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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02화 (102/197)

#제102화

이실리아에서 문화가 흥행하는 거리 에포스.

에스포의 신조는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면 그 탄생에 축복할 것이다.’였다.

타국과 조화를 중요시하는 이실리아의 정책에 맞물려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 에포스다.

정책은 대대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현재도 거리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디링!

음유시인은 리라를 연주하며 영웅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한 화가는 거리에서 한 여인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활기가 넘쳐나는 곳은 극장이었다.

누군가는 연극을 에포스의 꽃 혹은 피날레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같이 보며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울뿐더러 그림과 음악 등 요소를 전부 종합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에 자리 잡은 글릭 극단은 연신 흥미가 돋는 내용의 연극을 이어나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번에 글릭 극단이 준비한 연극은 <망국의 왕녀>.

연극의 주인공은 캐서린으로 전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였다.

무대 뒤편.

“나는 그대의 목에 칼을 내민 암살자예요. 근데 어째서 그날, 저를 모른 척을 하신 거죠?”

그곳에서는 남청색의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대본을 읽는 중이었다.

‘아니야, 캐서린. 이건 대사를 읊는 것에 불과해. 좀 더 감정을 이입해야 돼.’

그녀는 좀 더 호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후우.”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달리, 뜻대로 대사와 행동이 나오지 않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자, 여기 의상은 다 준비해놨어.”

같이 연극을 준비하던 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고마워. 톰.”

캐서린은 피식 웃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맙기는.”

얼굴을 발그레 붉힌 톰은 슬쩍 캐서린을 보며 말했다.

“그보다 오늘따라 유난히 긴장한 것 같은데?”

“응. 소중한 친구가 오거든.”

캐서린은 여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같이 연극을 준비하던 여배우들은 캐서린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쪼개는 것 봐. 단장님한테 저렇게 헤실헤실거리면서 주인공 역할을 따냈다면서.”

“어머 정말 여우 같네.”

“추하다. 추해.”

울컥!

“진짜 너무하네.”

가만히 듣고 있던 톰은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지만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극단 내에서 그녀들의 입지는 생각보다 클뿐더러, 귀족을 배후로 둔 이들도 있어서 눈총을 줘봤자 돌아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보복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캐서린은 그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역시 연기하는 애들은 포커페이스가 장난 아니구나.’

누가 들어도 격분할 만한 험담이거늘.

캐서린에게서는 오히려 여유까지 느껴졌다.

“나의 공주님이 날 응원해주고 있으니까. 난 오롯이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어.”

캐서린은 활짝 웃으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

무너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여배우들이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  *  *

연극 시작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기에 칼과 델피나는 우선 바그로바를 키우는 데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입이 즐거운 것 또한 하나의 묘미.

델피나는 거리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먹으며 눈을 반짝였다.

“으음 맛있어요! 선배도 드셔볼래요?”

그리고 한 스푼을 떠 칼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달아. 안 먹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거부였다.

“진짜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하면, 언젠가 결혼할 부인한테 욕먹는다고요.”

델피나는 볼을 부풀리며 칼을 쏘아봤다.

“결혼이라…….”

생각해 보니, 가문과 가문의 결합을 빌미로 언젠가 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것을 원체 상상해본 적 없는 칼의 반응은 미묘했다.

“나중에 생각해봐도 될 문제지.”

고민하기가 귀찮았던 칼은 고민 자체를 포기했다.

“나중에 저를 찾아오셔도 돼요.”

델피나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칼은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은 해보지.”

“왠지 생각만 해본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답변이 서운했는지, 델피나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물론 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델피나와 함께 상점에서 구매한 약초를 꺼냈다.

델피나는 반색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텐더라는 약초에요. 아카데미서 구할 수 있는 약물이랑 결합해 크림을 만들면 신수의 털을 관리하기 쉬울 거예요. 가면 바로 만들어드릴게요. 조제법도 가르쳐드리고요.”

“이건?”

이번에 칼이 든 것은 강철로 된 봉이었다.

“신수 전용 이갈이용 도구에요. 단순해 보이지만 특수 공정을 거쳐서 꽤나 비싸요. 노빌레 레오네 정도 되면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거든요. 금방 너덜너덜해져서 자주 사야 하는데 비싸고 부담스럽다면 아는 대장장이를 통해서 용광로에 녹인 다음 다시 만들면 좀 더 돈이 적게 들 거에요.”

‘슈미트한테 몇 개 만들어 놓으라고 하면 되겠군.’

특수한 공정을 거쳤다고 해도 전설의 대장장이, 레밍호프의 제자인 슈미트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델피나는 그 외에도 발톱을 다듬을 수 있는 도구 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그 모습에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동물을 좋아하나 보네.”

칼의 말에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골드 무플론의 젖을 먹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신수와는 유난히 교감에 잘 되는 편이에요.”

“?!”

의외의 과거에 칼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골드 무플론.

그것은 신수 중 하나로 가죽이 금빛인 거대한 산양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신처럼 귀하게 여기며 떠받든다고 하지만.

정작 골드 무플론은 험악한 산지에서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노빌레 레오네만큼 보기 어려운 신수중 하나였다.

칼의 입장에서는 신수가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가 놀란 대목은 델피나의 과거였다.

어렸을 때 사람을 대신해 신수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그런 칼의 생각을 눈치챈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생아였거든요.”

“……어째서?”

진심으로 의문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깊은 분노가 자리 잡혔다.

