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00화 (100/197)

#제100화

쏴아아아.

이실리아의 해안에서부터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으음.”

침대 머리맡에서 자고 있던 연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소녀는 그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졸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소녀는 미리 머리맡에 놓은 회중시계를 열어 쳐다보다…….

“지각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풀썩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제 그만 좀 일어나세요! 아가씨!”

“으음. 조금만 더.”

“이러다가 종일 주무신 적도 있잖아요. 안 돼요!”

그러나 일찌감치 이 사태를 예상하고 찾아온 시녀의 꾸지람에 그녀는 얼마 안 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달그락.

기왕 늦은 김에 끼니는 확실히 챙기겠다는 듯, 델피나는 갓 구운 빵에 잼과 버터를 바르고 있었다.

아직도 파자마를 입고 있는 그 여유만만한 모습에 시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질문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 진지하게 다닐 생각 있는 거죠?”

“그럼. 이래 보여도 마탑의 진보를 위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

시녀, 마사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고 델피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그녀가 파르테스에 유학을 오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한참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는 찰나.

“근데, 이 빵 맛있네. 평소랑 맛이 달라.”

델피나는 무심코 입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빵의 식감에 감탄했다.

이에 마사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그렇죠? 레인이 가르쳐줬어요. 어린아인데 어쩜 그렇게 영특하고 귀엽고 살가운지. 마음 같아서는 납치해서 데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에요.”

“마탑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 하하.”

델피나는 난색을 표하며 레인의 주인인 칼리언트를 떠올렸다.

분명, 누군가 자신의 사람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눈깔이 뒤집힐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가씨.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델피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마사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혹시 칼리언트 님과 연분이 있으신지요?”

“쿨럭!”

다즐링을 들이켜던 중 크게 놀란 델피나는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무, 무슨 소리야? 선배는 그냥 선배야.”

괜스레 쑥스러워진 그녀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부정했다.

“요 며칠 동안 칼리언트 님이 안 계셔서 낯빛이 매우 어둡다고 생각했거든요.”

“심심하긴 했었지.”

늘 기상천외한 소동을 일으키는데 기대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델피나는 피식 웃으며 검지로 툭 찻잔의 손잡이를 치며 말했다.

“뭐랄까. 선배랑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

“마치 첫사랑을 겪는 소녀 같네요.”

찌릿!

거듭되는 놀림에 델피나는 살짝 눈총을 주었고, 마사는 훈훈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기세를 무마시켰다.

“아참, 아가씨께 편지가 왔는데요.”

“편지?”

마탑에서 온 건가?

‘며칠 전에 연구 내용은 첨삭해서 보내줬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누가 보낸 거지?

증폭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델피나는 마사가 건넨 편지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 델피나에게 이 초대장을 전해드립니다. 캐서린 올림.」

화악!

아침 내내 수척했던 그녀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마사! 캐서린이야! 그 린이라고!!!”

그리고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마사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흔들었다.

“저도 알고 있으니까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고 편지를 읽어보세요.”

마사는 못 말리겠다는 듯 델피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편지를 개봉하기 전.

“후우, 후우.”

델피나는 연신 호흡을 골랐다.

“……편지 한 장 읽는데,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요?”

마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편지의 내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나도 조마조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네.’

사락.

이윽고 델피나는 편지를 개봉해 스윽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소 속독에 자신이 있는 델피나였지만 지금은 한 문장, 한 문장 가슴에 깊이 새기려는 것처럼 읽고 또 읽었다.

화악!

그리고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연극에서 여주인공 역할로 선정됐데. 나흘 뒤에 첫 무대가 있다고 초대장도 보내줬어.”

델피나는 편지에 들려있는 두 장의 초대장을 보여주며 마사에게 말했다.

“마사 같이 가자! 캐서린의 무대라고!”

“물…….”

대답을 하려는 찰나.

마사의 머릿속에는 묘안이 스쳐 지나갔다.

“후후후, 캐서린의 뜻깊은 무대를 돈을 지불하지 않고 보면, 벌을 받는 것 같아서요. 나중에 따로 시간을 주시면 제 친구들과 보러 갔다 올게요.”

“그, 그래?”

그럼 남은 한 장은 어떻게 하지?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당연히 그런 고민을 하는 게 훤히 보였다.

싱긋!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마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성 친구분이랑 같이 가야겠네요.”

“이, 이성 친구?”

동요하는 눈빛에 마사는 훈훈하게 웃으며 말했다.

“편지 내용을 봐도 되나요?”

“……여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유모이자 시녀인 마사의 요청이었기에 건네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를 스윽 읽어보던 마사는 ‘호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편지의 구절 중 한 군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보세요.”

「연극 연습 때문에 경황이 없다가 가까스로 편지를 보내게 됐어. 만약 이번에 오게 된다면, 델피나도 친구랑 같이 오는 거지? 기대된다. 틀림없이 멋진 친구겠지.」

“이, 이게 뭐.”

“아가씨는 여기서 캐서린의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당연히 친구와 와줬으면 싶은 마음에 두 장을 건네줬을 거예요. 동성 친구일 수도 있겠지만, 이럴 때는 보통 이성 친구를 기대하기 마련이죠.”

“그, 그런 건가.”

