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파앗!
환몽의 숲을 가로지르는 에릭의 질주는 그야말로 섬광 같았다.
꿈틀!
파악!
지나가던 중 그 앞으로 진흙이 뭉쳐진 거인들이 일제히 앞을 가로막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창, 아인벨레가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그것들의 가슴을 송두리째 뚫었다.
에릭은 다른 에클라 세트와 달리 탐색 능력은 다소 부족했다.
‘저기가 수상하군.’
대신 부족한 능력을 경험으로 메꾸었다. 그는 눈앞에서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기괴한 풍경을 향해…….
콰앙!
그대로 아인벨레를 투척해 결계를 꿰뚫었다.
균열이 간 결계 속으로 다시금 진흙 거인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에릭은 성가신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다음 세대에 양보를 해줘도 될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정정하시군.”
그는 결계를 구축한 페트로를 떠올리며 그대로 푸른 줄기의 섬광이 되어 진흙 거인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쓰러뜨릴 때마다 새로운 파문이 형성되는군.’
처음에는 그것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에릭은 가장 부조화를 이루는 어딘지 찾아내고는 지면에 창을 박았다.
천천히 에릭의 손을 타고 아인벨레로 흘러 들어간 오러는 창끝에 집중되더니…….
콰아앙!
이내 아인벨레는 지면 속 결계를 구축하는 펜타그램을 꿰뚫었다.
에릭을 덮치려던 진흙 거인들은 다시금 진흙으로 돌아갔다.
이내 함정이 된 결계가 모조리 사라지자, 에릭의 눈앞에는 블루트가 놓인 테이블이 나타났다.
저벅저벅.
서슴없이 걸어 그것을 손에 쥔 에릭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다가…….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줘 반지를 깨뜨렸다.
“가짜까지 만들다니, 참 지극정성이네.”
에릭은 손아귀에 있는 가짜의 파편들을 털어내고선, 창을 어깨에 갖다 대며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파르테스의 연회장.
“이야. 진짜 같은 사람들 맞아?”
“어떻게 결계에 있어서 최고봉 권위를 지닌 페트로 학장의 결계를 저렇게 손쉽게…….”
베루스 스페쿨룸을 통해서 본 에클라 세트의 실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애초에 상품에 흥미가 없는지, 맥캘리는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결계를 해독해 타파하고 다녔지만.
나머지 다섯은 블루트에 흥미가 있는지 빠른 속도로 결계를 부수고 있었다.
엘프인 베르데가 활시위를 놓으면, 화살이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화살 세례는 단숨에 결계의 핵심을 파고들며 빠른 속도로 해체해나갔고.
델피나는 역중력 마법을 시전해 지면 전체를 부수고 흔들며 결계의 중추부를 파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릭, 베르데, 델피나가 향한 곳은 가짜 반지가 있는 곳이었다.
진짜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데제스가 향하는 곳이었다.
스슥, 스슥, 스슥.
모두의 능력이 독보적이었지만, 데제스의 능력은 그중에서도 이질적이었다..
눈앞에 어떤 결계가 있든 상관이 없다는 듯이 그는 유령처럼 그것들을 통과하고 있었다.
다른 에클라 세트들을 능수능란하게 유린하던 페트로 학장조차 데제스를 상대로는 장애물이 되는 것조차 어려웠다.
콰앙!
그런 데제스를 막아선 것은 또 한 명의 에클라 세트.
바로 마르첼 발렌티노였다.
“…….”
두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마르첼이 데리고 다니는 여우 수인이 곧장 데제스의 목덜미를 움켜쥐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퍼억!
물론 이를 허용할 리 없던 데제스는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마르첼이 움직이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스슥.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마르첼은 바람보다 빨랐다.
스릉.
또한 들고 있는 초승달 형태의 단검에는 희끄무레한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데제스의 사각을 파고드는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초 남짓이었다.
콰앙!
데제스는 들고 있는 은빛의 마검, 아르젠트 파우라로 기습을 막아내며 여유롭게 웃었다.
파앗!
카카카카카카캉!
이내 두 사람 사이에서 살벌한 칼부림이 교차해 나가기 시작했고.
불똥이 튀고 있는 가운데, 여우 수인은 어떻게든 데제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콰직!
데제스는 검자루로 그녀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어느새 여우 수인의 머리에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주인인 마르첼은 관심도 없는지, 데제스의 빈틈만을 노렸다.
“…….”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천재들의 격돌에 흥미진진해 하고 있었지만, 에리는 여우 수인이 느낄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말릴 수 없어.’
에리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이실리아에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주라지만.
지금 마련된 무대는 각국의 관료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여기서 멈췄다가는 한낮 노예 따위를 위해 별들의 모임을 망쳤다는 이유로 기껏 마련한 자리가 망가질 수 있었다.
“…….”
한편 데제스와 마르첼의 격돌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칼은 에리에게 느닷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깽판 치면, 책임져 줄 수 있냐?”
“?!”
깜짝 놀란 에리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황한 그녀와 달리 칼은 서슴없이 발을 옮기며 말했다.
“상관없어. 난 딱히 눈치 따위 보지 않거든.”
어느새 칼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주인 없이 남겨진 베루스 스페쿨룸.
