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검의 성지.
“하아, 하아.”
푸욱!
그중 한 건물에 숨어든 칼은 오른팔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괘, 괜찮습니까?”
베리오는 재빨리 응급처치하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려고 했지만.
콰직!
칼은 대뜸 비어벨로 상처 부위를 깊숙이 찔러 피를 냈다.
후두둑.
얼굴에 칼의 피가 잔뜩 튄 베리오는 손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미, 미쳤습니까?! 우웁!”
“독 때문에 그래. 미치지 않았어.”
칼은 베리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친 뒤, 재빨리 팔의 혈도를 눌러 지혈에 들어갔다.
쫘악!
그와 동시에 오른쪽 소맷자락을 찢어 상처 부위를 압박했다.
“해독제 있나?”
“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 독에 맞는 해독제일지는…….”
“중화시키는 거면 돼. 아무거나 상관없어.”
칼의 요구에 그는 가방에서 해독제를 꺼내어 건네주었고.
칼은 그것을 입에 털어놓고선 천천히 호흡을 다졌다.
놀랍도록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칼의 모습에 베리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학생 맞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임기응변을…….’
제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은 천재라고 해도 검과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이런 평정심을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자책감을 느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혼절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제정신을 찾기 어려운 게 당연한데, 칼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맥캘리가 왜 이 남자를 나한테 붙였는지 알겠군.’
처음에는 칼을 자신의 일에 휘말리게 만든 것 같아 맥캘리에게 화가 났지만.
그녀가 소개해준 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지금은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 시작이지.”
칼은 냉혹한 눈으로 베리오를 훑어본 뒤.
다시금 비어벨을 손에 들어 올리며 차분히 마음을 다졌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은 도주였지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는 칼이 들어온 입구가 아니라 다른 곳을 통해 들어왔다.
이 점을 미루어보아 저들은 베리오가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 대기한 것이고, 지금은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각 출구를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도망치기만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칼은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몸이 다시 불편하긴 했으나 전투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박멸한다. 그리고 이 남자의 조사를 돕는다.’
결심을 마친 칼은 베리오를 쏘아보며 말했다.
“타라가 뿌리를 내린 곳이 어디라고 추측하고 있지?”
“문헌에 따르면 타라는 사기든 양기든 게걸스럽게 갈취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햇볕이 있는 곳보다 수분이 많은 곳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일 확률이 높겠군.”
‘가급적 파괴를 목표로 한다.’
정말로 생장하고 있을지 장담 못 하는 상황이지만.
이대로 더 방치했다가는 지력을 흡수해 이실리아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 게 너무 뻔했다.
“녀석들을 처리한 후에 타라를 찾는다.”
“가, 가능하시겠습니까?”
“고양이 밥 챙겨 먹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할 게 있는데. 저쪽은 가지 마라.”
“저쪽이라니요?”
갑작스런 엉뚱한 말에 베리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문 너머에 칼이 가리킨 장소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바닷물이 얕게 잠긴 신전으로 여신 프리데아를 섬기던 장소였다.
[크르르르르.]
그곳에서 왠지 모를 기분 나쁜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오싹!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던 베리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뭐, 뭡니까? 저기는…….”
“기분 나쁜 게 있어. 느낌상 타라는 아니지만, 널 지키면서 저기까지 도달할 자신도 없고.”
칼의 짤막한 대답에 베리오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의, 의외로 한계를 인정하시는군요.”
빠직!
“너 때문이잖아.”
“아야야야야, 아픕니다.”
칼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베리오의 볼을 꼬집었다.
베리오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가까스로 칼에게서 떨어졌다.
“방해가 돼서 죄송합니다. 저만 아니었으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는데.”
“그딴 걸로 사과하지 마. 처맞기 전에.”
“…….”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칼의 거친 말투에 베리오는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호위로 온 사람이 호위 대상을 구타하겠다니…….
어떤 점에서는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칼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스스로 한 선택이야. 다친 것에 대해서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어. 만약 당신이 나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당신이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야.”
꿀꺽!
칼의 말을 들은 베리오는 고인 침을 삼켰다.
‘……압도적인 프라이드다.’
보통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다.
책임질 것은 확실하게 책임진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어떻게든 지킨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기사도군요.”
그의 평에 칼은 비어벨의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한마디를 남겼다.
“기사가 될 사람이니까.”
칼의 대답에 베리오는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어딘가에서 자라난 타라의 위치를 알아내 섬의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명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실패하면 죽인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속마음을 간파당한 베리오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조사를 속행하기로 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응급처치를 끝낸 칼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마나 연공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전신에서 피어오른 심홍색의 마나는 곧 지면 위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 * *
한 번 정한 표적은 그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쫓는다.
그것은 메노스 템벨의 살수 집단에서 절대적인 룰로 내려오는 말이었다.
주요 암살 대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질적인 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제로부터 시작하는 평등.
비밀결사인 만큼 그 꿈은 크고 원대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언가 목적이 변질된 느낌이었다.
