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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03화 (103/197)

#제103화

망국의 왕녀.

연극의 내용은 나라를 잃은 한 공주가 적국의 황제를 죽이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로 적국의 황실을 어지럽히는 내용이었다.

그로 인해 황제는 내정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그녀에게 매료된 채, 점차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독기로 가득 찬 망국의 왕녀도 황제의 진실을 느끼고 점차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화르륵.

마지막에는 불타오르는 궁궐 속에서 황제와 왕녀가 서로를 껴안은 채 사라진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마저 증발했으면 좋겠어. 차라리, 차라리 그때 나까지 죽이지 그랬어!”

마지막에 왕녀는 애절한 눈빛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흑, 흑.”

델피나도 감명 깊게 봤는지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

슬쩍.

칼은 레인이 미리 준비해준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고마워요.”

델피나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고, 칼은 팔짱을 낀 상태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다.’

그러나 마음속 생각은 표정과 딴판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 하면 왠지 부끄러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캐서린의 연기는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명랑했던 소녀가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고 얼마나 표독스러워지는지 그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였다.

환상 마법이 걷히면서 연극은 끝이 났다.

총체적인 평가를 하자면 이실리아가 아니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신파극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은 캐서린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활기찬 웃음을 띠었다.

*  *  *

연극을 마친 후 대기실.

꽈악!

오랜만에 만난 캐서린과 델피나는 포옹을 하며 온기를 나누었다.

“보고 싶었어, 캐서린. 연기하는 거 봤는데 진짜 소름이 끼치더라.”

“호호, 너무 칭찬하면 부끄러워.”

캐서린은 민망한지 안 어울리게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곧 칼과 눈을 마주치고는 델피나에게 말했다.

“이분은?”

“아! 소개할게. 나랑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칼리언트 선배야. 이번 연극을 꼭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오게 됐어.”

슬쩍.

캐서린은 델피나의 등을 돌리며 말했다.

“남자친구? 부럽다. 우리 극단 배우들보다 더 잘 생겼어.”

“아니야.”

칼의 얼굴을 슬쩍 본 델피나는 당황해하며 해명했다.

“그, 그러니까 딱히 얼굴 때문이 아니라 멋진 친구를 데려오라고 해서.”

“외면보다 내면이 더 멋있는 남자라는 거야?”

‘아아아, 이게 아닌데.’

부끄러운 마음에 델피나는 볼을 부풀리며 캐서린의 머리에 살짝 주먹을 쥐어박았다.

“계속 놀리면 화낸다.”

“미안. 미안.”

캐서린은 짓궂은 웃음을 짓다 곧 치마 양 끝단을 잡고 칼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캐서린이라고 해요. 연극은 즐거우셨나요?”

“뭐 나쁘지는 않았어.”

“…….”

나름 칭찬의 의미로 말한 거지만.

캐서린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델피나에게 말했다.

“델피, 이분 어쩐지 평가가 박한데.”

“음. 좀 더 오래 보면 진가가 보일 거야.”

졸지에 칼을 위한 대변인이 된 델피나였다.

캐서린은 그런 델피나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처럼 봤는데, 저녁 어때? 내가 근사한 곳을 준비…….”

“캐서린!”

하지만 어디선가 무대 관계자의 언성에 캐서린은 말을 멈췄다.

왈칵!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는 캐서린을 보며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급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봐도 돼.”

“어렵게 시간을 냈는데. 미안해.”

캐서린은 짧은 사과를 한 다음 급하게 무대 관계자에게 달려가 부른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죠?”

캐서린의 질문에 그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원자 한 분이 보자고 하니, 가봐.”

“……접대는 안 한다고 했을 텐데요.”

“그런 거 아니야. 네 눈으로 확인하고 그냥 나오면 되잖아.”

무대 관계자는 그렇게 한마디를 흘리며 홱 스쳐 지나갔고.

캐서린은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  *  *

글릭 극단의 응대실.

이곳은 극장 단장이 후원자 및 중요한 극장 관계자와 이야기를 할 때 모이는 장소로 캐서린도 종종 이 자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묘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오늘은 왜 혼자인 거지?’

이변을 알아챈 캐서린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바로 그때.

끼익!

열린 문 사이로 눈가에 잔뜩 구슬을 박아 넣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누, 누구시죠?”

평소에 보는 신사적인 인상이 아닌 사람의 등장에 크게 놀란 캐서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조쉬라고 해. 응대의 기본이 안 돼 있구먼.”

“가, 가 주세요.”

조쉬가 기분 나쁜 기운을 풀풀 풍기자, 뒷걸음질 치던 캐서린은 곧 후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아 열려고 했다.

딸칵! 딸칵!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왜, 왜?!”

당황한 캐서린은 눈을 부릅떴다.

그때 그녀에게 다가온 조쉬는 캐서린의 어깨를 붙잡고는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무, 무슨 짓이에요.”

바닥에 쓰러진 캐서린은 덜덜 떨었다.

싹둑!

조쉬는 미리 준비한 칼로 그녀의 머리칼을 싹둑 자르며 말했다.

“받아들이라고. 그러게 왜 분수에 맞지 않는 재능을 가져서 질투를 사고 그래. 뭐 나야 좋지만.”