까득!
칼은 자신의 엄지를 물어 피를 내고서는 즉각 계약문에 서명을 했다
계약이 성립된 베루스 스페쿨룸은 칼의 모습을 비췄고, 갑작스런 칼의 행동에 모두가 당황해하며 쳐다봤다.
“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모처럼 준비된 연회가…….”
이실리아의 관료들이 즉각 말리려고 하는 찰나.
여왕, 예카테리나 2세가 그들을 만류하며 칼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결례죠? 당신은 에클라 세트가 아닌 걸로 압니다만.”
칼은 예의를 갖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책임지라고 하면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도 기회를 주셨으면 싶어서 그랬습니다.”
“기회라니요?”
그녀의 말에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클라 세트보다 제가 더 가치 있는 남자라는 것을요.”
칼의 말은 주변에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
“저, 저 건방진?!”
“네까짓 게 뭐라고!!!”
비난이 쇄도해왔지만, 칼은…….
쾅!
강하게 발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그 소리가 워낙에 큰 바람에 누군가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고, 비난을 퍼부으려고 했던 이는 딸꾹질을 했다.
“칼리언트 슈타크. 그게 제 이름입니다.”
“슈, 슈타크?!”
“루콘 최강의 무가?!”
생각지도 못한 칼의 배경에 모두가 동요했다.
루콘 자체의 군사력은 타국에 비해서 다소 약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정복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루콘 최강의 무가, 슈타크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단순히 가문의 이름만 밝혔을 뿐인데. 조용해진 그들을 보며 칼은 눈매를 좁혔다.
‘짜증나는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에 가문의 이름을 넣는다는 것이 심정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편의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칼에게 말했다.
“기회를 드리죠, 칼리언트. 하지만 이런 결례를 저질렀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각오하셔야 할거에요.”
“그럼.”
칼은 예의를 갖춘 뒤, 그대로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페트로 학장이 있는 방에서 나온 릴리가 칼을 정면에서 마주 보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상쾌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칼은 언젠가 훌륭한 기사님이 될 거야.”
“뭔 소리야?”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칼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릴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자와 아이가 당하는 걸 볼 수 없는 거잖아.”
“…….”
속마음이 간파당한 것에 칼은 분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릴리를 스쳐 지나갔다.
* * *
환몽의 숲.
그곳에서 상품으로 놓인 진짜 블루트를 두고 데제스와 마르첼의 공방이 살벌하게 펼쳐졌다.
두 사람 다 아직까지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는지, 표정에는 여유가 묻어나왔지만.
마르첼이 데리고 다니는 여우 수인은 데제스의 반격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파르르르.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데다 재생력도 높은 수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정신은 데제스에 대한 공포를 떨치지 못하여 몸을 떨고 있었다.
쇄액!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념이 있는 건지, 그녀는 재차 데제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서걱!
“?!”
완벽한 무위를 자랑하던 데제스의 어깻죽지가 베이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예상외의 공격에 당황한 데제스는 눈을 부릅뜨며 지금의 상황을 분석했다.
잔상을 그리고 있는 초승달 형태의 단검.
그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마르첼의 신형도 여러 개로 나뉘어 보였다.
‘환각 능력을 이용한 암살 수법을 활용하는군. 여우는 내 인지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서고.’
파앗!
상황을 완전히 분석한 데제스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살포시 웃었다.
“제법인데.”
말없이 묵묵하게 데제스를 공격하던 마르첼은 진중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이쪽은 꽤나 진심이라서 말이지. 다음에 일격을 허용하면 죽을 수도 있어.”
데제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아, 이 상처. 확실히 힘줄이 잘릴 뻔한 위기였지.”
그러면서 상처 입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스슥.
뿜어져 나온 신성력에 의해 단숨에 상처가 아물었다.
“?!”
그 능력에 마르첼은 크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고,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블루트가 가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주도록 하지.”
“무슨 소리지?”
불쾌감을 느낀 마르첼은 눈살을 찌푸렸고 데제스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마르첼. 네가 원하는 걸 나는 줄 수 있어.”
“건방지군.”
“그게 나, 데제스 싱클레어다.”
데제스의 말에 마르첼의 눈 밑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아까까지는 적의 정도밖에 발산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전신에 빼곡히 살기가 돋아난 것 같았다.
“네놈은 제멋대로 혀를 놀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 될 거다.”
휘리릭.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르첼은 단검을 회전시키며 투기를 다졌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둘이 충돌하기 직전, 지면에 기이한 현상이 펼쳐졌다.
지면 위로 붉은 마력의 서킷이 난잡하게 펼쳐지더니 이내 환몽의 숲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건?”
마르첼이 그 현상에 의문을 품는 순간.
콰아아아앙!
붉은 마력의 서킷이 빛을 발하더니 폭발했다.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앙!
서킷에 닿은 페트로의 결계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송두리째 찢겨져 나갔다.
파장 역시 만만치 않아 지면 곳곳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구어 졌다.
“마나 브레이크?!”
마르첼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고.
데제스는 진원지가 어딘지 간파한 건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그곳에서는 칼이 비어벨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
칼은 아직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소년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에클라 세트라……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