어렵게 고민할 것도 없이, 지금의 대의명분이랑 베리오는 과연 연관이 있는 걸까?
잠시 깊게 생각한 락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결국 그들 역시 마기아스인 폰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입지가 쌓이면, 반드시 계급도 올라가게 된다.
‘우리가 지배층이 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런 구질구질하고 추악한 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콰앙! 콰앙!
칼이 진입한 건물에 침입한 열댓 명의 살수들은 각자 흩어져서 칼과 베리오를 수색했다.
그런 가운데.
스스스스슥!
느닷없이 지면과 허공에서 낙서를 그리듯 붉은 마나가 정신없이 뻗쳐 나왔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락이 재빨리 발을 박차 도약했다.
파직!
콰아아앙!
“크아아아아악!”
서킷을 통해 흘러들어온 막강한 전류가 살수들의 전신을 덮쳤다.
서킷 위에 발이 닿아있는 살수들은 예외 없이 전류에 감전돼 고꾸라졌는데, 그 수가 무려 절반 이상이었다.
쇄액!
“뭐야? 이 공격은!”
락은 서킷 사이의 빈틈을 찾아내 아슬아슬하게 발을 내디뎠다.
반면, 난잡한 그 선을 피하지 못하고 서킷에 발이 닿은 살수 중 한 명은…….
콰앙!
불시에 날아온 돌멩이에 복부가 꿰뚫었다.
동료의 시신을 본 락은 냉정하게 서킷에 대해 분석할 수 있었다.
‘녀석과 우리의 거리는 절대로 시야로 볼 수 없는 거리야. 이 수상한 붉은 선은 우리를 탐지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는 거군.’
또 한 명이 서킷에 발이 닿았고.
우드득!
다시금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그의 팔에 적중했다.
“크아아아아악!!!”
뼈가 부서진 살수는 격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내질렀고 그제야 락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이 수상한 선에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녀석에게 포착당한다!!!”
락의 명령에 살수들은 움찔거리며 명을 따랐지만, 움직임도 급격히 둔화됐다.
콰직!
그리고 마치 그 모습을 조롱하듯 바로 앞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또 한 명의 살수가 목숨을 잃었다.
저벅저벅.
어느새 서킷 사이로 칼이 베리오와 함께 느긋이 걸어왔다.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이제 슬슬 몸이 풀리는데, 너희는 오히려 굳어 있네.”
울컥!
그 여유로운 모습에 살수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섣불리 발을 내디뎌 칼에게 접근할 수는 없었기에, 일제히 들고 있는 단검을 투척했다.
카앙! 카앙!
이미 그 궤도를 간파한 칼은 어렵지 않게 비어벨을 휘저어 모조리 튕겨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칼이 아슬아슬하게 검 끝으로 튕겨낸 비수를 손으로 잡은 뒤. 곧바로 투척해 살수들의 미간을 꿰뚫어 버렸다는 것이다.
두근, 두근.
믿기지 않는 광경에 락의 심장 박동이 점차 커졌다.
‘뭐야? 이 남자. 싸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냐? 방금 전까지 사냥감이었던 게 이제는 대놓고 우리를 조롱하고 있어.’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것은 부질없는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 도망…….”
어쩔 수 없이 발을 내빼려고 하는 락을 주변에 깔려있던 서킷이 일제히 휘감았다.
“우, 움직일 수도 있는 거였어?!”
몸 곳곳에 서킷이 각인된 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노려보았다.
칼은 찢어진 소매로 감싼 상처를 보여주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거 꽤 아팠어.”
하지만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락은 본래의 목적조차 망각하고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죽기 전의 발악이냐?”
칼은 입꼬리를 비틀며 그대로 검에 오러를 실어 휘둘렀다.
서킷을 탄 오러의 참격.
“아, 안 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락은 통곡하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서걱!
콰아아앙!
이내 오러의 참파에 묻혀 사지가 처절하게 토막이 났다.
후두두둑!
쏴아아아아아아!
조각난 시체 위로는 그의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 * *
검의 성지.
폰은 칼이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메노스 템벨의 살수들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걸 보고는 이마를 감싸며 적잖게 당황했다.
‘말 그대로 광견인 건가.’
물론 칼이 살수들하고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베리오라는 짐짝을 데리고 저렇게 완벽하게 이기다니, 기가 막혀서 말문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칼을 관찰하던 도중 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많이 지친 것 같군.”
최대한 티를 내고 있지 않지만, 칼의 숨은 이미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이쯤 되니 폰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남자의 기감이라면 진작 나를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승산이 있다는 말이 되겠군.’
폰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칼과 베리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칼 일행과 메노스 템벨 외에도 한 생명체가 들이닥쳤다.
위치한 곳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낭떠러지 절벽 위.
그것은 검처럼 벼려진 호박색 동공으로 검의 성지를 관찰하다…….
팔락!
이내 새하얀 깃털을 떨어뜨리며 날갯짓하여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