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파직!
모든 결계가 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지금까지 결계를 이용해 에클라 세트를 상대하고 있던 페트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못 말리겠군. 이 정도라니…….”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유를 보였던 페트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칼이 결계를 부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았다.
머릿속에 그려진 것은 순식간에 모든 결계의 핵심부에 접속한 붉은 서킷이었다.
한 번 달라붙은 서킷은 마치 원래 몸인 것처럼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치직!
그 붉은 서킷을 타고 흘러들어온 광포한 붉은 기운은 여지없이 결계를 박살 내버렸다.
진작부터 칼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실력이 자신을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에 페트로는 다시 한번 놀랐다.
“에클라 세트와는 차원이 다른 재능이야.”
정녕,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단 말인가.
칼의 재능은 에클라 세트를 뛰어넘었다.
물론, 그중에서 데제스는 칼과 경쟁을 할 정도의 실력자였지만.
약 2년 전만 해도 칼이 약골 공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장 속도로는 그 데제스를 월등히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고민을 한 페트로의 눈이 어느새 빛나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위험해.”
같은 시각.
칼이 일으킨 마나 브레이크에 의해 결계가 파괴되자, 델피나는 훗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새 못 참고 참가했나 보네.”
경위는 모르지만, 칼이 개입했다는 것을 깨달은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클라 세트를 돋보이게 하려던 자리는 졸지에 칼이 돋보이게 해주는 자리가 돼버렸다.
“저긴가 보네.”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심홍색 마력의 잔재를 살펴보던 델피나는…….
스스.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워 그곳으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든 에클라 세트들이 마나 브레이크가 일어나자 그 진원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척!
칼에게서 위험한 분위기를 느낀 마르첼은 즉각 단도를 역수자로 쥐며 태세를 다졌다.
‘에클라 세트인가. 그런 것 치고는 성운의 조짐은 전혀 없었는데.’
에클라 세트는 성운과 같이 반짝이는 마나를 품고 있는 게 공통적 특성인데.
칼의 마력은 그저 강렬한 심홍색 색채만 띨 뿐, 에클라 세트로서 특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에클라 세트보다 더 위험한 놈일지도 모른다.’
“대뜸 와서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허세를 부리는군.”
마르첼의 말에 칼은 별 흥미가 없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마르첼이라고 했던가. 구태여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다시 한번 부딪치면, 너, 저 녀석한테 죽을지도 모른다.”
“뭐?”
다소 냉소적인 어조로 데제스의 승리를 확신하자, 마르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 곧 분노를 내비쳤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내 한계를 단정 지어.”
“넌 쟤보다 한참 낮은 하수니까.”
빠득!
이를 갈던 마르첼은 칼에게 단검을 겨누며 말했다.
“네놈도 블루트를 가져가기 위해서 온 거냐?”
“딱히. 나한테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 대체 왜 난입을…….”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죽을 것처럼 숨을 쉬는 여우 수인에게 다가갔다.
초점이 모호해지는 것을 본 그녀는 이미 반쯤 의식을 잃었지만.
칼이 손길을 내밀자 즉각 그 손등을 힘껏 물었다.
주륵.
손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칼은 다른 손을 들어 조용히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라.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그 한마디에 여우 수인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칼은 그대로 그녀를 안아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마르첼은 싸늘한 눈동자로 칼에게 넌지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잠깐. 그건 내 재산인데, 누가 멋대로 가져가랬지?”
“버릴 것처럼 내동댕이치던데? 나한테 양보하지.”
“닥쳐. 경고하는데 내려놓고 꺼져.”
자신이 대놓고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마르첼은 다시 한번, 칼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칼은 그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울컥!
“이 자식이!!!”
결국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마르첼은 칼을 향해 달려들어 일침을 놓으려고 했으나…….
쇄애애액!
어디선가 날아온 다수의 화살이 진로를 방해했다.
카카카캉!
마르첼은 그것들을 튕겨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녀석들도 모여들었나 보군.”
화살이 날아온 쪽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베르데가 매와 같은 눈동자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주륵.
순간 데제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돼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르첼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 녀석들, 설마 저 남자 때문에 나한테 적의를 표출하는 거야.’
좌측에서는 에릭 듀란트가 아인벨레로 전력으로 투척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우측에서는 델피나가 강대한 마력을 끌어모아 대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어느새 칼은 저 너머로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빠득!
대놓고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분노에 마르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푸훗!”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제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마르첼이 눈에 힘을 팍 주며 데제스를 노려보자, 데제스는 오히려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항상 저 남자는 내 예상을 웃돈다니까. 에클라 세트 네 명 이상이 저 남자의 편을 들어주고 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내 밑으로 와라, 마르첼. 나와 동등한 존재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어. 에클라 세트라는 타이틀도 내가 이 세상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개연성일 뿐이야.”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건지, 데제스의 눈에는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싹!
불길한 기운에 마르첼은 온몸이 경직됐다.
‘이 남자. 인간 맞아?’
제아무리 에클라 세트라고 하지만, 데제스의 재능은 그의 예측을 넘어섰다.
“저건 너한테 선물하지. 잘 생각해 보라고.”
