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해 질 녘.
마을이 주홍빛으로 젖어 들 때쯤, 칼은 바뀐 은신처에서 슈미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재, 슈미트는 칼이 던전에서 주운 쇠사슬을 유심히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명계석으로 비어벨이란 명검을 탄생시킨 그답게 한층 더 심도 있는 가설을 늘어놓았다.
“필시 고대에 만들어진 거다. 이 사슬에 구속되었던 녀석은 명계석을 오염시켜 벗어난 게 틀림없어.”
‘신전에서 느껴진 꺼림칙한 기운의 주인인 건가.’
칼은 던전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직 타라를 지배하는 원흉도 찾지 못했는데, 불길한 무언가 또 있다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슈미트는 고심하고 있는 칼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는 내가 다른 걸로 만들어서 선물하지.”
“명검?”
“인마. 명검을 탄생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슈미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운을 떼지나 말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떤 걸 만들어도 상관없어. 원래 검 같은 것보다 장신구를 더 잘 만들잖아.”
“다 잘 만들거든!!”
슈미트는 칼의 말을 부정하다 곧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에클라 세트가 집결한다며?”
“맞아.”
“근데, 왜 굳이 여태까지 숨겨오다가 온 세상에 드러낸대? 비밀 병기는 숨겨두었다가 중요할 때 써야 되는 거 아닌가?”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그래.”
칼은 몇 가지를 예를 들어 슈미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시 중 첫 번째로 언급된 이는 델피나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마나를 다루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태어난 소서러.
그 천부적인 재능은 어린 시절, 목숨의 위협을 받아 골드무플론이란 신수에게 보호를 받는 기구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델피나는 결국 그 가치를 인정받고 탑에서 받아들여졌지만. 그녀의 비밀을 아는 이들은 극히 적은 소수였다.
그리고 현재.
마탑의 마법사들은 분열 직전에 놓일 정도로 갈등이 극에 이르고 있었다.
갈등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바로 ‘마도 왕국의 개국’
본래는 마도 유산을 연구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연구 기관이 마탑이었지만.
그 신비는 마법사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그 힘은 어느새 탐욕으로 이어졌다.
갈등을 종식시키고 내부의 단결을 꾀할 수 있는 화제는 에클라 세트라는 강력한 화제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델피나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에릭 듀란트와 맥캘리는 이실리아에서 정치적인 계산하고 드러내는 패였다.
철저하게 중립국을 자처하는 만큼, 이 두 명의 존재를 감췄다가 들켰을 때 이실리아는 난감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세상에 이 둘의 존재를 드러내고 활동시키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여왕 예카테리나 2세는 판단한 것 같다.
세기말의 천재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베르데 같은 경우는 구태여 인간사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참석만 해준다면 이실리아는 노예가 된 엘프를 적극적으로 구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각국에서 엘프를 매매하는 노예상에 한해서 사살할 수 있는 특혜를 준다고 보장한 상태니, 동족을 사랑하는 베르데 입장에서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실리아는 아직까지도 킬러비에 의한 피해를 다 회복하지 못한 파라디스에 구조물자를 지원해 주었으니,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명분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복잡하구먼.”
“복잡하다고 했잖아.”
이야기를 듣던 슈미트는 이맛살을 구겼고, 칼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엇보다 월척을 낚기 위해서는 좋은 미끼를 던져야 되는 법이지.”
“미끼라니. 휘황찬란한 금은보화?”
“그런 걸로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야.”
“그럼? 이실리아에서 준비한 좋은 미끼가 뭔데?”
칼은 피식 웃으며 대답을 내뱉었다.
“……마도 유산.”
* * *
파르테스의 학생회실.
이번에 에클라 세트가 집결하는 중요한 안건을 두고 릴리아나 역시 그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이실리아에서 준비한 외교의 장이지만.
하필이면, 그 장소가 파르테스였기에 연회장부터 시작해서 학생들의 통제에 대해서는 학생회장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그 부담감을 쉽사리 이겨내기 어려웠을 테지만.
릴리는 차분하게 서류를 훑어보며 일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회장님 조금 쉬고 하세요.”
그런 그녀를 경외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던 학생회 임원 라이나가 휴식을 권했다.
“고마워.”
릴리는 피식 웃다 곧 라이나에게 푸념 섞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세기말의 천재 모임이라…… 뭔가 불공평한 것 같네. 난 이렇게 노력해도 죽어도 못 따라잡겠지.”
“그렇지 않아요! 전 회장님도 그에 못지않은 인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을 만나면, 방금 했던 말 철회하게 될걸.”
“…….”
내뱉고도 자신의 말에 확신할 수 없는지 라이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분위기는 그다지 씁쓸하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릴리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방금 기분이 안 좋으셨던 거 아닌가요?”
“내가?”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다가 피식 웃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한 건 없잖아 있지만,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것 때문에 위축돼서 내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더 안 되는 일이잖아.”
“웃고 있는 이유는 그럼…….”
릴리는 검지로 자신의 머리칼을 살포시 감으며 말했다.
“기대가 돼서. 그 천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망나니의 행보가.”
발언을 마친 릴리는 다시 쿡쿡 웃음을 터뜨렸고.
“……회장님.”
그녀의 의외의 면모를 본 라이나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 * *
이실리아의 관료들과 회담을 마친 뒤.
