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96화 (96/197)

#제96화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허공에 그려진 붉은 궤적에 섣불리 발을 내민 자들은 예외 없이 검과 함께 몸통이 썰려 나갔다.

우웅!

스산한 검명과 함께 비어벨의 검신이 천천히 오러로 휘감겼다.

검을 들고 있는 모든 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칼의 걸음을 막으려고 했다.

‘너무 느려.’

그러나 검의 경지가 한창 무르익은 칼의 눈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만 보였다.

예를 들어 지금같이 사각을 노리고 뒤에서 내지르는 창격도…….

휘익!

그저 보폭을 줄이고 몸을 살짝 젖혀 가볍게 피했다.

카앙

이어서 비어벨을 휘두르니 가슴에 빗금이 그어진 기사는 숨을 거두었다.

‘뭐야? 이 미친놈은?’

동요와 혼란 속에서 군사들은 전후좌우로 나뉘어 칼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어떤 공격도 칼의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서걱!

오히려 비어벨의 검격에 병사들의 사지가 잘려나가며 허공에 핏방울이 연달아 튀는 괴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칼의 몸 역시 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무자비한 그 모습에 콜레리크 후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급 실력자를 배치했는데, 전혀 상대도 안 돼!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

서걱!

무수히 가해지는 공격 사이에는 오러가 실린 것도 있었지만.

칼이 방출하는 붉은 오러에 의해 오히려 유리처럼 깨져버리고 말았다.

‘오러끼리 마주쳐도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는군.’

전투 중에 새로운 사실과 경험을 습득한 칼은 곧장 새로운 기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카캉! 카캉! 카앙!

비어벨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검신도 무사하지 못했다.

꿀꺽!

위기를 직감한 콜레리크 후작은 고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말로 날 죽이려는 거야. 내가 죽어서 생길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어째서 이런 광견 같은 남자가 하필 내 앞에서 튀어나온 거야?!’

“그, 그만둬. 지금이라도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모베 콜레리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용건 없으니 꺼져라. 버러지.”

칼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폰에게 다가갔다.

“…….”

당황한 콜레리크 후작의 얼굴은 대번에 빨개졌다.

“이, 이!”

마음 같아서는 한껏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칼에 대한 공포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자가 나타난 거야!’

분노와 수치, 굴욕, 그리고 공포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그의 몰골은 말도 아니었다.

스윽.

칼은 그대로 폰의 앞에 섰다.

“……이거 생각보다 거물이 출현하셨군요.”

검은 산양의 가면을 고쳐 쓰며 폰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덥석!

칼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의 목을 졸랐다.

“커헉!! 콜록, 콜록! 자, 잠깐!”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색에 그는 크게 놀라 어떻게든 칼에게 협상을 제안하려고 했다.

두둑!

찌이이이익!

칼 역시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폰의 목에서 여왕벌을 탐색할 수 있는 벌이 담긴 유리병 목걸이 줄을 뜯어냈다.

“쿨럭, 쿨럭!”

가까스로 살아남은 폰은 목을 어루만지며 숨을 헐떡였다.

“가자.”

“네, 네!”

압도적인 칼의 학살에 경직돼 있던 밀란은 쭈뼛거리며 칼을 쫓아갔다.

“사, 살았다.”

그제야 안도가 된 건지, 콜레르크 후작은 엉덩방아를 찍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만 안 놔두겠어. 어떤 놈인지 몰라도 반드시 오늘의 수모를…….”

앙심을 품은 콜레리크 후작과 달리 폰은 입가에 겔겔 흘린 침을 닦아내며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냥 간다고? 저 미친 성격으로 봤을 때, 후환을 절대 남기지 않으려 할 텐데.’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도통 알 길이 없어 마음속이 절로 답답해져만 갔다.

정작 정치판에서 온갖 경험을 했을 콜레르크 후작은 이후의 일에 대해서 생각만 하지,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딛고 있는 지면 위로 붉은 마력의 서킷이 형성됐다.

“이, 이건 대체!”

처음 보는 술식에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조차 이 수상한 현상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두근두근.

폰은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동시에 심장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벌일 생각입니까?”

결국 폰은 다급하게 칼을 불러세웠다.

