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두근, 두근.
‘왜, 왜지?’
단순히 같이 가자고 권유한 것뿐인데, 델피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반면, 칼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연극이라…….’
타국에 비해 문화가 발전한 이실리아의 시민들은 문학 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즐겨들었다.
그에 힘입어 대중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연극도 한층 성행하고 있었는데.
알테어로 돌아가면 다시는 접하기 어려운 귀중한 기회였기에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심의 눈길로 델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가로 치기에는 나에게 이득인 것 같은데?’
“…….”
그렇게 한참 침묵이 길어지자, 델피나는 부끄러움을 넘어서 칼이 거절할까 싶은 두려움에 눈가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
퍼억!
칼은 심히 당황해 눈을 부릅떴고, 바그로바는 앞발로 칼의 다리를 후려쳤다.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 보지.”
“후우.”
결국 짤막한 답이 들려온 뒤에야 델피나가 입가를 실룩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웬 연극이야?”
델피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소중한 친구가 이번에 극단에서 여주인공역을 맡았거든요. 초대장도 받아서 모처럼 응원하러 가려고 했는데. 근사한 친구랑 같이 오라고 하더라고요.”
“딴 놈 알아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칼 본인이 보더라도 자신은 ‘냉정한 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올 것 같은 놈’이었다.
델피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선배는 뭔가 오만하면서도 자신을 낮게 평가하시네요.”
“그만한 업보를 쌓았으니까.”
“네?”
항상 자신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갑자기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이자, 델피나는 크게 당황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 녀석 어떻게 할 수 있지?”
칼은 바그로바의 등가죽을 집어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갸아앙!
신수 체면이 있지.
마치 어딘가에 내다 버릴 짐짝 취급에 바그로바는 이빨을 보이며 버럭 화를 냈다.
“선배. 바바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델피나는 칼에게 핀잔을 주며 그대로 바그로바를 껴안았다.
파르르르.
하지만 이전보다 체중이 훨씬 증가한 터라 팔다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마, 많이 컸네요.”
당황한 델피나는 엉거주춤 바그로바를 땅에 내려놓았다.
칼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에클라 세트치고는 근력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에클라 세트이기 전에 제가 가녀린 여자라는 인식을 먼저 해줬으면 좋겠어요.”
‘가녀린…….’
칼은 입학 초기에 메노스 템벨이 풀은 데스웜을 윈드써클로 갈아버린 풍경을 기억했다.
그때 당시 짧은 순간이었지만, 델피나의 눈은 무척이나 예리하고 고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디가 가녀린데?”
“치잇! 자꾸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삐진 그녀의 기색에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과하지.”
“사과의 뜻으로 바바를 주신다니까 용서해 드릴게요.”
“안 줬어!”
자연스럽게 바그로바를 데려가려는 음흉한 계획에 칼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크흠 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
“푸훗!”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델피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꽤 귀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디가?!’
어느 순간 주변을 지나가던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최대한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데제스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파르테스의 망나니 칼리언트와 1학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다고 여겨지는 델피나.
파르테스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이들이 모였으니, 학생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둘 사이에서 가슴 설레게 만드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훈훈한가?’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사람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칼의 반응을 지켜봤다.
빠직! 빠직!
칼은 이마에 핏대가 잔뜩 솟구친 상태로 안광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해보자는 거냐?”
‘그러면 그렇지.’
‘저 성질 더러운 미친개 성격이 어디 가겠어?’
홰액!
마치 귀신의 형상을 본 것마냥, 학생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자, 장난이에요.”
지나쳤다 싶었는지, 델피나가 재빨리 사과를 한 뒤에야 칼은 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칼은 시무룩해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답했다.
“좋아. 같이 가지.”
“진짜요? 약속이에요.”
칼이 제안에 승낙하자, 델피나는 반색하며 몇 번이고 약속을 강조했다.
* * *
어두운 저녁.
사락!
칼은 모처럼 마나 연공식과 검술 수행 대신 안경을 쓴 상태로 책을 보고 있었다.
바악바악!
방문 너머에서는 바그로바가 문을 박박 긁으며 놀아달라고 끼잉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바. 안 돼!”
레인은 그런 바바를 제지한 뒤, 문 틈새로 칼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공부를 방해할 수도 없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기색을 느꼈는지,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레인.”
“학업에 매진 중이신데 죄송해요.”
“딱히 아카데미 공부랑은 상관없어.”
“네?”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지.”
칼은 <망국의 왕녀>라고 표기된 책을 흔들어 보였다.
‘망국의 왕녀? 의외로 문학에도 관심이 있으신가 보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어?”
“죄, 죄송해요.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슈타크가에서 서신을 보내서요.”
“서신?”
“네. 키이라 슈타크 님한테서 온 편지입니다.”
“키이라?”
그건 누구지?
일기장에서도 보지 못한 이름이기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칼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레인은 조금 당황했다.
“형제들이 많으니 잊으실 만도 하지만…… 아!”
‘죽다 살아나신 이후로 단기 기억상실 상태라 했었지.’
