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글릭 극단에서 벌어진 캐서린의 폭행 사건은 결코 한 사람의 악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첩된 악의, 외면된 정의, 침묵을 유지함으로 얻는 편의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런 일들이 벌어져 왔으니 업계 관행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덴젤은 날을 잘못 만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뭐야? 이 미친놈은?’
사건을 일사천리로 종결시키는 칼을 보며 경악한 덴젤은 어느새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콰직! 콰직!
“크아아아아악!”
시간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반나절이 흘러 어두컴컴한 새벽.
장소는 이실리아에 자리 잡은 폭력조직의 아지트로…….
바로 캐서린을 덮치려고 했던 조쉬의 소굴이었다.
그곳에서 칼은 맨손으로 조직원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온몸 곳곳에 혈흔이 가득했지만.
그 가운데 칼의 피는 존재하지 않았다.
파르르르르.
이곳까지 칼을 안내한 조쉬는 공포심에 오줌까지 지렸다. 그는 자신이 결코 건드리면 안 될 자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직원들은 매수한 비리 관료에게 칼을 연행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관료는 어째서인지 상층부에서 건들지 말라 했다며 거부했다
반강제적으로 칼에게 끌려온 극단 단원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던 리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크아아아악! 사, 살려줘!”
팔이 부러진 조직원은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쿠라빌이 그의 얼굴을 발굽으로 찍어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것으로 꽤 규모가 있던 폭력조직 하나가 도시에서 사라졌다.
“모처럼 레인이 챙겨준 옷인데, 아깝게 됐군.”
칼은 옷에 묻은 혈흔에 대해 탄식할 뿐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폭력조직 하나를 괴멸시켜버리다니.”
덴젤은 허무한 결과에 대해 뭐라고 말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칼은 이번에 리타 쪽으로 다가갔다.
“히끅!”
캐서린의 폭행을 사주한 그녀였기에 당연히 딸꾹질하며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잘난 네년의 가문인가? 아마 갈랜드라고 했지?”
칼이 가문을 언급하자, 리타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해요. 하면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제발 용서를!”
이대로 가다가는 가문이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대는 음지의 조직을 하룻밤 만에 소멸시킨 괴물.
설사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한 번에 덤벼들어도 결코 이 남자를 죽이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실수라? 고의는 실수가 될 수 없어.”
칼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리며 조직 소굴에서 가져온 기름병 마개를 뽑은 뒤, 병에 담긴 기름을 그녀의 머리에 콸콸 부었다.
오싹!
여기서 불을 붙이면 온몸이 활활 타오르게 된다.
그것을 인지한 리타는 오금이 저렸다.
“자, 잘못했어요. 가문에 말을 해 몸값을 지불할 테니…….”
칼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한마디를 읊조렸다.
“레르노만.”
“부르셨습니까?”
칼의 호명에 정보 길드의 지부장, 레르노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랜드 남작은 뭐라고 했지?”
“이 시간부로 리타 갈랜드란 이름은 가문의 족보에서 지웠다고 합니다. 또 오늘 치러진 결례에 대해서 시인하고 자신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 그럴 리 없어!”
믿기지 않는 사실에 리타는 레르노만을 향해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그동안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했던 아버지가 그런 굴욕적인 말을 내뱉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칼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아, 슈타크란 이름이 무섭긴 하나 보네.”
인정하기 싫지만, 가문의 배경을 빌려오니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루콘 최강의 무가, 슈타크.
그 이름은 타국의 두려움을 살 정도로 강인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도발한 가문이나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하여 받은 것 이상의 굴욕을 주었다.
계승권 문제로 슈타크가의 형제, 자매들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가문이 공격받는다면 응징을 위해 결속하는 게 슈타크였다.
한두 해를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갈랜드 남작은 자신이 애지중지한 차녀를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목마저 잘라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덴젤의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이 남자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아.’