“꺄아아악! 저리 가!”

퍼억!

캐서린은 손에 집히는 무대용 검 자루로 조쉬의 이마를 내려쳤다.

“아아, 까탈스럽기는.”

이마를 손으로 훑은 조쉬는 검지에 묻은 피를 할짝 핥더니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끝까지 자기 분수를 모르는구먼.”

그러곤 주먹을 들어 캐서린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휘이이잉!

콰아아아앙!

응접실에 있는 벽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폭풍에 죄다 박살이 났다.

콰아앙!

“뭐, 뭐야?!”

당황한 조쉬는 곧장 내빼려고 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폭풍과 함께 거대한 완드를 들고 나타난 델피나가 땅을 내려찍자…….

우드드득!

콰아아앙!

느닷없이 바닥에서 거대한 넝쿨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옭아맸다.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사지가 쥐어틀어진 조쉬는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고, 델피나는 싸늘한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죽고 싶나요? 아니 어떻게 죽여줄까?”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스런 엄청난 소란에 극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며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화르르륵!

입구 근처에 갑자기 푸른 불길과 함께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가, 갑자기 웬 신수가?!”

동요하는 그들을 향해 모습을 드러낸 칼은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

칼이 방출하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동요하는 것보다 침묵을 선택했다.

그 와중에 리타가 칼에게 소리쳤다.

“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가만히 놔둘 것 같아요?”

‘지긋지긋하군.’

어째서 이 사회는 자신이 아니라 식솔이나 가문을 끌어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한 번 써먹어 볼까나.’

파르테스에서는 학생의 신분 노출을 금지하고 있기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칼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스윽.

그의 시선이 향한 쪽에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잘린 캐서린과 분노한 델피나, 그리고 존재하면 안 되는 쓰레기가 넝쿨에 엮여 있었다.

빠득!

저도 모르게 이가 갈리는 풍경에 칼은 서슴없이 리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볼 일 있으면 슈타크 가문을 찾아오면 돼.”

“슈, 슈타크?!”

“서, 설마 루콘 최강의 무가.”

칼의 정체를 직감한 사람들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중이떠중이 가문들로서는 감히 루콘 최강의 무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 우리를 어쩔 셈입니까?”

극단의 단장, 델릭이 상황 수습을 위해 급하게 중재에 나섰다.

“글쎄.”

칼은 은근슬쩍 델피나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델피나는 슬픔과 증오가 섞인 표정으로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구슬픈 눈물에…….

‘안 어울리는군.’

이라고 생각한 칼은 곧 극단 인원 전체를 향해 경고를 읊조렸다.

“내 귀여운 후배를 울렸으니, 곱게 끝내지는 않을 거야.”

*  *  *

어째서?

그동안 노력해서 결실을 맺고 있는 캐서린에게 이런 화가 닥친 걸까?

델피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스스스스.

완드 끝에서는 그녀의 분노에 맞춰 검붉은 불길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히, 히익!!!”

겁을 집어먹은 조쉬는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타악.

칼이 델피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제지했다.

“그만해.”

“전 가만 놔둘 생각 없어요.”

델피나는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눈초리로 칼에게 대꾸했다.

“일단 캐서린부터 치료해야지.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까 네가 곁에서 돌봐줘야 해.”

“…….”

칼의 지적에 델피나는 입을 꽈악 다물었다.

분명 그게 가장 우선적인 사항이기는 했으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녀석을 풀어주는 건 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칼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절대 온건한 방식으로 끝내지는 않을 거야.”

“…….”

적이었다면, 그 말이 너무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웠겠지만.

지금의 델피나는 그 말 덕분에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히이잉!

그때 쿠라빌이 칼에게 다가왔고.

칼은 양팔로 캐서린을 안아 든 다음 쿠라빌에 올라탄 델피나에게 건네줬다.

“……선배 미안해요.”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너무 물렀던 것 같아.”

“?”

칼이 쓴웃음을 짓자, 델피나는 이해가 가지 않은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칼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고, 쿠라빌은 급히 발을 박차 병원 쪽으로 향했다.

쿠라빌이 쏜살같이 사라지자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린 뒤.

덥석!

콰아아앙!

넝쿨에 갇혀 있는 조쉬를 붙든 뒤, 강제로 끄집어냈다.

우드드드드득.

“크아아아아악!”

그 와중에 팔다리의 관절이 제멋대로 꺾이고 부러졌지만, 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이러지 마. 차라리 재판을 통해서 정식적으로 처벌을…….”

조쉬의 입장에서는 이런 미친놈한테 끌려가느니, 차라리 그나마 인권이 있는 이실리아의 재판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한 말이지만.

칼은 짤막하게 그에게 운명을 통보했다.

“잊어.”

“뭐?!”

“그딴 건 잊어. 정 심심하면 재판 놀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규칙도 생각보다 간단해.”

그 말은 비단 조쉬에게만 향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글릭 극단 구성원 전체에게 하는 말이었다.

무대에 걸터앉은 칼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취해서 헛짓거리했다, 약 먹어서 잠깐 헤까닥 돌았다, 나는 몰랐다, 이런 말을 지껄이면…… 죽인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칼의 안광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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