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무시무시하구먼.’
그것은 칼을 본 베리오의 평가였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칼의 존재는 매우 강렬했다.
머리칼과 눈동자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의 색채가 거대한 불길과 같은 심홍색이었다.
주변의 외압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불태워버리는…….
그때 자신의 동료가 쓰러진 것에 엉거주춤 경계하고 있던 뱃사람들이 칼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게 어른들 노는 데 껴들어?”
“셋을 세지.”
칼은 한숨을 쉰 다음 베리오에게서 등을 돌리며 경고를 읊조렸다.
“내가 이 녀석을 휘두르는 순간, 너희들 중에 숨이 붙어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야.”
칼은 은근슬쩍 비어벨을 꺼내 들어 붉은 오러를 방출했다.
“오, 오러.”
뒤늦게 사태 파악에 나선 뱃사람들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이내 칼의 입에서 한마디가 떨어졌다.
“둘.”
“자, 잠깐 하나부터 시작해야지.”
“도, 도망가!!”
“히익!”
칼의 한마디에 기겁한 뱃사람들은 쓰러진 동료를 버려둔 채, 우르르르 사라졌다.
“사, 살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금전을 갈취당하고 있던 베리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렇게 만만해 보여서야 이곳저곳에서 위협을 받겠군.’
칼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맥캘리가 보내서 왔어. 당분간 호위를 맡게 될 칼리언트다.”
맥캘리라는 말에 얼떨떨했던 베리오의 표정은 근엄하게 변했다.
“하여간 시키지도 않은 짓거리는.”
쯧쯧 혀를 차며 뒤뚱 몸을 일으킨 베리오는 칼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 주십시오. 신세 져서 미안하게 됐…….”
나름 터프하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거절하려는 순간.
“커, 커흑! 빨강머리 이 개자식 가, 가만 안 두겠어!”
칼에 의해 쓰러졌던 뱃사람이 가까스로 의식을 찾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콰아앙!
칼은 그의 얼굴 옆을 발로 강하게 내리찍어 지면을 박살 냈다.
쩌저저적!
거미줄처럼 갈라진 바닥을 본 뱃사람은 고인 침을 삼키며 다시 기절했다.
히끅!
마찬가지로 지금의 광경을 지켜본 베리오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그런 베리오에게 칼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네, 넵!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결국 힘 앞에서 쪽도 못 쓰고 베리오는 고개를 전력으로 끄덕이며 수긍하게 되었다.
* * *
해가 중천에 이를 때, 베리오는 밥을 먹기 위해 칼과 함께 한 식당을 찾았다.
그동안 많이 굶었는지 그는 정신없이 빵과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칼은…….
‘맥캘리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라고 생각하며 수프를 입에 넣었다.
만약 맥캘리가 옆에 있었으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어디가 닮았어?! 내가 저렇게 게걸스럽게 처먹냐?!’라고 반박할 게 뻔했지만.
칼은 그 이유를 ‘말 걸기 편하다.’라고 단정 지었다.
잠시 후.
꺼억!
베리오는 거침없이 트림하며 만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딸칵.
하지만 아직 배에 들어갈 것은 많이 남았는지, 디저트로 체리를 얹은 케이크를 주문했다.
“……또 먹어?”
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베리오는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포크를 들어 보였다.
“세상의 낙은 별것 없습니다. 맛과 사랑이 인간의 진취적인 삶 아니겠습니까!”
칼은 손을 휙휙 저으며 알아서 먹으라 말을 했고, 베리오는 체리를 입에 넣으며 몹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 조금 남을 것 같은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베리오의 제안에 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말했다.
“단 거 싫어해.”
“입맛이 까다롭나 보군요.”
“딱히. 배만 부르면 되지.”
“허허허, 안 될 말씀입니다. 맛있게 먹어야지 내일은 뭘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루를 근근이 버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굳이 먹을 게 아니라도 내일은 사랑하는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살 수 있고 혹은 내일 하루는 행복하겠지. 희망을 갖고 살아도 좋고요.”
“…….”
단 거 먹기 싫다고 말했다가 졸지에 인생 강의을 듣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케이크 하나도 만족하면서 먹고 있는 그를 보니, 칼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네.’
마족만큼 잔혹하고 비정한 면모가 있는 반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만족하기도 하니, 솔직한 심정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차라리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데제스를 상대하는 쪽이 편하다는 게 칼의 심정이었다.
칼은 입에 크림을 묻혀가며 케이크를 먹고 있는 그를 보며 드물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째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사람은 꿈을 꿀 수밖에 없으니까요.”
“꿈을 포기하면, 좀 더 편하고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나? 맥캘리처럼 아카데미 교수가 될 수도 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칼의 예시에 베리오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꿈이란 덫에 걸린 사람이 있죠. 그들은 거기에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간질거리는 말이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더 하면 이룰 수 있어. 라고.”
“…….”
무척이나 명쾌한 어조에 칼은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의 말이었다.
거기서 ‘만약 실패하면?’이라는 질문은 차마 던질 수 없었다.
아니, 던지고 싶지 않았다.
뒤숭숭한 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리오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성공하면 명성을 떨칠 것이고, 실패하면 어리석은 자로 남겠죠. 하지만 누군가 유지를 이어받아 성공시킬 수도 있으니, 그 인생이 헛되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꿈이란 덫에 걸린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다.
‘뭐 나도 마찬가지인가.’