거듭해서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았으나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평소에 치안을 위해 길거리를 순찰하던 병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벌어들인 재화를 들이밀어도 칼은 금전이 든 상자를 걷어찼다.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스릉!
바로 그때 칼이 비어벨을 꺼내 들어 그의 목에 갖다 댔다.
“…….”
오싹!
서슬 퍼런 칼날의 감촉에 덴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동공만 바르르 떨었다.
“같잖네. 아직도 잔머리를 굴리려고 하는 걸 보니…….”
“사, 살려…….”
“오늘은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생각이 바뀐 건지 칼은 비어벨을 회수하며, 양피지를 던졌다.
“이, 이건 뭡니까?”
당황한 덴젤은 서둘러 양피지를 펼쳤다.
“글릭 극단의 양도 문서야. 다 내려놓고 꺼져. 넌 이 거리에 발을 내밀 자격이 없어.”
파르르르르.
덴젤은 굴욕에 몸을 떨었다.
결국 그는 이성을 잃고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웃기지 마! 에포스의 문화가 꽃을 피울 때까지 공헌한 게 바로 나야! 겨우 계집애 한 명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버리라니!”
이제 화를 내기도 지겨운지, 칼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면 그 영광과 함께 지워지면 그뿐이야.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나?”
칼의 시선이 단원들을 향하자…….
우당탕!
“단장 죄송합니다. 얌전히 서명하고 끝내시죠.”
죽고 싶지 않았던 이들은 그동안 깍듯이 모시던 덴젤의 얼굴과 손 등을 붙들고서 강제로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 이것 안 놔! 너희들 무슨 짓이야! 크아아아아악!”
권위가 실추된 덴젤은 허망한 표정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추악한 모습을 보며 칼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디아나.”
“부르셨습니까? 칼리언트 님.”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디아나는 칼에게 예의를 갖췄다.
“……계약은 체결됐다.”
“알겠습니다.”
모든 걸 두고 떠나는 조건으로 목숨은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계약은 확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법.
스멀스멀.
어느새 디아나의 전신에서는 마력이 분출되었고, 그 입에서는 극장 단원들을 향한 저주를 읊조렸다.
“망각의 왕, 로하나의 이름으로 회귀의 기억을 갈취하노라. 연어가 자신의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치를 배제하노니. 그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으며 방랑하는 운명을 떠돌 것일지니…….”
그것은 돌아가고 싶은 장소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저주.
지금 여기서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다면, 다시금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 계약은 체결된 이상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이치다. 그들은 영원히 방황하게 되는 굴레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 * *
이실리아에 위치한 한 병원.
치료를 받고 닷새 만에 의식을 되찾은 캐서린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폭력의 공포에 벗어날 수 없는지, 손발을 파르르 떨었다.
“괜찮아. 내가 있어.”
그런 캐서린을 쭉 옆에서 돌보고 있던 델피나는 조심스레 끌어안아 주었다.
“……나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캐서린은 짧아진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며 흐느꼈다.
“머리는 다시 기르면 돼.”
“얼굴도 이렇게 부었고 완치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나을 수 있어. 용기만 내면 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말로만 하는 위로는 아무짝에도 필요 없었다.
진정으로 캐서린을 위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발돋움을 할 수 있게 응원해주는 것이다.
‘곁에 있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힐 즈음.
똑똑.
문 바깥에서 누군가 노크를 해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칼 선배인가?’
“들어오세요.”
끼익!
델피나의 허가가 떨어지자, 곧 문이 열리며 베레모를 쓴 미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누구시죠?”
델피나가 경계 어린 표정을 짓자, 남성은 베레모를 벗고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프로메스 상단의 레너드 바턴이라고 합니다.”
“프로메스 상단에서 갑자기 왜 오신 거죠?”
