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황폐화된 검의 성지.
메노스 템벨의 살수들을 처리한 칼은 기생수 ‘타라’를 찾기 위해 베리오와 탐사에 나섰다.
타라가 정말로 자생하고 있는지 확정은 지을 수 없지만.
이미 칼과 베리오는 기정사실로 두고 신중하게 탐색을 이어나갔다.
칼이 구현한 서킷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타라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마법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는지, 베리오는 단숨에 서킷의 원리를 간파했다.
“변조와 복조를 통해 마법과 마력을 전송시키는 방식이네요. 응용법에 따라 이런 광범위한 탐지도 가능하다니…… 대단하군요.”
‘그걸 한 번에 간파한다고?’
칼은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베리오를 쳐다봤다.
처음에 서킷을 봤을 때, 자신은 그 원리를 완전히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맥캘리야.”
칼이 있는 그대로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자 베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두 명 다 대단한 거죠. 맥캘리에 의해 창조되고, 칼리언트 당신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사제 관계군요.”
만약 맥캘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라고 반박을 했을 것이다.
“여기에도 없어.”
탐색을 끝마친 칼은 마력 방출을 멈췄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군요.”
“피를 좀 흘렸으니까.”
칼이 힘겨운 표정으로 눈꺼풀을 반쯤 감자, 베리오는 가방에서 마들렌을 꺼내 칼에게 건네줬다.
“안 먹어.”
“피곤할 때는 단 걸 먹어줘야 합니다.”
베리오의 끈질긴 권유에 칼은 편식하는 아이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입 안에 넣었다.
마냥 달기만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입안에 들어간 마들렌은 살며시 녹아들며 잠시 피로를 잊게 만드는 달콤함을 선사해줬다.
“…….”
그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는지, 칼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베리오는 피식 미소를 짓다 문득 무언가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그나저나 어째서 신전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건가요? 그곳에 타라가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베리오의 말에 칼은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을 곱씹다가 말했다.
“감이야.”
“네? 어떤 느낌입니까?”
“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느낌.”
사실대로 말하면 두렵다기보다는 오히려 접근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장소였다.
하지만 자신의 일은 어디까지나 베리오를 호위하여 그가 목표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기에 최대한 자제했다.
그런 칼의 견제에 베리오는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신전, 신전. 설마?!”
무언가 떠오른 건지, 베리오는 돌멩이로 지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탁, 탁.
지면이 갈리면서 그려진 것은 기하학적인 펜타 그램이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펜타 그램이었기에 칼은 눈매를 지그시 좁혔고, 베리오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신, 프리데아를 섬기는 신전에서 종종 사용하는 문양입니다. 학계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마법진으로 평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만약 이게 검의 성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방위 마법진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찰나의 순간.
칼은 검의 성지와 베리오가 그린 마법진을 비교해보았다.
“배치를 보면 맞아떨어지는군.”
“그, 그게 비교 가능한 겁니까?”
칼의 신박한 공간지각능력에 베리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위진이지?”
“필시 ‘타라’라고 생각됩니다. 구전된 전설도 아마 여기서 비롯된 것일 거고요. 만약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됐던 이 진법의 배치가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파손됐다면, 타라가 다시 자생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저기에 있을 확률이 높겠군.”
칼은 자연스레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펜타 그램의 꼭짓점 중 가장 많이 허물어지고 무너진 장소가 서쪽이었기 때문이다.
* * *
타라.
그것은 신화 속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지력을 흡수하는 기생수목이다.
그리고 그 타라가 열매를 맺기까지 지키는 거인이 바로 게어트너.
만약 이게 신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 있던 이야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입니다.”
칼에게 이실리아의 신화를 이야기 해주던 베리오의 표정은 무척 흥미진진해 보였다.
정확히 인류에 대한 걱정이 반, 그리고 솟구치는 학구열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맥캘리 이상으로 별종이군.’
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재 발을 내딛는 곳은 검의 성지의 서쪽.
멀리서 보였던 대로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유난히 건물들이 무너져 있었다.
꿈틀, 꿈틀.
‘시선이 느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쳐다보고 있다.
베리오는 아직 눈치를 못 챈 듯 보였다. 칼은 기감을 극대화시키며 베리오에게 물었다.
“근데, 타라는 어떻게 생겼지?”
“남아 있는 건 화석밖에 없어서
“저도 타라의 일부로 추정되는 화석 정도밖에 보지 못했지만, 화석의 잔재에서는 눈이 파여 있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흔적이 있었습니다.”
꿈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물어진 건물 틈새 사이로 붉은 눈동자들이 칼과 베리오를 쳐다봤다.
“맞나 보네.”
“네? 커헉!!”
적의 존재를 식별한 칼은 재빨리 베리오의 목덜미를 잡고 위로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앙!
건물들이 파괴되며 붉은 눈동자가 달린 거대한 넝쿨들이 칼과 베리오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서걱!
칼은 자신을 덮쳐오는 집채만 한 넝쿨을 비어벨로 싹둑 잘라낸 다음 잘린 줄기 사이로 착지했다. 그러곤 내달리기 시작했다.