릴리는 곧장 도서관에 들러 문헌과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칼이 일전에 말했던 ‘이실리아의 행방불명자’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정보 길드를 활용할 수 있는데도 나한테 부탁한 건, 아무래도 여기에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정답이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
칼이 릴리에게 부탁했던 것은 학생회장이 지니고 있는 특혜였다.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은 나라의 기밀정보인 1급 정보 외에는 모든 정보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도서관에는 그 기록이 수록돼 있으며, 현재 릴리는 그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료 조사를 하는 도중.
릴리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섬 내부에서의 행방불명자는 그렇게 많지 않아.’
이실리아는 치안이 좋다 보니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사람들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현저히 적었다.
‘행방불명자가 많은데도 사람들이 거기에 의문을 품거나 수사하지 않으려는 사건이 있다면?’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때쯤.
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빨리 구석진 곳에 있는 책을 꺼내어 살피기 시작했다.
‘바아라나 상선 격침 사건이랑 로헤리안 유령선 사건.’
사락, 사락, 사락.
릴리가 정신없이 책장과 해도 등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이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니. 자네의 열중하는 모습은 나에게도 본보기가 돼서 참 좋아.”
“?!”
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릴리는 눈을 부릅떴다.
페트로 학장의 목소리였다.
-아무도 믿지 마.
평소에는 학생들을 진지하게 응원하고 밀어주는 스승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칼의 말을 듣고 나서는 어째서인지 전신에 소름이 쭈뼛쭈뼛 돋는 것만 같았다.
“과찬이에요.”
릴리는 등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페트로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걸 보고 있었나?”
“천재들이 집결하는 날이니,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서요.”
‘너무 궁색했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눈치를 살피자, 페트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아이들이라면 태풍이 와도 이상하지 않지.”
“그, 그렇죠.”
긴장하고 있을 때, 페트로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릴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도 이번 모임에 참석해보는 건 어떻겠나?”
“네?”
“참석하는 인원 중에는 분명 이 파르테스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지.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나? 아! 어차피 곧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해서 누군지 알 수 있으려나.”
모처럼이라 릴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싶은 마음에 페트로는 골똘히 고심했다.
‘진짜인지 연기인지 모르겠어.’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한없이 학구열이 넘쳐 끼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능청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릴리는 페트로의 눈치를 살피다 질문을 던졌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가?”
“파르테스에서는 학생들의 학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집안과 정체를 숨기게 하는데, 에클라 세트임이 밝혀진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데제스와 베르데, 그리고 델피나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모를 리 없던 페트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스스로 정하면 될 문제일세.”
“네?”
“어차피 가릴 수 있는 재능도 아니고 누군가 습격을 가한다면, 오히려 기습한 쪽이 된통 당할 정도로 강한 아이들이네. 그렇다고 학업에 악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지. 오히려 에클라 세트임이 밝혀진다면, 주눅이 들었던 학생들도 다시 자신의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너무나 특별하기에 기준을 둘 수 없다.
규격 외의 천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대체 어느 정도의 재능이기에…….’
페트로의 말에 릴리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임에 참석하겠습니다.”
* * *
별들의 만남.
그 호화로운 모임에 초대를 받은 칼은 정갈한 정장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의류점을 나온 칼을 보며 레인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체격이 커지니까, 요즘 들어 옷맵시가 잘 맞는 것 같아요.”
“커지긴 했지.”
그녀의 칭찬에 아랑곳하지 않고, 칼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전에는 야위어서 바람에 흔들릴 정도의 약골인 몸이었지만, 약 일 년 반의 수련을 거쳐 근골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신장 또한 그때보다 칠 센티 이상 커진 상태였다.
갸르르릉.
칼을 보고 반가웠는지, 바그로바가 칼의 다리로 얼굴을 문댔지만.
“털 묻어. 떨어져.”
칼은 어김없이 다리로 슬쩍 바그로바를 밀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레인은 그런 칼과 바그로바를 보면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마차로 가볼까요?”
“그러지.”
레인의 제안에 칼이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철그렁, 철그렁.
칼의 눈앞으로 목과 양쪽 손에 사슬로 구속된 노예 한 명이 걸어갔다.
우아한 금발에 귀가 여우의 것과 같은 소녀.
‘수인?’
아인종 중에서도 특히 보기 힘든 종족이었기에,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소녀의 앞으로는 칼과 비슷한 신장을 지닌 짙은 흑색의 머리칼과 흑색 눈을 가진 소년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너무나 차갑고 눈빛에는 혹한이 서린 것 같았다.
스윽.
일순간 칼과 소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마치 서로를 견제하는 것 같은 짧은 시선의 대치.
홱!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타악.
그때 여우 귀 소녀의 주머니에서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자, 잠시만요.”
깜짝 놀란 레인은 그것을 주운 뒤, 여우 귀 소녀를 불러 세웠다.
“…….”
소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레인을 쳐다봤고.
“이, 이거 떨어뜨렸어요.”
레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목걸이를 지켜보던 소녀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다가…….
“고마워.”
레인의 뺨을 혀로 할짝 핥았다.
“꺄악!”
예상치 못한 행동에 크게 놀란 레인은 얼굴을 홱 붉히며 뒷걸음질 쳤고.
“걸어.”
인사를 나누는 짧은 시간도 허용할 생각이 없는지, 흑발의 소년은 구속구를 끌어당겼다.
“또 봐.”
그 우악스런 힘에 끌려가면서도 소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레인을 향해 손을 살살 흔들었다.
“…….”
레인은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칼은 마차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출발한다. 레인.”
“네, 네!”
칼의 부름에 레인은 황급히 움직였고, 바그로바 역시 그 뒤를 졸래졸래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