떠오르자.
키는 4미터 정도에 온몸은 탄탄한 근육이 가득한 데다 얼굴에는 눈이 없는 거인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크르르르르르.
제대로 된 수면을 이루지 못 하고 있는 건지, 녀석은 간간이 살벌하게 포효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데제스는 날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싶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뻔하게 있는 걸 나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이프시시마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계획을 서두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