그녀의 경계심은 더욱 짙어졌고 레너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 며칠 사이의 이야기는 못 들으신 것 같군요. 프로메스 상단에서는 일찍부터 이실리아의 문화사업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터라 극단 하나를 매입하려고 했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뜻밖의 기회로 글릭 극단을 인수했죠. 임시지만 일단 제가 극단의 단장이 된 터라 저희 극단의 가장 중요한 여배우를 만나러 왔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황당한 말에 캐서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소유욕 넘치는 극단의 단장, 덴젤이 자신의 극단을 팔아넘겼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이어도 캐서린의 침울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저 이제 무대에 못 설 수도 있는걸요.”
“서고 싶지 않나요?”
염려 섞인 물음 캐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그녀의 대답에 레너드는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망국의 왕녀’ 극본은 저희가 고용한 극작가에 의해 재탄생될 겁니다. 수정하는 동안 몸을 회복해주시고 다시 무대에서 뵙죠. 캐서린님, 관객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어어엉!”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던 캐서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잘 됐다. 캐서린.”
델피나 역시 눈물을 참기 어려웠는지, 다시 한번 캐서린을 꼭 안아주었다.
* * *
글릭 극단은 간판을 내리게 됐다.
대신 새로 극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름은 에밀리.
프로메스 상단의 압도적인 후원을 받아 탄생한 에밀리 극단에서는 누구나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델피나는 머뭇거리다가 곧 단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레너드를 찾아갔다.
“오셨습니까? 델피나 님.”
레너드는 신사답게 델피나에게 예의를 갖췄고, 델피나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신 건, 누군가의 입김 때문인가요?”
“저희는 상인입니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발버둥 칠 뿐이죠.”
대답과 달리 거짓말이 어려운 건지, 레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금전적으로만 봐도 지금 프로메스 상단이 추진하고 있는 문화사업은 적자였기 때문이다.
“칼 선배는 프로메스랑 어떤 인연이 있는 거죠?”
결국 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레너드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이상 거짓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기에, 레너드는 진실을 밝혔다.
“굳이 따지자면, 에밀리 님의 뜻을 계승해주고 있는 분이라고 하고 싶군요.”
“에밀리요?”
“돌아가신 프로메스 가문의 계승자입니다.”
구슬픈 표정을 짓는 레너드를 보며 델피나는 아차 싶었지만, 레너드는 대화를 이어갔다.
“누구보다 상냥한 분이셨으나 프로메스의 업보에 희생되었죠. 그리고 그분 앞으로 들어간 예금은 사람들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현재 그 유지를 이어주고 있는 분이 바로 칼리언트 님입니다. 조금, 아니 심하게 괴팍하고 억지를 부리지만요.”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레너드는 곤란한 미소와 함께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말했다.
“비밀 엄수 부탁드립니다.”
* * *
며칠 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캐서린은 델피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조심해. 천천히 한 발자국씩.”
델피나는 캐서린의 몸이 상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캐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델피나에게 말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보다 칼리언트님은 왜 꽃을 들고 있으세요?”
캐서린은 자신의 옆에서 꽃다발을 들고 나란히 걷고 있는 칼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델피나가 반강제로 끌고 왔나 보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칼이 말끔히 정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캐서린은 칼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때 델피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선배. 그 꽃 아직도 안 줬어요?”
휙!
칼은 꽃다발을 델피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가져가라. 그래.”
“……그 정도는 스스로 해도 되는데요.”
핀잔을 주면서도 델피나는 곧바로 캐서린에게 꽃을 건네줬다.
“가, 감사합니다.”
깜짝 놀란 캐서린은 감사 인사를 건넸고, 칼은 넌지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무대에서 보지.”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칼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곧 그녀들과 거리를 뒀고, 캐서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델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의 연기에 너무 감동해서 팬이 된 것 같은데.”
“너무 영광인데. 저기 델피나.”
“응?”
진심으로 만족한 표정을 짓던 캐서린은 곧 델피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너의 연인이 된다면, 언제든지 대환영이야.”
“…….”
발그레.
예상치 못한 말에 델피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참. 나 이만 갈게. 같이 가요. 선배!”
꽤나 쑥스러웠던지, 델피나는 도망치듯 칼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