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하아, 하아.”
두 명의 생기를 강탈한 것으로 가까스로 몸을 복원한 폰은 호흡을 갈무리 중이었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그는 죽은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유일하게 불타지 않는 검은 산양 가면을 착용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메이가스여.”
바로 그때, 언제 잠입을 한 건지 그의 뒤에서 귀족 정장을 갖춰 입은 미중년이 폰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폰의 신분은 음지의 상인.
외양적이나 신분적인 위치로 보면 분명 미중년의 사내가 더 우월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조금 다른 계급이 적용되었다.
폰의 계급은 메이가스(마법사)로 비밀 결사, 메노스 템벨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이었다.
반면 미중년의 사내는 마기스텔 템프리(신전의 수령)으로 조직 내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이었다.
폰은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말했다.
“예상외의 상대를 만나서 말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칼리언트 슈타크. 얼마 전에 우리의 신도를 매장해버린 데제스푸아르와 동급의 사내라고 소문난 적이 있지. 듣던 대로 광견 같은 사내였어.”
자신도 나름 강하다고 자부하는 폰이었지만, 타오를 것만 같은 칼의 심홍색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싹!
저도 모르게 공포와 흥분으로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잠시 제해두고 미중년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죽어있는 동안 엘프들의 동태는 어떻게 됐지?”
“여러모로 실패입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왕벌은 베르데의 화살에 숨통이 끊어졌다 하더군요. 통제력을 잃은 킬러비들도 제풀에 지쳐 사냥을 당한 참이고요.”
“아아, 섭외 실패군.”
지금까지 한 고생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보람이 없다니.
어찌 허망하지 않을 쏘랴.
음지의 상인으로 위장해 콜레리크 후작에게 접근한 것은 상당히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베르데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을 위해 엘프들을 파라디스에 쫓아낸 다음 콜레리크 후작에게 고초를 겪게 만들려고 했다.
콜레리크 후작의 변태적인 성정은 안간 베르데의 증오를 키울 것이다.
그때 폰은 인간 귀족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를 베르데에게 심어 세뇌한 다음 비밀 결사, 메노스 템벨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뻔뻔하면서도 작위적인 계획이었지만.
칼의 방해가 있기 전까지는 확실히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스윽.
소매를 걷어붙인 폰은 흉흉한 화상을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데제스푸아르보다 더 미친놈이었어.”
“글쎄요. 그건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중년의 사내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직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제 피를 드시죠. 메이가스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헌신하겠습니다.”
“아아, 참 기특하네.”
아직까지 분이 가시지 않은 말투였지만.
그것은 미중년의 사내를 향한 어투가 아니었다.
미중년의 사내에게 걸어온 폰은 슬그머니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중년의 사내는 한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씨익!
폰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데제스의 계획을 가로챌 거야. 그 녀석 꽤 재밌는 계획을 꾸미는 중이거든. 겸사겸사 줄라탄과 후크의 복수도 해야지 않겠어?”
“…….”
최악의 적에게 분노를 살 생각을 하다니, 폰 역시 만만치 않은 미친놈이었다.
“칼리언트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그 질문에 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너는 광견이 포섭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나? 최대한 피할 생각이지만, 마지못해 부딪친다면, 그때는 진심을 보여줘야지.”
콰직!
대답을 마친 폰은 그대로 미중년 사내의 팔을 깨물어 피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뚝뚝 붉은 선혈이 바닥에 흥건히 흘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폰의 상처를 살폈다.
스스스스.
피를 섭취하기 무섭게 상처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진성 뱀파이어는 급이 다르군.’
그는 피식 웃으며 문득 머릿속에 어떤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 남자를 적으로 맞닥뜨릴 수 있을까?
물론 같은 뜻으로 뭉친 결사의 일원이기에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남자의 답은 단연코 거절이었다.
‘제아무리 에클라 세트라고 해도 이 남자를 상대했다가는 불운한 결과를 맞이할 뿐이야.’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
그가 알고 있는 폰이란 남자는 적에게 불운을 불러일으키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 * *
킬러비들의 난동이 해소된 파라디스는 모처럼 평화를 맞이했다.
찰박찰박!
“꺄악!”
맑은 계곡물 사이로는 밀란을 포함한 엘프 소년, 소녀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푸하!”
그들을 돌보는 보호자 역할을 맡은 슈미트는 프로메스 상단이 가져온 맥주를 마시며 흥겹게 놀고 있었다.
갸르르릉!
며칠 동안 킬러비들을 상대로 활약을 한 바그로바도 포상으로 받은 야생 사슴의 고기를 섭취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베르데는 프로메스 상단이 가져온 해독제와 의료품들을 가지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정신없군.”
그 풍경을 보며 칼은 나무 사이에 묶여있는 그물침대에 몸을 눕힌 채로 잠에 취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하지만 잠이 들기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 에르바의 한마디에 몰려오던 잠은 확 달아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단잠을 만끽할 기회를 놓친 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에르바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네는 딱히 욕심이 없는 것 같군. 인간들은 대개 권좌에 앉고 싶은 욕심이나 정복욕이 있잖은가.”
“하찮은 것들입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칼의 확답에 에르바는 더욱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작은 보답을 하고자 하네. 잠시 같이 가지.”
“그러죠.”
딱히 보답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약속을 했기에 그것을 지키려고 행한 것뿐이다.
그 속내를 간파한 에르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상당히 외골수군. 한 곳을 파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니 말이야. 혹시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
에르바의 말에 칼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한 남자에게 패배했습니다. 너무나 뼈저린 패배라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자네가 패배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에 에르바는 상당히 동요했다.