처음 아기를 안았을 때 느꼈던 경이와 감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지도 몰랐어요. 먼저 알아차린 새어머니는 어머니와 저를 죽이려고 했고요.”

필시 불편한 후계 문제와 질투가 한몫했을 것이다.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지만, 델피나는 거듭해서 말했다.

“어머니는 피난 중에 저를 낳고 돌아가셨어요. 마사는 당시 막 태어난 저를 작은 나무 동굴에 숨겨놓은 채, 쫓아온 추격자들이랑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골드 무플론이 저를 발견하고 꽤나 오랫동안 키워줬죠. 그래서 신수는 꽤 좋아하는 편이에요. 물론 진짜 무서운 것들은 빼고요.”

천진난만한 말투.

그러나 묘하게 그 말투 속에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가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칼은 마냥 편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 뒤로 어떻게 마탑까지 돌아가게 된 거지?”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사가 포기하지 않고 저를 찾아냈거든요. 마사는 마탑에 돌아가지는 않고 저랑 평생 민가에서 지내려고 했지만. 뭐라고 할까? 아무래도 제 재능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결국 마탑에서 저를 찾아냈어요. 그때는 아버님도 제 존재를 눈치채고 저를 딸로 받아들인 거고요.”

이야기를 마친 델피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말했다.

“아아, 개운하다. 이 이야기 남한테 말한 건 처음이에요.”

“왜 나한테 말한 거지?”

“그냥 선배니까요.”

자신도 특별히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델피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캐서린이라고 하는 아이는?”

“저랑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예요.”

델피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슬슬 연극을 보러 갈까요? 기대해도 된다고요.”

“그러지.”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극장으로 향했다.

*  *  *

연극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

극장의 단장실에는 금발의 소녀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콰앙!

“도저히 못 참겠어요!! 왜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 천박한 서민 년이 주인공이 된 거죠?”

그녀의 이름은 리타 갈랜드.

극장에 가장 많은 후원을 한 갈랜드 남작의 차녀로 도도한 외모 덕분에 촉망받는 배우였다.

‘또 시작됐군.’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총을 받는 이는 글릭 극단의 단장, 덴젤 글릭이었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번 배역은 캐서린이 오디션에서 당당히 따낸 거야.”

“지금까지 천박한 시녀나 말괄량이 영애 역할밖에 하지 못한 서민이 어떻게 고귀한 망국의 왕녀를 연기한다는 거죠?!”

그녀는 ‘기가 막혀.’라고 탄식하며 흥분을 식히기 위해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끝이 없는 논쟁에 기가 질린 덴젤은 그녀를 천천히 달랬다.

“다음 작품에는 리타, 네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힘써보마.”

“전 지금 다음이 아니라 지금이 마음에 안 든다고요. 아버지도 불쾌해하고 계시고요.”

아버지란 말에 덴젤은 미간을 좁혔다.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언급한 것은 후원에 차질이 생기게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이해하렴. 리타. ‘명분’이 없잖니?”

은연중 덴젤이 흘리는 말을 들은 리타는 입가에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 말은 달리 풀어 해석하자면, 명분만 있다면 자신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  *  *

연극 시작까지 앞으로 5분이 남은 시점.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리타는 대기실에 누군가와 밀회를 했다.

“헤헤, 리타 아가씨. 이렇게 불러주시다니. 무슨 일입니까?”

머리카락의 색이 다크 브라운인 건장한 남성의 이름은 조쉬.

이실리아의 뒷골목 출신인 그는 주먹을 잘 쓰기로 소문난 건달이었다.

‘이 녀석을 믿어도 되는지.’

리타는 조쉬의 탐욕스런 얼굴을 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연극이 끝난 뒤, 캐서린이 다시는 무대 위로 못 올라오게 만들어 놔. 보수는 이 정도면 되겠지.”

짤랑짤랑.

리타는 은화가 꽤나 담긴 주머니를 올려놓았고.

“흐흐흐흐, 영광이죠.”

은화 주머니를 품에 넣은 조쉬는 기꺼이 그녀의 의뢰를 승낙했다.

“아참 근데, 어떻게 만들어 두면 되겠습니까?”

눈빛에 음흉한 기운이 가득 서린 것을 본 리타는 혐오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방법까지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흐흐흐, 죄송합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조쉬는 조용히 극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망국 왕녀가 시작되기까지 약 1분이 남은 시점.

너덜너덜해진 드레스 의상을 입은 캐서린은 차갑고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평소에 상냥한 미소만 보이던 그녀가 정말 나라를 잃은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있으니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그것은 그녀와 친한 톰뿐만 아니라 그녀를 적대시하는 배우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점이었다.

톰은 무대를 나서려는 캐서린에게 저도 모르게 질문을 건넸다.

“아까 긴장했던 사람 맞아?”

“그런 거 있잖아.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 앞에서 괜히 힘이 들어가는 거. 기대하고 왔는데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캐서린은 관객석에 있는 사람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연보랏빛 머리의 소녀와 심홍색 머리칼의 소년을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멋진 분이랑 왔네.”

“우와! 배우야?”

델피나의 경이로운 미모에 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의 프린세스야.”

캐서린이 살포시 웃음을 짓는 순간 무대 위로 라이트 마법이 차오르며 무대에 오를 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캐서린이 아니라 망국의 왕녀로서 걸음을 디뎌 무대에 올라섰다.

그 기백에 관중들은 물론이고 같은 배우들조차 숨을 멈추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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