그러나 이내 칼의 호위 기사인 루크가 꺼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키이라 님은 슈타크가의 삼녀로 최연소로 여성 상급 기사가 되신 분입니다. 칼리언트 님보다는 7살 정도 나이가 많습니다.”
“편지는?”
“여기 있습니다.”
레인에게서 편지를 받은 칼은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칼리언트 슈타크. 덜떨어진 반푼이인 너에 대해서 가문에서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어. 아버지는 너에게 2년이란 시간을 주셨지만, 가문의 중진들은 너를 알테어에서 도망친 겁쟁이로 낙인을 찍은 상태야. 나는 너에게 별로 흥미가 없어. 아무튼 보름을 줄게. 너의 실력을 평가하는 자리를 가지려고 하니 본가로 오도록 해. 형제들이 다 모이는 자리이니 한심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네.」
꾸깃!
편지를 다 읽은 칼은 그대로 구겨서 바닥에 툭 던졌다.
“무, 무슨 일 있으신가요?”
당황한 레인은 편지를 주워 다시 읽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묘하게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칼의 이마에는 핏대가 잔뜩 두드러져 있었다.
“본가로 찾아오라는데? 겁도 없이 날 시험하겠다면서…….”
꿀꺽!
프라이드에 흠집이 나는 것을 싫어하는 칼의 성격상, 이런 도발은 강력한 자극이 될 것이다.
“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시해. 가주 외에 나한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은 없어.”
“…….”
예상치 못한 칼의 대응에 레인은 침묵을 지켰다.
칼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올려놓은 뒤, 레인에게 말했다.
“이번 휴일에는 외출할 데가 있어. 의상을 깨끗하게 준비해놔.”
“외출이요?”
원래 칼은 자주 외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닉스 스퀘어 학파에서 맥캘리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어서 개인적으로 외출하는 일이 적었다.
“혹시 어디 가시는 걸까요? 저 옷은…….”
시녀 주제에 이런 것까지 물어보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칼이 가리킨 의상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훈련하거나 외출할 때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델피나가 같이 연극을 보자고 해서…… 그런데 마땅히 입을 옷이 저거밖에 없네.”
“그건 데이트잖아요!!! 저렇게 입고 가면 실례라고요!!!”
레인은 인내심에 한계가 달했는지 가슴을 탕탕 쳤다.
‘으휴, 이 눈치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주변에 이성 친구가 그토록 많으면서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매사에 주변에 관심이 없는지…….’
칼을 진심으로 섬기기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레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레인의 돌발 행동에 칼은 조금 당황했는지, 팔짱을 낀 상태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바그로바 역시 깜짝 놀랐는지 의자 뒤에 숨어 꼬랑지를 말았다.
잠시 후.
뒤늦게 화들짝 이성을 되찾은 레인은 칼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시, 실언했어요. 죄송해요.”
“신경 쓸 것 없어.”
전생 마왕 시절에는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밖에 겪지 못했기 때문에 상식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채워주고 지금의 삶을 이어지게 해준 게 바로 레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칼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주제도 모르고 충고를 하냐며 바로 응징을 가했겠지만.
레인의 야단은 칼에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된 의상이 있나?”
칼의 질문에 레인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 * *
다음 날 아침.
“날씨 좋네.”
아카데미에서 벗어난 시내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델피나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여주인공 연기가 너무 기대됐기 때문이다.
멋지게 보이고 싶어 의상에도 잔뜩 힘을 줬다.
옷은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를 입었고.
귓가 부근의 머리 위로는 눈꽃장식 머리핀을 끼고, 평소에는 안 하던 귀걸이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우와!!”
“파르테스에 다니는 영애인가.”
“엄청나게 아름다운데.”
“학생회장인 릴리아나도 상당히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저건 거의 천사가 강림한 수준이네.”
웅성웅성.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델피나에게 꽂혔다.
“…….”
이런 시선이 익숙지 않은지,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예전에 이 길거리를 지났을 때는 후줄근한 복장에 안경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목이 이렇게 쏠리자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선배는 왜 안 오는 거야!’
괜스레 그녀는 늦게 오는 칼에게 속으로 투정을 부렸다.
바로 그때.
분수대 쪽으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준수한 귀족 의상에 케이프를 대칭으로 두른 그 모습에 남자들은 위엄을 느꼈고, 여자들은 꺄악 거리며 칭송했다.
“……카, 칼 선배.”
평소에 교복과 단복, 평상복을 입은 모습밖에 보지 못한 델피나였기에 지금의 칼은 모습은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델피나가 말을 더듬으며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잠깐.”
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발언을 제지한 뒤.
미리 준비한 쪽지를 펴더니 내용을 그대로 읽었다.
“예쁘게 입었네. 정말 아름다워.”
“……뭐죠? 그 영혼이 싹 가신 멘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가슴 속을 벅차게 했던 감정들이 싹 식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좋다고 해서 그런 거지, 거짓말은 아니야.”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칼은 쪽지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스윽.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게 맞나?’라고 고민하는 칼의 눈빛을 본 델피나는 다시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 귀엽다고 하면 화내겠지.’
델피나는 칼의 손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에스코트 맡겨도 되겠죠?”
“준비는 네가 했잖아.”
칼은 툴툴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