그러나 곰곰이 그의 말을 경청하던 칼은 자신도 별다를 게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기사가 되고 싶은 것은 몸의 원래 주인의 유지를 계승하는 꼴이며, 최종적으로 갱생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결국 베리오의 말과 비슷한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진 칼은 차를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얼핏 들었어. 감추고 싶은 게 많을 테지만, 최소한 당신을 쫓고 있는 적과 당신이 탐사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
“어째 ‘생각한다.’가 아니라 ‘불어.’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듭니다만.”
칼은 테이블 위로 수북이 쌓인 접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음식값 다 계산하던지.”
우당탕!
기겁한 베리오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학창시절 성적부터 성격, 짝사랑했던 그녀의 이름, 가족관계까지 숨김없이 털어놓겠습니다.”
과장된 그의 답변에 결국 칼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윽박질렀다.
“필요한 것만 말해!!!”
* * *
이실리아에 위치한 음지의 소굴.
제아무리 치안이 좋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해도 범죄 조직이나 매음굴이 없을 순 없었다.
그러나 최근 ‘새벽의 이슬’이나 깽판 부리기 좋아했던 조쉬의 폭력 조직이 심홍색의 머리칼을 지닌 소년에게 단 하룻밤에 괴멸이 난 터라……
모든 음지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최대한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조쉬를 포함한 그 조직들은 여성이나 아이 등을 희롱하거나 폭행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대한 응징인지 그날 밤 조직원들은 사지가 잘리는 등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부 음지의 사람들은 생업을 접고 양지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전체적으로 음지는 쇠퇴의 형국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반전의 움직임을 꾀하는 이들도 늘 있기 마련이다.
큰 조직이 괴멸했으니, 그 조직의 역할을 대신하자.
어느 정도 기반만 갖추고 있는 조직이라면 누구나 꾀할 생각이다.
데구르르르르.
하지만 그런 목적으로 암약하던 또 하나의 조직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한 조직의 아지트로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는 조직원들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피가 고여 핏물 속에 잠긴 그 모습은 참담하다 못해 무척이나 그로테스크했다.
“좁기는 하지만, 나름 쓸 만하군.”
머리를 발로 차며 저택 안을 유유히 걸어 다니던 남자는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집합!”
남자의 말과 함께 맞은편에 은신하고 있던 기척의 주인들이 그의 앞으로 모였다.
“베리오의 행적은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아 그래?”
남자는 불만인지 찢어진 눈으로 그를 흘깃 노려보았다.
뱁새처럼 찢어진 눈, 은신에 적합한 아티팩트이자 살수 전용 복장인 레트로를 걸친 그는 이 암살자 집단의 우두머리인 락이었다.
메노스 템벨의 일원 중 하나로 계급은 아뎁타스 엑젬타스(괴면달인)로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몇 수 이상 접어 줄 수밖에 없는 신분인 메이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순간 모든 암살자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존재를 눈치챈 암살자들의 생각은 하나였다.
‘언제 나타난 거지?’
천하의 살수 집단을 속인 그는 기다란 망토와 고풍스런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눈은 흉흉한 붉은 빛을 품고 있었고, 입가에는 송곳니가 돋아있어 얼핏 봐도 그의 종족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거만하게 발을 꼬고 있던 락도 즉각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셨습니까?”
“너희보다 일찍 도착했을걸.”
락이 비운 자리에 앉은 남자, 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 너무 느긋하단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별 의미 없이 한 타박에도, 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떨었다.
계급도 계급이지만. 가진 힘의 차이가 여실했기 때문이다.
‘이게 진성 뱀파이어인가.’
얼마 전만 해도 몸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들었거늘.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베리오라면 박쥐들을 통해서 항구에 있는 것을 발견했어. 곧 해가 뜰 시기여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즉각 잡아 오겠습니다.”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락이 즉각 부하들을 대동하려고 했다.
“기다려. 난 아직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어.”
하지만 폰이 내린 명령에 모두가 몸을 움찔 떨더니 그대로 멈춰 섰다.
싱긋 웃던 폰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모두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까 느긋하단 말은 칭찬이었어. 성급하게 움직이면 데제스가 눈치채잖아. 얼마 전에 메이거스가 두 명이나 그에게 당한 건 알고 있지?”
폰의 계급인 메이거스(마법사)는 메노스 템벨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으로, 락이 아무리 공훈을 쌓는다고 해도 메이거스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메이거스에 해당되는 이들은 7서클 마도사나 변종 키메라, 진성 뱀파이어 등 범인이 도달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 괴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죽여 버렸으니…….
데제스푸아르.
그 이름은 이미 메노스 템벨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단어가 돼버렸다.
폰은 여기서 한 명 더 주의해야 할 인물을 손꼽았다.
“물론 데제스뿐만 아니라 칼리언트, 그 광견도 조심해야지. 지금은 그가 베리오를 호위하고 있으니까. 어설프게 움직이면 괴멸이야. 얼마 전에 나도 그한테 죽을 뻔했다고.”
능글맞게 너스레를 떨던 폰은 곧 진지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너희들을 부른 것은 그 누구보다 은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야. 여기서 이 잔챙이들의 비명이 바깥으로 흘러나왔으면 고민했겠지만. 다행이지 뭐야 날 실망시키지 않아서.”
“…….”
그 한마디에 모두가 침음성을 흘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어서 음성이 흘러나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폰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살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럼 시작해 보자고. 광견의 눈을 속이고 베리오를 생포하거나, 아니면 죽이고 그놈의 유산을 빼앗아 와.”
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살수들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폰의 명령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