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06화 (106/197)

#제106화

‘호위라…….’

맥캘리의 얼굴에서는 미안함이 우러나왔다.

이실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는 에클라 세트.

그런 그녀가 부탁한다면, 예카테리나 2세는 소드 마스터조차 보내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좀 곤란했다.

이 호위 임무는 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맥캘리는 이에 마땅한 인물로 칼을 선택한 것이다.

“거절은 안 해. 그래도 이 이야기는 들어 봐야겠어.”

올 게 왔나?

꿀꺽!

맥캘리는 고인 침을 삼키며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조건을 걸 생각인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심각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칼이 입을 열었다.

“사귀는 사이야?”

“아니야! 죽을래?! 이 자식이! 얼핏 봐도 나이 차이가 스무 살도 넘어 보이지 않냐?! 연상은 좋아하지만 너무 연상은 안 된다고!!!”

맥캘리는 빼액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한번 칼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취향까지 별로 듣고 싶지는 않고.”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맥캘리는 어지간히 분했는지 씩씩거리다가 가까스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름은 베리오 워커. 사십 대 중반의 탐험가로 식물학자기도 해. 3년 전에 공동 연구를 추진한 적도 있지.”

“친한 건 맞나보네. 그럼 이 남자를 습격하려는 자들은 누구지?”

호위를 부탁한 것은 분명 베리오란 남자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은 안 해줬어. 뭔가 위험한 걸 연구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맥캘리는 속상한 듯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섬에 있는 거야?”

“연구 목적으로 들어와 있어.”

칼은 의기소침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거절은 안 한다고 했어. 그리고 하나뿐인 스승의 부탁을 외면할 생각도 없고.”

칼의 대답에 맥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

“그…… 돈은 나중에 천천히.”

“돈도 필요 없어.”

딱!

“크흑!”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맥캘리의 이마를 가볍게 타격했다.

“씨이! 완전 아프잖아! 이 망나니 제자 같으니라고! 너는 조금이라도 스승님한테 경외심을 갖출 생각은 없는 거냐?”

칼은 얄궂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2센티만 더 크면 갖춰볼게, 경외심. 굽 신어서 커지는 건 해당 사항 없다.”

“크아아아아악! 앞으로 작아질 일밖에 안 남았는데!! 감히 사람의 약점을 건드려!!!”

분노한 맥캘리는 칼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  *  *

맥캘리와 이야기를 마친 칼은 곧 연구실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바깥쪽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릴리가 책을 펼쳐 놓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긴 하네.’

릴리는 학업과 학생회 활동을 병행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탁.

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멀뚱히 쳐다봤다.

“……할 일 끝났나 보네. 가서 쉬지 왜?”

어째서인지 그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네가 쉴 때까지 기다리려고.”

담담한 말투에 릴리는 찌릿하고 칼을 쏘아봤다.

“귀여운 후배, 델피나랑 놀지 그래?”

툭.

칼은 검지를 말아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괜스레 속마음을 말해버린 것 같아 릴리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져 자연스럽게 속에 맺혀있던 말들을 어렵지 않게 내뱉었다.

“진짜~ 가끔은 나랑 외출하자고. 나도 연극 보고 놀고 싶단 말이야.”

“항상 출세를 외치면서 공부만 하더니.”

“윽!”

칼의 반박에 릴리는 말을 더듬었다.

“주, 주말에 가자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

“그것도 그러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바삐 움직이느라 놀 시간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뭐하고 놀아야 할지도 몰라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면, 같이 놀러 가자.”

나름 배려의 차원에서 내뱉은 말이지만.

‘기말고사가 있었지.’라고 중얼거리며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릴리는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면 칼의 학교생활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파르테스의 정책상, 졸업은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

칼은 곧 수석졸업생으로 준비할 게 무척이나 많았다.

‘어른이 돼가는구나.’

그녀는 칼과의 이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칼은 가문으로 돌아갈 거야?”

때마침 칼도 졸업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1년의 유예가 남았지만. 바로 지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어.”

지옥.

그것은 당연 슈타크 가문의 영지 중 가장 척박하고 몬스터로 가득한 알테어였다.

꽈악!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는 느낌이 들었지만, 릴리는 구태여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이름 알 수 있을까?”

“칼리언트 슈타크.”

“?!”

칼이 엄청난 명가의 자제라는 것을 깨닫자, 릴리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분명 귀족일 거라고는 예상은 했지만. 슈타크 가문은 예상외였다.

‘쫓아갈 수 없어.’

파르테스에서는 교칙 때문에 몰랐던 신분의 벽이 지금 릴리에게는 너무나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괜스레 울적해진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바람이 릴리를 위로하는 듯 조용히 나부껴 머리칼을 건드려 눈가를 가려주었다.

칼은 그녀의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기고선 검지로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카, 칼!”

당황스런 나머지, 릴리는 허둥지둥했고.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오닉스 스퀘어의 칼리언트 슈타크다.”

“…….”

“파르테스의 망나니, 칼리언트 슈타크다.”

“…….”

“최악의 땅, 알테어 사선의 사령관으로 복귀 예정 중인 칼리언트 슈타크다.”

“…….”

릴리의 침묵과 칼의 짤막한 자기소개가 교차했다.

릴리는 어느 순간 칼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피식!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가던 칼은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릴리아나의 친구, 칼리언트 슈타크다.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왈칵!

그 말에 눈물을 터뜨린 릴리는 황급히 양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갑자기 울리지 말라고. 이 나쁜 놈아.”

칼은 흐느끼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

*  *  *

날이 저문 저녁.

