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침수된 건물들 사이로 쿠라빌이 거칠게 질주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바로 뒤에서는 넝쿨 줄기들이 건물을 부수며 그 뒤를 바싹 쫓고 있었다.
서걱!
칼은 사각을 이용해 습격해 오는 넝쿨 줄기를 베며 생각했다.
‘……지성이 있는 놈이군.’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없애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 여기서 싸우면 장기전으로 가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칼은 ‘타라’를 제거하는 것보다 베리오를 구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리오를 납치한 폰이 상공에 있기 때문에 서킷을 통한 탐색이 사실상 힘들었다.
허공으로 서킷을 펼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범위가 너무나 광대했다.
마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걸 유지할 체력이 부족했고, 또 몸도 한계가 와 분쇄될 우려가 있었다.
바로 그때, 내달리는 칼을 노리고 타라가 건물 잔해를 뚫으며 나타나 급습했다.
쿠쾅!
갑작스러운 공격에 쿠라빌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지만, 칼은 그 전에 뛰어내려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쏴아아아아.
타라의 난동으로 허공에 솟구친 물이 뒤늦게 소나기가 되어 칼의 몸을 흠뻑 적셨다.
“아아.”
짜증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칼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심홍색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쿠직! 쿠직!
지금 이 순간에도 건물 잔해더미를 뚫고 튀어나온 타라가 흉흉한 붉은 눈동자로 칼을 직시하고 있었다.
줄기의 수는 얼핏 봐도 60여 개는 되어 보였다.
“이런 잔챙이 따위한테 몰리다니. 기가 막히는군.”
그를 아는 마족들이 보았더라면, 사상 최강의 마왕이 겨우 기생수목한테 발목을 잡힌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서 탄식할 것이다.
콰앙!
그런 심정에 별 관심이 없는지, 다수의 줄기가 세차게 칼에게 달려들었다.
덥석!
칼은 그중 하나를 붙들어 마력을 흘려보냈다.
스윽, 스윽, 스윽.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타라 전체의 몸에 서킷을 그렸고.
단지 그것만으로 칼을 습격하려던 넝쿨 줄기가 경직됐다.
당황한 타라의 눈동자는 다시 한번 혼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칼은 피식 웃으며 타라에게 말했다.
“깜짝 놀란 것 같은데?”
칼이 소속된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연구 목적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고유특성을 일깨우는 것.
칼의 마력은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그는 ‘트리거’를 활용해 평소에 축적해 둔 마력을 한꺼번에 발산 및 각성시켜서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켰다.
이번에 맥캘리에게 전수 받은 ‘서킷’은 칼에 의해 점차 다듬어지며 다양한 효과를 얻었다.
가령, 지금같이 손으로 직접 갖다 대 정착시킨 서킷은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켜 장애를 발생시킨다.
아티팩트 같은 경우는 안에 내장된 마법진을 망가뜨리지는 못해도 본래의 효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고, 사람 같은 경우는 마법이나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물론 항마력이 강한 사람은 서킷이 달라붙기 전에 벗어나면 그만이지만.
한번 서킷이 정착되면, 그것은 평생 따라다니는 낙인이 된다.
특히 그것은 타라에게 있어서 천적과도 같았는데.
서킷이 달라붙은 상태에서는 사기나 지력과 같은 다른 힘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뻣뻣하게 경직된 타라를 지켜보던 칼은 시야가 점차 희뿌예졌다.
살수들과 격전 중에 당한 미세한 독의 잔재가 체력을 뺏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거칠게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남은 체력마저 고갈되어갔다.
‘인간의 몸은 하염없이 귀찮군.’
그러나 칼은 지친 내색 없이 트리거를 발동했다.
스스스스.
착용한 팔찌는 점차 붉게 피어올랐다.
정착된 서킷에는 마법을 전송시킬 수는 없지만, 트리거는 예외였다.
오히려 칼이 만든 마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마나 브레이크를 증폭시키는 효과마저 불러왔다.
콰아아앙!
이윽고 팔찌가 부서지며 트리거가 발동했고.
콰드드드드득!
붉은 파동은 서킷을 타며 타라의 외피를 모조리 박살 냈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직감한 건지, 타라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화아아아악!
그리고 이내 완전히 파괴돼 사라졌다.
“언제까지 엎어져 있을 거냐?”
타라를 파괴하는데 성공한 칼은 몸을 일으키고 있는 쿠라빌에게 눈총을 줬다.
칼의 말에 쿠라빌은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처럼 발굽으로 지면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찍었다.
쿠라빌은 오히려 칼을 보며 말했다.
[지쳐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누굴 걱정하는 거냐?”
칼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쿠라빌의 등에 올라탔고.
두그닥!
쿠라빌은 거침없이 도심을 가로지르며 베리오를 찾아 나섰다.
* * *
칼이 타라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사아아악!
데제스에게 도주로가 막힌 폰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전후좌우 빈틈없이 채운 하얀 손은 언제든지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뱀파이어인 내가 어째서 인간에게 이렇게 겁을 먹어야 하는 거야.’
상상을 초월한 데제스의 힘에 그는 궁지에 몰린 쥐가 된 것만 같았다.
“칫!”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쇄애애애액!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하얀 손들 사이를 베리오를 끌어안고서 뚫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리폰 자우버가 폰의 얼굴을 발톱으로 으깰 듯이 쥔 뒤 그대로 하강하여 건물에 내리찍었다.
우드득!
“크아아아아아악!”