얼핏 봐도 칼의 실력은 베르데와 대등, 아니면 약간 우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은 패자인 저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살아간다면, 언젠가 다시 한번 붙어주겠다고.”
“투쟁의 삶인가.”
“전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칼이 어깨를 으쓱이자, 에르바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
* * *
칼과 에르바가 이동한 곳은 으슥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안쪽을 살펴본 칼은 을씨년스런 느낌에 미간을 좁히며 에르바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수상쩍은 눈초리로 볼 필요는 없다네. 이곳은 위대한 영혼의 정수가 깃든 곳이라네. 아,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기 어렵겠군. 마도 유산이라고 하면 알아듣겠나?”
“?!”
접해본 적은 없어도 이미 파르테스에는 그것을 노리고 수작을 부리는 이도 있잖은가.
‘게스턴 비블리오 외에 다른 걸 보게 줄은 생각도 못 했군.’
데제스가 알았다면 분명 미간을 꿈틀거리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데려온 이유는 뭡니까?”
“……이곳은 깨달음을 주는 곳이네. 어떤 깨달음을 얻었냐에 따라 몸과 정신이 변하기도 하고 마력이 변하기도 하지. 그래서 리스벨리오 폰테, 각성의 샘이라고 불리고 있지. 우리가 이곳 파라디스에 떠나지 않는 것은 이곳을 수호하기 위해서네.”
스윽.
에르바의 설명에 칼은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며 의사를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단순한 질문이지만,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말 이런 고귀한 곳을 인간에게 안내해줘도 되는가? 혹은 내가 이것을 악용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가? 등의 뜻이 내포돼 있었다.
“동족의 친구이지 않은가. 괜찮다네.”
이에 에르바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돼도 전 모릅니다.”
괜스레 쑥스러웠던 칼은 고개를 홱 젖혔다.
그런 칼에게 에르바는 몇 가지를 당부했다.
“입장을 할 수 있는 것은 한 번뿐. 두 번은 들어갈 수 없다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한계에 도달했을 뿐, 별 의미는 없다네.”
설명을 들은 칼은 이쯤 되니, 자연히 궁금한 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베르데는 어떻습니까?”
“베르데는 훗날을 기약하고 있다네. 어차피 우리에게 시간은 자네들보다 많이 남아있거든.”
“그것도 그렇겠네요.”
칼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리스벨리오 폰테가 있는 동굴에 진입했다.
* * *
저벅저벅.
동굴 안으로 진입한 칼의 발소리가 묘하게 크게 울렸다.
맑게 흐르는 물의 소리를 따라 발길을 향하니, 그 끝에는 어두컴컴함에도 불구하고 맑고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샘이 있었다.
휘잉!
바로 그 순간, 호수에서 방출된 묘한 빛에 사로잡힌 칼의 시야에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엿보였다.
여섯 장의 박쥐 날개, 그리고 흑단 같은 머리칼과 아다만티움에 버금가는 거대한 뿔이 유난히 돋보이는 존재.
그리고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눈, 크림슨 아이.
그것은 한때 마계를 멸망시킨 최강의 마왕 벨리앗.
바로 칼의 전생의 모습이었다.
‘단순한 허상은 아니군.’
스윽.
두 남자는 팔짱을 끼었으나, 의미는 달랐다.
칼은 경청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벨리앗은 오만스런 표정으로 칼에게 입을 열었다.
[추악하군. 뭐지? 그 약해빠진 모습은?]
“지금의 내 모습이다, 벨리앗.”
딱히 부끄러울 이유도 몸을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칼의 대답은 당당했다.
하지만 그것을 잠자코 들어줄 생각은 없었는지, 벨리앗은 칼의 코앞까지 다가가 서슬 퍼런 눈동자로 쳐다봤다.
[지금 네놈이 해야 할 건, 그 건방진 시간 꼬맹이를 죽이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거다. 헌데, 그 건방진 시간 꼬맹이의 종자 노릇이나 하다니!]
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칼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건방진 놈’이라고 속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그 꼬맹이의 부하가 아니야.”
[그 꼬맹이가 시키는 대로 살면서?]
“그것은 내가 패자이기 때문이다, 벨리앗. 패자는 승자에게 굴복하고 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거다. 구차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복수를 꿈꾸는 것은 마땅치 않아. 녀석은 나에게 갱생을 지시했고 나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어.”
벨리앗은 기가 차고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네놈이 갱생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다 죽이면 그뿐이지. 유구한 세월 동안 손에 묻혀 온 피를 이제 와서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벨.리.앗.]
뻔한 도발이었지만,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후회는 하지 않아. 그리고 난 그 꼬맹이가 나에게 요구하는 게 뭔지 똑똑히 알고 있어. 녀석은 나에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거든.”
[요구?]
같은 자아이면서도 ‘벨리앗’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너의 한계다. 벨리앗.”
[같잖은 소릴. 그건 너를 부정하는 소리다.]
“아아, 그 말대로다. 지금 내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 네놈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다.”
[네놈!!!]
벨리앗의 피막의 날개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칼은 그런 벨리앗을 보며 말했다.
“차이트가 내게 바라는 건, 분별력. 분별력을 가지고 배제할 건, 배제하고 지킬 건 지키라는 소리지.”
스스스스.
발설과 동시에 칼의 팔찌도 붉은색으로 빛났다.
[네놈은 결코 갱생할 수 없어!!!]
벨리앗은 살의가 담긴 흉흉한 오라를 뿜어냈지만,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네놈과 논쟁은 무가치하다. 사라져라. 잡념.”
동시에 트리거가 발동하면서 칼의 팔찌가 끊어지며 사라졌다.
콰아아앙!
동시에 주변으로 발산된 붉은 마력의 파장이 단숨에 벨리앗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