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쏴아아아아.
트리거를 발동한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
칼은 바다만큼 깊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따뜻하군.’
스스스스.
샘물의 힘에 의해 몸과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그 한계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마왕의 영혼.
여태껏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을 초월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그릇에도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
새삼스럽지만, 칼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깨닫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공예품과 다를 게 없군.’
깨달음을 주는 원천인 샘물 속에 잠긴 칼의 육신에는 그동안 말끔히 나았다고 생각한 상처들이 흉터처럼 드러나 있었다.
스스스스.
샘물은 몸에 드러난 흔적을 메우며 새로운 그릇으로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 중 칼의 몸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장을 거쳤다.
먼저 몸속을 흘러가는 생명의 원기를 통해 칼은 마나의 흐름과 그 잔재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군.’
화악!
칼은 전신에서 붉은 마력의 서킷을 형성했고.
우웅!
서킷은 활발하게 샘물의 원기를 흡수해 나갔다.
그것은 마냥 일방적인 갈취가 아니었다.
샘물이 칼의 몸을 치유해주는 과정에서 칼의 마력이 샘물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샘물의 농도가 짙어졌다.
이어서 칼의 머릿속으로 맥캘리의 가르침과 그동안 그랜드 마스터의 검술을 연마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상반신에 상처가 가득한 남자가 검을 지면에 꽂은 채, 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주변을 에워싼 복면의 적들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왜일까?
평소라면 건방지다고 말했을 칼이었으나.
지금 그는 남자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고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스릉!
이내 남자는 남은 적들을 두 자루의 검을 이어붙인 양날 검으로 베어버렸다.
‘압도적인 참격이군.’
그 위력에 그가 딛고 있던 절벽에 균열이 가고 그곳은 그대로 무덤이 되었다.
‘이자가 맥캘리가 쫓고 있는 그랜드 마스터.’
그 차가운 시선에 칼은 주먹을 연달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예상 이상이었기에 자연스레 긴장하고 만 것이다.
칼리언트는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강대한 마족도 능히 베어낼 남자라는 것을…….
고찰을 마친 칼은 마나 연공식 5성에 도달했다.
몸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실감하며 즐기고 있던 칼은 문득 왼쪽 너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찌릿!
전신을 옭아매는 서늘한 하얀 마력의 자취.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한 남자를 떠올렸다.
‘이 감각은 틀림없이 그 녀석이군.’
* * *
같은 시각.
‘결국 막아내지는 못했어.’
쏴아아아아.
미스틱 마운틴에 위치한 거대한 폭포에서 이실리아의 병사들과 같이 대기하고 있는 릴리는 참담한 표정으로 이마를 감쌌다.
이곳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마도 유산인 게스턴 비블리오가 숨겨져 있는 장소.
글라우벤 학파로 옮겨간 데제스는 그 규칙을 이용해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 게스턴 비블리오에 입장하는 데 성공했다.
딱히 막을만한 명분을 마련하지 못한 릴리는 결국 두 눈을 뜬 채,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데제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데제스가 게스턴 비블리오에 입장한 지, 반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꿀꺽!
‘실패인가.’
데제스가 여기서 무엇을 얻어갈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다만 게스턴 비블리오는 어려운 진리를 요구할수록 더 참혹하고 암담한 대가를 받아간다.
자칫하면 단지 아는 것만으로 폐인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바로 게스턴 비블리오인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릴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데제스푸아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남자가 구태여 마도 유산에 접촉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뭐가 궁금한 거야. 데제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콰아아앙!
백색의 거대한 마력 기둥이 하늘 끝까지 이르렀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데제스!!”
데제스를 섬기는 글라우벤 학파 무리들이 걱정하며 쳐다봤지만.
릴리는 빛무리 가운데서 어슬렁거리는 인기척을 간파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상한 진리를 획득했나 보네. 데제스.”
“아아. 기대했던 대로.”
빛이 걷힌 자리에서는 데제스가 총명한 눈으로 릴리와 이실리아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그 모습에 모두가 동요했다.
이전 학생회장이던 루시아는 무모하게 큰 진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기에 몸과 정신이 온전했다.
하지만 데제스를 휘감고 있는 성운과도 같은 빛무리는 그가 상당한 진리를 획득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데제스를 따르는 무리들의 표정은 환해졌고.
반대로 데제스의 힘이 갑자기 커졌음을 알아차린 릴리는 수심이 짙은 표정을 지었다.
정작, 그 대단한 성과를 얻은 데제스는…….
찌릿!
머나먼 저편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숙적의 기운에 인상을 찌푸렸다.
“늘 그렇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이야.”
* * *
데제스와 칼이 각각 커다란 힘을 손에 넣은 순간.
지잉!
이실리아의 궁전에 있는 푸른 물결 기사단의 훈련장에서 다수의 병사들과 창으로 대련을 펼치고 있던 에릭 듀란트는…….
