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08화 (108/197)

#제108화

식사를 끝마친 후.

베리오와의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됐다.

쏴아아아아!

탐사가 시작된 장소는 이실리아의 해변에 자리 잡은 암초를 한참 지난 모습을 드러내는 해안동굴이었다.

라이트 마법을 잔뜩 띄워놓은 그는 암초 부근에 자리 잡은 이끼를 매만지며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칼리언트, 이곳 이끼의 색이 보입니까?”

베리오는 동굴 부근에 낀 이끼를 보여주며 말했다.

“색깔이 다르군.”

흐릿하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짙고 어두운 색과 약간 연한 색이 확실히 구분돼 있었다.

베리오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이건 분명 인위적으로 사람의 흔적이 닿은 곳이죠. 아마 천 년 전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

칼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처음에는 그저 얼빠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어떤 계기로 역사를 탐색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마도 유산에 대해서 말이죠.

그것이 왜 궁금하냐는 질문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류가 다시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악용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유적지를 발견하게 되면, 페트로 학장님을 소환해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결계를 구축하고 다니고 있죠. 다만,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역할입니다.

베리오의 목소리에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념을 느낀 칼은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왜 페트로가 지키고 있는 이 이실리아로 온 거지?’

결계에 있어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백색의 마도사가 이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리오는 파르테스에 도움을 요청하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이곳을 탐색하려 하고 있었다.

칼의 생각을 눈치챈 베리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 믿어주십시오.”

“그런 거는 걱정 안 해도 돼.”

칼은 별 필요 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답했다.

잠시 후.

해안동굴에 들어선 베리오는 꽤나 으슥한 곳까지 진입하더니, 어렵지 않게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을 찾아냈다.

“던전?”

“예상했던 대로 이곳 또한 마도 유산이라는 거겠죠.”

베리오는 던전과 연결된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단단한 철문으로 입구가 봉쇄돼 있었는데.

익숙하다는 듯 베리오는 그 옆에 있는 석판을 어루만졌다.

스릉.

석판에 새겨진 글귀는 마치 누군가 써 내려가는 것처럼 제멋대로 글귀가 바뀌고 있었다.

“이건 못 읽어.”

“어라? 저는 당신이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칼은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쏘아봤다.

이에 베리오는 칼이 목에 걸고 있는 호박색 목걸이를 가리켰다.

“소피코리입니다. 땅속에서 자라나는 나무, 바올프로프 수액으로 굳힌 호박으로만 만들 수 있는 귀한 암호해독 아티팩트입니다. 세계에서는 10개밖에 존재하지 않죠. 지금은 제조법조차 소실돼 희소성으로 따지자면 가히 가격을 책정할 수 없죠.”

“이, 이게?”

그것은 일전에 칼의 아버지인 루드거 슈타크가 건네준 선물로 설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호박색 목걸이를 통해서 룬어를 보시면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베리오의 충고에 칼은 소피코리를 통해 암호문을 살폈다.

스윽, 스윽.

제멋대로 바뀌던 글자가 진실을 보여주었다.

“!##$%”

칼의 입에서 사람의 언어가 아닌 요정의 언어가 튀어나오자…….

카드드드드득.

시동어에 따라 철문이 해금되고 던전이 개방됐다.

키에에에에엑!!!

던전 안쪽에서는 쇠를 긁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사람 소리인지 아니면 날카롭게 대기를 찢어발기는 바람의 소리인지 분간할 방법은 없었다.

원초적인 공포가 느껴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베리오는 의외로 침착한 표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못 빠져나오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내가 대신 가줄 수도 있어.”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베리오까지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니, 칼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이에 베리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가야 할 때가 있답니다.”

빠악!

마치 유언 같은 말에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베리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크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걷기나 해.”

“네, 넵!”

칼의 날카로운 시선에 베리오는 움찔 떨었다.

그러다 이내 쓰린 엉덩이를 붙들며 밑으로 내려갔고, 칼은 유유자적 그의 뒤를 쫓아갔다.

*  *  *

던전에는 몬스터가 바글바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예상과 달리 의외로 적막하고 터무니없이 넓으며 조용했다.

휘이이이잉!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던전 안을 누볐는데.

소리가 들려온 방향 쪽을 쳐다본 베리오는 크게 당황했다.

“놀랍군요.”

베리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다에 절반쯤 침몰된 거대한 도시였다.

던전이기에 당연히 살아있는 것들의 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지?”

칼의 질문에 베리오는 안경을 고쳐 쓰며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한때, 이실리아에서 검의 성지로 불리던 곳일 겁니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이실리아는 지금보다 좀 더 큰 섬나라였거든요. 제 생각에는 아마 도시가 통째로 이곳에 매장된 것 같네요.”

검의 성지.

그곳은 이실리아에서 검과 정의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프리데아를 기리기 위한 신전 도시였다.

지금은 파르테스가 그 역사를 대체하고 있지만.

설마 멸망한 도시를 눈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 정도 규모는 예상 못 했지만, 최근에 이 섬에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에 들렀습니다.”

“예를 들면?”