데제스는 뒤에 있는 포식의 반지 블루트를 포기하고 그대로 마르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꽈악!
마치 봐줬다는 느낌이 들어 분통이 터졌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두 명 있군.”
가까스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제심을 발휘한 그는 포식의 반지, 블루트를 손에 쥐었다.
* * *
파격적인 행사가 끝난 뒤, 에클라 세트들은 각국의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칼의 행적을 좇는 자도 있었다.
현재 칼은 휴식실에서 마르첼의 노예인 여우 수인을 돌보는 중이었다.
꽈악!
레인은 물수건을 꽈악 쥐어짜며 입술이 심하게 터진 여우 수인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새근새근.
방금 전까지 죽을 위기를 겪던 여우 수인은 상태가 안정되었는지 얼굴이 평온해 졌다.
“너무 하네요. 이렇게까지 격하게 때릴 것까지는…….”
상처를 보는 게 마음이 아픈지, 레인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노예를 어떻게 다룰지는 자기 마음이지.”
스스로 여우 수인을 구한 칼이었지만, 의외로 마르첼과 데제스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꽈악!
다만 화는 주체할 수 없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그때.
“으, 음.”
정성스런 간호가 통했는지, 정신을 차린 여우 수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상태로 주변 환경을 쳐다보던 그녀는 레인과 칼을 쳐다보더니…….
“?!”
콰앙!
크게 놀라 몸을 일으키더니 벽에 등을 붙였다.
“너무 그렇게 놀랄 것 없는데요.”
레인은 흥분한 그녀를 차분히 달래주자 그녀의 호흡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칼은 팔짱을 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지?”
“이, 이리스. 그, 그보다 주인은?”
이리스는 불안에 찬 눈으로 마르첼을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대당하면서도 그를 찾는 건가?’
칼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데려다주지. 그렇게 할까?”
끄덕!
이리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레인은 우려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가다가 또 맞으시면…….”
“괜찮아. 주인은 날 때리지 않아.”
생각해 보니 베루스 스페쿨룸을 통해서 봤을 때, 그녀를 공격한 건 데제스지 마르첼이 아니었다.
마르첼은 어디까지나 이리스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이용해 데제스의 빈틈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럼. 일단 수프를 마신 뒤에 가죠.”
레인은 약간 식은 수프를 그녀의 앞에 쟁반째로 놓았고.
삐죽!
“너 정말 좋은 애구나.”
수프의 냄새를 킁킁 맡던 이리스는 귀를 바짝 세우며 레인의 뺨을 혀로 핥았다.
“꺄아악!”
깜짝 놀란 레인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숨을 헐떡였다.
이리스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칼을 보며 말했다.
“너도 해줄까?”
“하면 죽는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칼의 말에 이리스의 얼굴은 시무룩하게 변하며 귀도 축 쳐졌다.
그 상태로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들이켰다.
“?!”
이내 얼굴에 홍조를 가득 피우며 스푼을 집어던진 뒤, 그것을 그릇째로 들이켰다.
잠시 후 그녀는 쾌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맛있어!!”
방금 전까지 처절하게 맞은 탓에 죽어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프 한 접시에 만족하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칼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산만한 녀석이군.”
* * *
밤이 깊어지고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이었다.
뚜벅뚜벅.
칼은 드디어 연회장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모두의 관심은 에클라 세트에게서 칼에게로 넘어갔다.
백색의 마법사의 결계를 모조리 깨뜨린 정체불명의 남자.
그는 에클라 세트와 대면해도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오만한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귀족들 중 몇몇은 재빨리 정보원을 통해서 칼이 파르테스 재학 중이라는 사실과 그가 데제스와 동등한 경쟁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엇보다 에클라 세트 일원 중 한 명인 맥캘리의 제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내자, 자연히 관심은 맥캘리에게 쏟아졌다.
에클라 세트가 아닌 사람을 에클라 세트와 비슷한 수준으로 인물로 키워냈으니…….
그녀의 재능이 무척이나 출중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웅성웅성.
‘요란하게 사고를 치는 건 칼인데 대가는 내가 받는구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맥캘리는 각국의 관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언짢았다.
하지만 이것은 존경하는 예카테리나 2세가 마련한 연회.
기분이 상한다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를 구한 것은 사고를 치는 망나니 제자인 칼이었다.
“스승님.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승님? 저게 나한테?’
평소와 달리 존칭을 쓰다니…….
꼬맹이에서 한순간 스승님으로 호칭이 격상하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제자가 불러서 전 이만.”
하지만 어찌 됐든 이목은 칼에게 쏟아졌으니,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곁으로 갔다.
다행히 칼의 살벌한 기운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사리 칼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칼에게 다가온 맥캘리는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약 먹었냐? 갑자기 왜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거냐?”
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스승의 격을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
“흐음.”
그 말이 무척이나 대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맥캘리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거면, 평소에도 그렇게 불러! 이 자식아!”
“글쎄.”
“으으으윽! 이 자식!”
칼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맥캘리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며 걷는 도중.
칼의 눈앞으로 가지런한 콧수염의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칼은 자연스럽게 발을 멈추며 그를 쳐다봤고, 중년의 남자는 가볍게 예의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루콘의 외교관으로 파견된 베허트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