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이실리아의 연회는 언제나 화려하고 우아하며 장엄했다.
현 라흐만 대륙에서 가장 큰 강국인 성국 산크투아리움은 종교적 특성 때문에 성대한 파티를 여는 것을 금지한다.
그 외에 루콘, 아벤트로트, 샤텐 등은 애초에 이실리아만큼의 세련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 외교 관료들에게 있어서는 눈과 귀, 그리고 입이 즐거운 행사였다.
칼은 와인잔을 흔들며 무심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연회장에서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릴리가 여러 관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제아무리 평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이라는 위치는 특별한 계급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귀족들은 살갑게 웃으며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여전히 바쁘군.’
피식.
열심히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스윽!
그때 칼의 뒤로 누군가 스윽 다가와 덮쳤다.
“누구게~.”
따뜻한 손길이 눈을 가리며 귀에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칼은 슬쩍 그녀의 손길을 치우며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에리가 섭섭한 듯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칼 차가워졌어. 원래 차가웠지만.”
“뭔 소리야.”
대뜸 와서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다…… 이내 뭔가 의문을 느꼈는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런 중요한 행사인데,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거야?”
“후후, 나중에 은근슬쩍 바꿔치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리는 얄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누가 말리겠어.”
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은 또 어떤 깽판을 칠 거야?”
“왜 깽판 치는 게 전제로 깔린 건데.”
“그야. 칼이니까.”
그녀의 말에 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공식 행사에서 단 한 번도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별 계획 없어. 오히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 이실리아 쪽 아니야?”
칼의 질문에 에리는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릴리한테 뭔가 이야기 들었나 보네.”
“대략.”
에리는 테이블에 있는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손에 꼽힐 만큼 화려한 연회가 준비됐으니, 그에 걸맞은 유흥거리도 있어야 되지 않겠어? 참고로 그 발상은 내가 했어.”
“악랄하겠구먼.”
“그럴지도 모르지.”
에리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 이실리아의 병사들이 4미터 크기의 대형 거울 7개를 연회장 곳곳에 배치했다.
웅성웅성.
낯선 광경에 각국의 관료와 귀족들은 흥미로운 눈초리로 거울을 보았다.
우웅.
이내 거울에서 빛이 발하며 그들의 흥미를 한층 더 돋웠다.
“오오!”
“마도 유산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베루스 스페쿨룸이군.”
평소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반투명한 상태로 있지만, 계약문에 피를 떨어뜨리면 언제든 피의 주인을 엿볼 수 있는 마도 유산, 베루스 스페쿨룸.
하지만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울에 미리 막대한 마력을 충전해 두어야 했기에…… 마력 대비 효율성에 대해서는 좀 더 논해봐야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 한해서 베루스 스페쿨룸은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왜냐하면 각 거울에 비친 이들은 그동안 라흐만 대륙의 역사에서 칭송하며 기다렸던 폭주하는 재능의 천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오오! 저게 에클라 세트!”
“외모 역시 빼어나군.”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며 감탄했다.
사락.
현재, 그들은 검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 한가운데 있었다.
베르데는 눈을 감은 채 녹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팔짱을 끼고 있었고.
델피나는 학생복이 아닌, 마도사 차림에 기다란 완드를 들고 슬쩍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에릭 듀라트는 창을 쥐며 숲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으며, 맥캘리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양팔에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귀찮아서 죽으려고 하는구먼.’
대번에 맥캘리의 속마음을 간파한 칼은 피식 웃음보가 터졌다.
곁에 있던 에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맥캘리 교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들리지도 않겠지만 맥캘리는 무어라고 중얼거렸고.
때마침 칼이 입을 열어 그녀의 입 모양에 맞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팔자라고 어린 녀석들하고 노닥거리는 건지. 이럴 거면 논문 쓸 시간을 주던가. 아, 귀찮아. 대충하고 끝낼 거야. 라고 말하고 있네.”
“…….”
기가 막힐 정도로 맥캘리의 입 모양과 칼의 말이 매치가 되는 바람에 에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 남은 두 명은 저기 있네.”
혹여 누구의 귀에 들릴 새랴.
그녀는 남은 거울 쪽에 모습을 비친 이들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거울에는 여우 수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흑발의 남성이 있었다.
“저 녀석은 누구지?”
칼의 질문에 에리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름은 마르첼 발렌티노. 출신 국가는 사텐. 베일에 감춰진 존재여서 특기가 뭔지는 알아낼 수 없었어.”
이실리아는 사실상 노예 제도를 폐지한 유일한 국가.
그런 이실리아를 존중하여 다른 나라의 관료들은 노예를 데려와도 구속구를 채우는 무례한 짓을 벌이지 않았지만.
마르첼은 별 관심이 없는지, 구속구를 착용한 여우 귀 소녀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칼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서 에리에게 물었다.
“저 녀석들은 저기서 뭐 하려는 거야?”
“마도 유산 중 하나인 포식의 반지, 블루트를 걸었어. 지금부터 에클라 세트는 결계 마법의 대가인 페트로 학장님의 결계와 함정을 파훼하고 그걸 쟁취하기 위해 경쟁을 할 거야.”