“풍요의 대지라고 축복받는 이실리아에서 작물의 수확 시기가 한참 늦어진 데다 과일과 채소도 그 크기가 작년보다 반 정도 작아졌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그린데피아의 수확물로 식량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외에도 백사장이 갑자기 늘어난 데다, 사기가 넘치는 땅까지 간간이 발견돼 흑마법사들이 자주 들락날락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몇 가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칼의 낯빛은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베리오는 이마를 매만지며 불편한 진실을 늘어놓았다.

“이실리아의 땅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추측을 짐작한 칼은 심각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기생수, 타라.”

타라.

그것은 과거, 이실리아에 자리 잡고 인간을 잡아먹은 기생수목이었다.

여신 프리데아를 믿는 것도 그녀가 타라와 그 수목을 지키는 거대 거인, 게어트너를 쓰러뜨린 일 때문이었다.

칼이 진실에 근접하자 베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아마 이곳 어디선가 타라가 다시 지력을 흡수해 성장하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찾기 위해…….”

쇄액!

말을 하던 도중 한 자루의 단검이 대기를 쫘악 찢으며 베리오의 뒤통수 쪽으로 날아왔다.

카앙!

칼은 즉각 비어벨을 꺼내 들어 단검을 튕겨냈다.

카카카카카캉!

이어서 사방에서 날아온 단검들 역시 손목을 휘젓는 것만으로 모조리 튕겨냈다.

불시의 기습이었지만 베리오에게는 상처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타앗!

‘한 명이 아니군.’

습격자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던 칼은 재빨리 베리오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발을 박찼다.

“케엑, 케엑! 수, 숨 막힙니다.”

“참아.”

‘참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베리오는 빼액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어둠 곳곳에서 쏜살같이 달려든 인영들이 칼을 에워싸며 따라붙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쇄액!

사각지대에서 파고드는 단검. 그걸 소리로 먼저 감지한 칼은 즉각 베리오를 허리춤에 끼고 비어벨을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호선으로 그어진 비어벨의 궤적에 휘말린 단검들은 불똥들을 튀기며 일제히 튕겨 나갔다.

칼은 허공을 빙그르 도는 단검 중 하나를 입으로 물었다.

파앗!

그와 동시에 어둠과 동화되어 있던 살수 세 명이 순식간에 칼에게 접근했다.

칼은 당황하지 않고 발끝에 힘을 줘 지면을 부스러뜨렸다.

퍼억!

지면이 부서지면서 튕겨 나온 큼지막한 파편이 살수의 얼굴에 적중했고, 그는 피를 흥건히 흘리며 그대로 기절했다.

파앗!

칼은 그 공백을 파고들어 재빨리 그들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

살수들은 재빨리 추격을 시작했다.

기민하면서도 치밀하게 진을 짜며 추격해 오는 그들을 보며 칼은 이를 갈았다.

‘한 명 한 명이 상급 기사 수준의 실력자들이군.’

여기서 맞상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저놈들 외에도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는 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타다다다닷!

궁지에 몰린 칼은 빠르게 살수들의 위치를 감지하고는 포위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우욱!”

이런 칼의 초조한 심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베리오는 구토가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스팟!

칼이 유령 도시 쪽으로 향하자, 살수 중 한 명이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뒤에서는 다른 살수가 베리오를 향해 손길을 내뻗고 있었다.

“퉤엣!”

칼은 재빨리 입에 물고 있던 단검을 뱉어 눈앞에 있는 살수의 이마를 꿰뚫었다.

서걱!

그와 동시에 몸을 돌려 비어벨로 베리오에게 손을 뻗치는 살수의 손목을 절단해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주춤!

순식간에 두 명을 진압해버린 칼의 무력에 살수들은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칼은 그 틈을 노리고 도시를 향해 힘껏 도약했다.

“미, 미쳤나?”

그 광경을 본 살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도시가 아래쪽에 있다고 했지만, 칼이 뛴 곳은 낭떠러지였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다면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렵지 않게 건물의 한 옥상에 깃털처럼 사뿐히 착지하는 데 성공하는 그 모습에 살수들은 일제히 말문을 잃었다.

푸욱!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수들의 우두머리인 락은 칼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칼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락을 매섭게 노려보다 곧 건물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

도주 불가능한 상황에 무려 사람 한 명을 보호하면서 완전히 자신들의 눈을 따돌리다니.

처음 겪어본 상황에 살수들은 말문을 잃었고.

락 역시 복면을 벗고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맹수 사냥이 이렇게 무서운 줄이야.”

칼과 눈이 마주친 그는 오금이 저려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상대는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최강자였다.

그런 그가 도주를 선택한 것은 분명 자신들이 노리고 있는 베리오 때문이었다.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베리오를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겠군.”

하지만 이내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변질됐다.

락이 히죽 잇몸을 드러내며 웃자, 이를 본 부하들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쫓아.”

“네?”

“쫓으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죽이지 못한 녀석은 한 명도 없었잖아. 이건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해.”

락은 음산한 미소로 칼이 모습을 감춘 검의 성지를 내려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