마탑에서 낳은 저명한 천재이자 세계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7명의 천재.

그리고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이었지만.

의외로 이런 상식 부분에서는 마사의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탑은 그녀를 유학을 보낼 때 마사를 붙여둔 것이었지만.

정작 마사는 그런 점을 역이용해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잘 생각해봐요. 모처럼 만난 캐서린인데,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한 걸 보고 싶나요?”

“윽!”

그것만큼은 절대 싫다는 표정을 짓던 델피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뭔가 이상하지만, 일단 알았어.”

“수긍하는 건가요?”

“묘하게 마사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오호호호, 아가씨의 이성 친구가 누구일지 정말 궁금하네요.”

델피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칼 선배를 두고 말한 거잖아.”

분하지만, 정말 아는 이성 친구가 칼밖에 없었다.

물론 그 당사자가 같이 가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  *

파르테스 3학년 전공 선택 과목 중에는 A학점 이상을 받기 어려운 수업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초학으로 단순히 약초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포션과 상처 치료가 가능한 약물을 제조하는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수업이었다.

오죽하면 엘리트 집단이라고 불리는 파르테스의 학생들도 이해하기보다 통째로 암기하는 쪽을 선택할 정도였다.

게다가 약초학을 담당하는 교수, 스펜하워는 약물 조합에 실패하면 가차 없이 감점하는 것은 물론이요.

폭언을 아끼지 않아 학생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뻐꾸기처럼 조잘대던 입이 실로 꿰맨 것처럼 꼭 닫혀 있었다.

“이 조합은 상당히 별로입니다. 재료의 효능을 삼 할도 못 살릴 거 같은데요.”

주변에는 학생들이 잔뜩 둘러앉아 있었고.

실험대에서는 심홍색의 머리칼을 지닌 칼이 스펜하워가 조제하고 있는 포션 조합에 대해서 이견을 제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중히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싸늘하게 노려보는 칼의 눈빛에 짓눌려 이내 ‘이의 있으면 들어주지.’로 말을 바꾸기까지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모습이었다.

칼이 설명이 정확할뿐더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원리를 정확히 분석해 내놓으니 스펜하워 교수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교수인 자신마저 배우는 부분이 있으니, 그 말은 끊을 수조차 없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 포션의 경우는 좀처럼 낫기 어려운 저주들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제3의 효과를 거두는 것도 좋지만, 굳이 원재료의 장점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탁!

칼은 상아색 허브와 짙은 갈색 그루브 나무의 뿌리를 칼로 썰어 통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약물의 색은 짙은 보라색에서 연한 보라색으로 변했고, 한층 더 걸쭉해졌다.

“이런 식으로 제조하는 게, 아까 말한 효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오오오!!!”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수업에서 칼이 보여주는 응용력에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랐다.

싸아.

반면, 칼 한 명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스펜하워 교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신성한 강의 시간에 감히 교수에게 지적질을 하다니.

이것은 교수로서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 그는 결국 목에 핏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끼에에에에에엑!

마취에 당해 수면을 취하고 있던 만드라고라의 뿌리가 다시금 끔찍한 울음을 터뜨렸다.

“아, 또 시작됐어!”

“저놈의 만드라고라는 툭 하면 울고불고 난리야.”

학생들은 하나같이 귀를 막기 시작했지만, 칼은 약초를 썰던 네모난 식칼을 스윽 들어…….

콰앙!

단숨에 만드라고라를 내리찍었다.

생각보다 힘을 강하게 줬는지, 도마에는 칼자국이 여실히 남았다.

“…….”

그 괴팍한 면모에 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

바로 곁에서 칼을 지켜보고 있던 스펜하워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한가득 맺혔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 그러게. 학점은 만점으로 처리할 테니 다음 수업부터는 안 나와도 된다네.”

“그러죠.”

얌전히 수긍한 칼은 정원에서 얌전히 자고 있던 바그로바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그로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바그로바는 벌떡 눈을 뜨며 그대로 칼을 뒤쫓아 갔다.

‘귀여워!!!’

그걸 본 여학생들은 바그로바를 보며 작은 소리로 꺄악 소리를 내질렀다.

덜컹.

이내 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스펜하워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지.”

*  *  *

아카데미 내부 정원.

그 구석에서 칼은 바그로바에게 먹이를 주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 주제에 손 더럽게 많이 가는군.”

전에는 가슴팍에 푹 넣으면 들어갈 정도로 작았지만, 이제는 크기가 커지다 보니 불가능했다.

게다가 요즘은 또 수시로 털을 날려대는데.

신수를 키우는 게 처음이라 레인도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예를 들면 레인의 힘으로는 바그로바의 털을 빗질해 주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뭔가를 돌보는 건 귀찮군.”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칼은 싱긋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좀만 관심을 가지면 관리하는 건 쉽다고요. 선배.”

때마침 칼을 발견한 델피나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키우는 방법 알아?”

“아버지를 통해서 어렸을 적부터 꽤 여러 신수를 만져봐서 어느 정도 일가견은 있어요. 도와드릴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뭘 원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칼이 빤히 쳐다보자, 괜스레 부끄러워진 델피나는 극장 티켓 두 장을 들며 말했다.

“저하고 같이 연극 보러 가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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