콰앙!
갑작스러운 두통에 창끝이 땅에 박힌 아인벨레에 몸을 기댄 채로 애를 쓰고 있었다.
“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에릭의 주변을 에워쌌다.
지릿! 지릿!
에릭은 가까스로 두통을 잠재우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무언가 큰 변화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실체를 잡을 수 없었던 에릭은 불쾌감을 느꼈다.
“젠장!”
콰앙!
훈련용으로 마련된 비석을 아인벨레로 내려쳐 박살 내버렸다.
같은 시각, 갑작스런 초자연 현상에 이상 반응을 한 것은 에릭만이 아니었다.
콰앙!
“……깜짝이야.”
지하에 마련된 공방에서 자신의 마법을 연구 중이던 델피나는 수상한 기척에 온몸이 경직된 채로 완드에 마력을 가득 충전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바닥에 그리던 마법진에서 일순간 폭발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델피나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평소에 투쟁을 꺼리는 그녀가 전심전력으로 무언가를 박살 낼 생각이 들 정도면, 어디선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어디 아픈가.”
두통이 완화되자, 델피나는 다시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보랏빛으로 차오른 마법진은 델피나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손쉽게 완성되는 마법진이 아닌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어머나.’라고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편, 에릭과 델피나가 수상스런 기운에 당혹스러워할 때.
같은 에클라 세트의 일원 중 한 명인 맥캘리는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오두막에서…….
“흐흐흐, 푸딩이다!”
피로에 시달리다가 결국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단잠에 빠져 있었다.
“…….”
“…….”
이윽고 얼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머지 두 명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칼과 데제스의 힘이 발산되는 하늘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시간은 어느덧 엿새가 흘렀다.
뚜벅뚜벅.
학생회장실에 모습을 드러낸 칼은 새로 맞춘 교복이 영 어색했는지, 목깃의 단추를 하나를 풀던 참이었다.
지그시.
“…….”
그런 칼을 릴리는 의자에 앉아 응시하고 있었다.
하암!
칼의 발치에 있던 바그로바는 긴 여행의 피로에 지쳤는지 하품을 하며 뒷발로 얼굴을 긁고 있었다.
“허가도 없이 엄청난 계획을 추진했네.”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칼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을 때.
릴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쪽은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덜컥 나서면 어떡해!”
“내가 실패할 리 없잖아.”
“…….”
참으로 얄궂은 말이었지만.
지금까지 모두 이로운 결과를 만들어냈기에,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흥!”
하지만 칼 혼자만 갔다는 것에 못내 섭섭했는지, 릴리의 얼굴에는 아직 삐진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안 다쳐서 다행이야.”
“응?”
갑자기 걱정해주는 말을 듣게 되자, 칼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어 보았다.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젓는 고집이 가득한 릴리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붉어져 있었다.
칼은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게 착한 녀석.”
“칼. 지금 뭐라고 했지?”
찌릿!
릴리가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으려고 하자, 칼은 야단맞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자각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피식.
그 뻔뻔함에 결국 릴리는 화를 풀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래서 엘프들은 어디 있어? 가장 먼저 소개받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두근두근.
동화나 이야기로만 듣던 신비로운 이종족을 만난다는 사실에 릴리는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칼을 지켜봤다.
이에 칼은 손으로 창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복 맞추고 온다고 했는데, 아, 저기 오고 있네.”
“어디, 어디?”
릴리는 칼에게 가까이 붙어 창문 밖을 쳐다봤다.
사락.
파르테스 교내 정원에서는 비단결 같은 연녹색의 머리칼을 지닌 우아한 엘프를 필두로 열댓 명이 넘는 엘프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한데, 어째 그들 중 한 명이 입고 있는 교복이 조금 이상했다.
삐질삐질!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칼도 지금은 식은땀을 주륵 흘리고 있었다.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남자라고 하지 않았어?”
“……교, 교복을 잘못 맞춰준 것 같아. 성별을 착각하고.”
가까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칼은 이마를 매만졌다.
놀랍게도 베르데가 입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학생 교복으로, 치마를 입고 있는 그 모습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발그레.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우연히 칼과 눈이 마주친 베르데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때마침 창문도 열려있는지라, 베르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칼에게 말을 건넸다.
“이 옷, 이렇게 입는 거 맞나?”
“……아니. 여학생용이야.”
베르데는 인상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네가 소개해준 의류점이었다만?”
“너를 여자로 생각해서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지. 신경 쓰지 마. 잘 어울리네.”
나름 장난스럽게 넘기려는 심산이었지만.
빠직!
흥분한 베르데는 곧장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칼에게 무참하게 화살을 쏘았다.
쨍그랑! 쨍그랑!
칼은 신속하게 그것들을 피해냈다.
바닥에 유리 파편들이 흐트러진 것을 보고 분개한 릴리가 칼과 베르데에게 소리쳤다.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