스파라기다 학파에 마련된 엘프 숙소에는 칼과 로웰, 그리고 베르데가 모여 있었다.

기숙사 방침상 엘프 숙소에 들어가는 건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프를 데려온 장본인, 칼은 엘프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그들의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칼은 그 특혜를 한껏 이용해 낮에 릴리와 있었던 일을 로웰과 베르데에게 이야기한 참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로웰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했다.

“그건 칼이 릴리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좋아한다는 게 뭐지?”

칼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갈피도 잡히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쪼륵.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베르데는 남몰래 공들여 기숙사로 들인 과일주를 컵에 따라 홀짝 들이키며 말했다.

“의외군.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니.”

로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베르데에게 말했다.

“……너 엘프 맞지?”

동화책으로 보던 엘프는 고귀한 종족이라고 일컬어졌는데.

눈앞에 있는 엘프는 불량한 정도가 꽤 심각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는 달리 매사 수업에는 성실히 참여하며 모두의 각광을 받고 있었다.

특히 정령 소환 수업은 아예 교수가 가르침을 간청할 정도였으며…….

궁술이나 검술 수업 등에서도 교관인 리자크가 말을 건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라흐만 대륙의 역사나 문화, 그리고 접하지 못했던 종류의 마법 수업에 대해서는 아직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베르데는 빠른 속도로 그것들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예전의 파르테스가 칼과 데제스의 경쟁 구도였다면.

지금은 베르데가 끼어들어 삼파전 양상이 되었다.

베르데가 소속된 학파는 자신들의 학파가 베르데로 인해 위상이 한층 높아지자, 무척이나 기세등등해졌다.

심지어 2학년으로 입학한 베르데에게 3학년이 ‘베르데 님’이라고 부르며 꾸벅 절을 할 정도였다.

쪼륵.

베르데는 컵에 다시금 과일주를 부으며 말했다.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을 하게 되지만 거기에 정답은 없지. 그건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비슷하게 접근할 수는 있지. 넌 만약 릴리라는 여자를 누군가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지?”

베르데의 질문에 칼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해졌다.

“죽일 거야.”

곁에서 대답을 들은 로웰은 소름이 끼쳐 재빨리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반면, 베르데는 칼의 새로운 면모를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너만의 정답을 찾아봐.”

“그러지.”

괜히 이야기를 해봤자 머릿속만 복잡하기에 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너는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냐?”

칼은 화제를 전환해 베르데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었고.

베르데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재밌더군. 마냥 인간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오해와 편견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

“다행이네.”

로웰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베르데의 대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지나치게 위험한 녀석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더라고.”

그 낯빛은 심각하게 어두웠다.

칼은 팔짱을 끼며 베르데가 경계하는 인물에 대해 언급했다.

“데제스를 말하는 거겠지?”

“맞아.”

베르데는 순순히 데제스의 위험성에 대해서 인정했다.

“대체 너희들 눈에 데제스는 어떻게 보이는 거야?”

로웰 역시 데제스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베르데는 첫날, 데제스와 만나 이야기를 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나치게 깨끗한 결벽주의자였어.”

“결벽주의자?”

로웰은 이해가 가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르데는 보다 구체적인 예시를 늘어놓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더럽혀져 있어. 그러니까 지워버려야 해. 같은 생각을 하는 거 같았어.”

“하지만 녀석은 스첼레투스랑 글라우벤 학파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는걸.”

“그건 녀석이 인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놈이라서 그래.”

“그, 그건 또 뭐야?”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혼자서 괴멸시켰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지.”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군대가 필요하겠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그런 구색을 갖추려 하는 것처럼 보여.”

‘하긴.’

여기서 유일하게 베르데의 말을 공감할 수 있었던 칼은 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칸투버그의 구울 실험, 그리고 파우스트의 키메라 군단 등이 아마 이에 속하리라.

그렇다면 뭐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걸까?

혼자서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건 곧 온 세상과 적이 되는 일이었다.

‘피곤한 일이니까 되도록 삼가는 게 좋지.’

전생에 마왕이던 시절. 그 고독한 전장 속에서 싸워온 칼은 어렴풋이 데제스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다.

“어쨌든 가까이해서는 안 될 놈이라는 거네.”

로웰은 으스스 몸을 떨며 과일주를 컵에 따르다 곧 무언가 떠올랐는지, 베르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베르데.”

“왜?”

“너가 좋아했던 사람, 아니 엘프는 누구였어?”

“어, 없었는데.”

은근슬쩍 던진 질문에 칼도 흥미가 생겼는지 귀를 기울였다. 당황한 베르데는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  *  *

짙은 안개가 낀 항구의 새벽.

항구 부근에서는 뱃사람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야, 야. 지금 여기 네놈 때문에 잉크 튄 거 안 보여? 이 신발.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죄, 죄송합니다. 보, 보상은…….”

기겁한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그들을 달래려고 했다.

히죽!

‘털기 좋은 놈 만났네.’

그 행동이 오히려 그들을 자극하고야 말았다.

“지금 당장 손가락 잘리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놓는 게 좋을 거야.”

바로 그때.

뚜벅뚜벅.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뱃사람들 무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응? 꼬맹아. 지금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지. 죽고 싶냐?”

“구린내 나니까 닥치고 꺼져.”

콰앙!

“커헉!”

칼의 주먹이 남자 얼굴을 강타하자, 이빨이 우수수 떨어진 그는 그대로 기절을 했다.

안경을 쓴 남자의 앞에 선 칼은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이름은?”

안경이 반쯤 내려온 남자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확실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베, 베리오 워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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