베리오는 중상은 면했지만, 오른팔이 부러졌다.
자우버에서 내린 데제스는 그대로 베리오를 향해 걸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폰은 빠득빠득 이빨을 갈았다.
진성 뱀파이어인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저런 하찮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당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프시시마스(궁극의 자)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죽일 수 없고요. 검은 교황? 같잖은 소릴 잘도 늘어놓는군요.”
“흐음.”
서툰 도발이었지만, 데제스의 관심을 사는 데는 성공했다.
데제스는 싱긋 웃으며 폰에게 말했다.
“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기껏해야 뱀파이어일 뿐이잖아. 그리고 너희들의 우두머리 말인데.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생각해?”
“그, 그게 무슨?!”
한없이 같잖다는 말투, 하지만 거기에는 허세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너를 위한 복수를 하지 않아. 세상에 증오를 품은 고독한 늑대 같은 존재거든.”
“하지만 당신은 걸림돌이 될 테니, 반드시 당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대화는 여기까지 끝내도록 하지. 자우버.”
콰직!
데제스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자, 자우버는 그 즉시 발톱으로 폰의 머리를 박살 냈다.
“우욱!”
머리가 터지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속이 메스꺼웠는지, 베리오는 양손으로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우버에게서 벗어난 폰의 몸통이 단숨에 데제스의 목덜미를 쥐기 위해 다가갔다.
사아아아악!
동시에 폰은 지니고 있는 생기를 이용해 가까스로 얼굴을 수복했다.
“위대한 메노스 템벨에 영광을…….”
타악.
하지만 폰의 손길이 데제스의 목을 조르기도 전에 데제스의 손바닥이 폰의 가슴에 닿았다.
‘어, 언제?!’
폰은 당황해 눈을 부릅떴고 데제스는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내 눈에는 자기 잘났다고 발버둥 치는 하찮은 집단에 불과할 뿐이야.”
“데제스!!!”
냉철한 평가에 분노한 폰이 괴성을 내지른 순간 변화는 시작됐다.
화륵!
데제스의 손이 닿은 부분이 점차 새하얗게 빛났다.
먼저, 변화가 발생한 곳은 데제스의 손길이 닿은 폰의 가슴이었다.
우우웅!
찍힌 손바닥 자국이 점차 새하얗게 빛나더니, 곧 백색의 불꽃을 일으켜 폰의 마기를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신을 거역하는 족속이 어떻게 이런 신성력을…….”
믿기지 않는 양의 신성력에 폰은 눈을 부릅떴고 데제스는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신성력은 곧 폰의 온몸을 불태웠고, 곧 그의 몸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뱀파이어 특유의 재생력도 신성한 불길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화르르르륵!
한쪽 눈을 제외한 전신이 하얀 불꽃으로 뒤덮인 폰은 원망과 분노가 어린 시선으로 소리쳤다.
“어디까지 날 우롱하는 거냐!!! 네놈 따위한테 내가, 내가 죽을 리 없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 못 했던 폰은 기염을 터뜨리며 데제스를 덮치려고 했다.
“방해되니까 그만 꺼져줄래?”
끼에에에엑!
그때 자우버의 입에서 튀어나온 브레스가 폰을 증발시켜버렸다.
진성 뱀파이어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데제스는 고통조차 잊은 채로 이 상황을 바라보는 베리오에게 다가가……
푸욱!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베리오의 복부를 찔렀다.
“쿨럭! 끄아아아아악!”
토혈을 하며 베리오는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는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이란 게 있지.”
데제스의 차가운 말에 베리오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누군가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없어.”
“……당신의 만행은 제가 아니더라도 곧 누군가 밝혀낼 겁니다.”
“행운을 빌지.”
데제스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검을 뽑은 뒤,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 * *
검의 성지 전역으로 펼쳐진 서킷에 베리오의 마력이 탐지되었다.
두그닥! 두그닥!
콰아아앙!
쿠라빌은 격렬하게 질주해 마력이 탐지된 장소에 도착했다.
뚝, 뚝.
이미 베리오의 주변에는 피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쿠라빌에서 내린 칼은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베리오의 의식을 확인했다.
점차 빛을 잃어가는 눈, 창백해져 가는 피부.
그러나 그는 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유약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나름 의미 있는 삶을 산 것 같습니다.”
“말하지 마.”
자신의 상처를 압박하고 응급조치하는 칼을 보며 베리오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허공에서 보았습니다. 신전 부근에 엄청난 양의 시체가 즐비해 있더군요. 입구에는 시든 꽃이 있었는데, 실패한 타라였습니다. ……누군가 타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 불태우면 돼.”
점점 더 동공의 빛이 흐릿해져 갔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에도 베리오는 쉼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타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그건 그가 준비한 함정이니까요.”
“닥치라고 했지. 일단 살고 그다음에 말해도 돼.”
무리다.
누가 봐도 살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부담스럽고 무겁지만 제 유지를 이어주시겠습니까?”
“그딴 건, 짐도 안 돼.”
여전히 거칠고 투박한 말투지만, 왜일까?
마음이 이렇게까지 안도가 되는 것은…….
‘이 남자라면 그 광기의 사내를 막을 수 있어.’
베리오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대로 눈을 감았고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말했다.
“눈 뜨면 뒈질 줄 알아. 퉷!”
그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
칼은 재빨리 품에 있던 엘릭서를 꺼내어 입으로 마개를 뽑아 뱉은 뒤, 그대로 베리오의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