에리의 설명에 칼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에클라 세트 모두가 만족할 규칙이었다. 이번 경쟁은 그들이 지닌 진가를 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각 나라의 관료와 귀족들 역시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치밀하게 계산을 한 에리를 보며 칼은 한마디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인데.”
“계획 추진은 릴리와 신하들이 다 한 거지. 뭐.”
겸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에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락.
마지막으로 산크투아리움의 하얀 사제복을 입은 데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신비한 모습에 사람들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설마 최강국인 산크투아리움도 에클라 세트 보유하고 있다니…….
“하늘도 각박하시지.”
“신을 섬기는 국가니, 신이 내린 천재가 있을 수밖에…….”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칼은 곧 에리에게 남은 하나의 거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베루스 스페쿨룸은 반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저기에는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칼의 지적에 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마지막 한 명은 아직 찾지 못했어.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거든.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갖다 뒀어.”
“……그래.”
여섯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판단한 건지, 사람들의 이목은 온통 베루스 스페쿨룸에 비치는 에클라 세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같은 시각.
“다들 기운이 넘치는군.”
에클라 세트가 집결한 것을 확인한 페트로는 결계가 무성한 방 안에서 피식 웃었다.
우드득.
시작에 앞서 그는 손과 목 등의 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백색의 마도사라고 불리는 페트로지만.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부터 칭송받던 이들이다 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릴리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결계 마법에 있어서 최고로 손꼽히는 백색의 마도사.
제아무리 하늘이 점지한 천재라고 해도 아직까지는 페트로가 최강이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릴리는 약간 우려하는 표정으로 페트로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건가요?”
“적이 아니니 전력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은 사양이네.”
순간 페트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펜타그램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에클라 세트들이 위치한 곳은 연회가 펼쳐지는 파르테스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싼 검은 나무와 음습한 환경은 페트로 스타니슬라프의 결계 마법 중 하나인 환몽의 숲(forest of empty dream)이었다.
현실과 다른 이계의 공간을 빌려와 만든 결계로 이 공간 안에 갇힌 사람들은 평생 배회하며 죽어간다고 일컬어진다.
그 숲에 발을 내디딘 맥캘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감님. 봐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네.”
툴툴거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우웅.
그녀의 눈동자에서 분홍빛의 아우라가 잠시 반짝였다.
맥캘리의 특기인 분석을 시작한 것이다.
‘공간의 정령 루스티나와의 계약으로 공간을 빌려 새로 구축한 결계, 그 외에도 침투 불가의 결계, 거울의 미로, 불과 얼음의 기로, 망각의 요람, 왜곡나선 등이 깔려져 있네.’
눈앞에 보인 이질적인 현상을 모두 해독한 맥캘리는 슬그머니 손목에 있는 팔찌를 들어 보였다.
파직!
분홍빛을 발산하던 팔찌가 단숨에 끊어지며, 트리거가 발동됐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체인 라이트닝을 시전했다.
맥캘리 고유 마력의 특성은 생장.
정확한 원리는 주변에 깔려 있는 마나를 빨아들여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파지지직!
트리거가 발동된 체인 라이트닝은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용과 같은 형상을 이루더니 이내 주변의 결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콰앙!
파직! 파직! 파직!
주변 곳곳에서 몸부림치는 용 모양의 전격은 결계의 중심부를 강타하며 균형을 무너뜨렸다.
부서진 결계를 하나씩 통과하던 맥캘리는 곧 눈앞에 반투명한 장막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금세 구성을 바꿔버렸네. 이래서 실전은 싫다니까. 다른 다섯 명은 다르겠지만.”
맥캘리는 피식 미소를 짓는 순간.
콰아아아앙!
환몽의 숲 곳곳에서 결계를 부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포식의 반지, 블루트.
그것은 부유한 이실리아에서조차 몇 개 없는 마도 유산 중 하나로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 생기로 탈바꿈해주는 유산이었다.
착용하는 것만으로 인간은 마치 뱀파이어가 된 것 마냥, 젊음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잔병치레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여타의 마도 유산이 광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블루트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마도 유산이었다.
한데, 이실리아가 어째서 그것을 상품으로 내놓았을까?
그 이유는 블루트가 소유주의 정신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블루트의 주인은 처음에는 노화가 사라진 것에 기뻐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블루트에게 정신력을 빼앗겨 결국 폐인이 돼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늙기도 전에 폐인이 되어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그 위험성 때문에 이실리아에서는 블루트를 보관하기만 할 뿐,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에클라 세트라면?
범인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초인의 정신력을 지닌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되는 것이다.
중립국임을 표방한 만큼, 이런 막강한 상품을 아낌없이 내건다면?
실보다는 득이 좀 더 많게 될 외교가 될 것이다.
환몽의 숲.
어느새 그 중앙에 다다른 데제스는 블루트의 화려한 붉은 광채를 보며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색깔이 별로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래도 흥미가 없잖아 있었는지, 그것에 손을 뻗치려는 순간.
쇄애애액!
콰아앙!
사각지대에서 덮쳐온 기습을 간파하고는 그대로 몸을 젖혔다.
그 옆에 착지한 인영은 여우귀를 가진 수인.
크르르르르.
그녀는 데제스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호오.”
데제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흑요석 같은 광채를 지닌 흑색의 동공은 데제스에게 적의를 표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