“커, 커헉! 숨이!! 타, 타라?! 진짜 있었어?!”
그 와중에 베리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산만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이 있다고 해서 온 거잖아!”
칼은 버럭 화를 냈다.
꿈틀!
콰아앙!
타라는 사냥감에 대한 열망인지, 칼이 딛고 있는 넝쿨을 크게 내리쳤다.
주르르륵!
그 바람에 균형이 무너진 칼은 발이 미끄러지며 베리오를 놓쳤다.
“크아아악!”
화아아아악!
타라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베리오를 향해 넝쿨을 뻗었다.
“칫!”
칼은 혀를 차며 전방위로 서킷을 펼친 뒤, 품에 있던 파이어 월 스크롤을 발동했다.
화르르르륵!
엄청난 화력에 날아들던 넝쿨이 바싹 타들었지만.
서킷을 통한 적절한 힘 분배로 베리오에게는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한 인영이 베리오를 낚아챘다.
“뭣?!”
깜짝 놀란 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 이 남자만 데리고 가면 되니, 신경 쓰지 마시길.”
반면, 베리오를 낚아챈 폰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쇄애애애액!
동시에 폰은 등에서 박쥐의 그것과 유사한 피막의 날개를 꺼내더니 곧장 어디론가 날아갔다.
빠득!
“버러지가!”
머릿속에 깊은 분노가 차오른 칼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충신을 불러냈다.
“쿠라빌!!!”
화르르륵!
히이이잉!
푸른 불꽃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쿠라빌은 떨어진 칼을 무사히 자신의 등에 안착시켰다.
그와 동시에 타라의 넝쿨 줄기가 칼을 습격했다.
칼은 붉은 오러를 휘둘러 그것들을 모조리 날려버린 뒤 자신을 에워싼 넝쿨 줄기들을 쳐다봤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듯이 흉흉한 붉은 동공들이 자신을 훑자…….
“꺼져라.”
칼은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읊조렸다.
오싹!
넝쿨 줄기에 붙어있는 눈동자의 동공이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듯 정신없이 떨고 있었다.
* * *
“무사히 계획 성공이군요.”
기분이 한껏 좋아진 폰은 검의 성지를 날아가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은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데제스, 그의 계획을 강탈해 우리의 업을 이룰 생각이니까요. 당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답니다. 베리오.”
그는 먼저 계획 성공을 위해 납치한 베리오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차분하게 말했으나.
“……뭔가를 하나 놓쳤어.”
베리오는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조차 망각한 채, 허공에서 검의 성지를 내려다보며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
이내 그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폰에게 소리쳤다.
“빨리 내려줘! 이대로 두었다가는 이실리아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위험해.”
“데제스의 정복 계획을 간파했나 보군요. 그래요, 당신은 그 정보를 우리에게 건네주고, 우리는 그 정보를 이용하면 됩니다.”
베리오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해 폰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하다가…….
“데제스인지 뭔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건 세계 자체를 지워버리는 계획이라고! 정복 따위가 아니야!!!”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매를 지그시 좁히며 지금까지의 과정을 곱씹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하강하더니.
검의 성지에 있는 건물을 가로지르며 폰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빨라?!’
진성 뱀파이어인 자신을 월등히 뛰어넘은 그 속도에 폰은 동공을 파르르 떨었다.
팔락!
폰의 앞을 가로막아선 것은 새하얀 깃털을 지닌 우아한 그리폰이었다.
그 그리폰에 올라탄 남자는 은백발의 푸른 동공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그 남자의 정체를 폰이 몰라볼 리는 없었다.
“……데제스푸아르.”
데제스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 행동은 마치 낮잠을 즐기다 깬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여유가 넘쳤다.
“내 계획을 가로챌 생각을 하다니. 지금까지 만난 메노스 템벨 잔당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고 어리석군.”
울컥!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습니다만.”
자신들을 ‘잔당’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폰은 강렬히 불만을 제기했지만.
데제스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폰이 아니라 베리오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거의 다 눈치챈 것 같은데. 제법이야. 칼리언트도 내 계획을 완전히 간파하지 못 했는데 말이야.”
꿀꺽!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베리오는 고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그만두세요.”
“뭘 그만두라는 거지?”
“당신에게 사람을 심판할 권리 따위는 없습니다.”
그의 말에 데제스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푸훗’하고 웃음을 내보이다가……
“하하하하하.”
결국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폰과 베리오는 몸을 덜덜 떨었다.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과, 과소평가하다니 대체 무엇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한참이나 내뱉던 데제스는 검지로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닦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신을 죽이는 사제이자, 검은 교황이거든. 신이 죽은 땅에서 율법을 세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거야.”
오싹!
그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 태연한 어조가 두 사람에게는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파앗!
강렬한 불길함에 폰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도주하려고 했지만.
스스, 스스, 스스.
이미 전후좌우 어디 할 것 없이 짙고 새하얀 마력으로 만들어진 손이 에워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