저벅저벅.

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콜레르크 후작과 폰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여기서 꽤 많은 사람을 죽인 것 같던데, 기분은 어땠지?”

“그, 그건.”

폰은 당황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했지만.

콜레리크 후작은 긴장한 얼굴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최고의 기분을 만끽했다. 불타 죽은 사람의 시신이 토기 인형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건 알고 있나? 불구덩이 속에서 자신의 아이만은 살려달라는 엄마의 울음소리는 하프의 음률보다 더 매혹적이야. 고통은 또 하나의 미학이지.”

식은땀을 한가득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미학을 술술 읊었다.

실실 웃고 있는 그 입가를 보며, 칼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나도 그 기분을 만끽해보려는 참이야.”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은 품에 숨겨두었던 양피지의 끈을 이빨로 잡아당겼다.

안쪽에 적힌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화르르륵!

스크롤은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고.

치익!

광대한 마력이 서킷을 타고 콜레리크 후작과 폰에게로 향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콜레르크 후작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당황한 얼굴로 병사들을 다그쳤다.

‘설마?!’

그 와중에 유일하게 폰만이 칼의 의도를 깨달았다.

-용건 없으니 꺼져라. 버러지

그것은 칼이 콜레리크 후작에게 내뱉었던 발언으로…….

달리 해석하면, 그것은 상당히 무시무시한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였어!’

그 사실을 깨달은 폰의 얼굴이 새하얘졌지만, 한 박자 늦었다.

치익!

이미 붉은 마력은 서킷 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화르르륵!

콰앙!

콜레리크 후작과 그 병사들은 불길에 묻혔다.

“크아아아악! 네 이놈! 날 살려라!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내 용서를!”

콜레리크 후작은 뼈가 녹아가는 고통에 시달리며 애원했지만.

“지랄하고 있네.”

칼은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콜레리크 후작가에서 일어난 거대한 화재에 모두가 혼란스러울 무렵.

칼은 쿠라빌을 타고 단숨에 프로메스 상단에 도착했다.

“엄청난 명마군요.”

바깥에서 칼을 기다리고 있었던 레너드는 쿠라빌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한 듯 보였다.

“해독제는?”

“프로메스 상단에서 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으니, 지금쯤 도달했을 겁니다.”

“그런가? 우리도 곧바로 출발하지.”

“무사를 기원하겠습니다.”

레너드는 베레모를 벗고 진심으로 칼에게 예의를 갖췄다.

“쓸데없는 소릴.”

어처구니없다는 대답에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이 프로메스 상단의 가주, 베게누 프로메스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베게누 님이 이 남자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아.’

이 남자와 엮이게 된 사정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그는 에밀리의 유지를 존중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리사욕을 위해 쓸 수도 있는 에밀리의 예금을 남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음에 다시 한번 뵐 수 있겠는지요?”

“재밌는 일이 있다면.”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하며 그대로 고삐를 당겼고.

히이잉!

쿠라빌은 거칠게 포효하며 발굽으로 지면을 힘차게 찼다.

그렇게 칼은 사라졌다. 레너드는 섭섭하면서도 후련하다는 미소로 중얼거렸다.

“……정 없기는.”

*  *  *

파라디스의 중심.

킬러비들은 사냥감을 물색하기 위해 허공을 활공하고 있었다.

기존에는 밤이 되면 휴식에 들어가 숨을 돌릴 틈이 있었지만.

요 며칠 사이에는 사냥 패턴을 바꿔가며 엘프들을 농락했다. 심지어 그사이 숫자도 대량으로 늘어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그나마 엘프 중에서 사망자가 없는 이유는 베르데의 활약 때문이었다.

“꺄아아악!”

방심하고 있는 엘프 여성을 향해 킬러비가 독침을 쏘려고 했지만.

쇄액!

폭풍을 일으키는 베르데의 화살이 킬러비의 몸통을 터뜨렸다.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한다.”

“하, 하지만!”

“빨리 가서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

베르데의 다그침에 심각성을 인지한 엘프들이 일제히 마을로 복귀했다.

그로부터 약 2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하아, 하아, 하아.”

동료들이 도망갈 때까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버티던 베르데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킬러비를 보며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후우. 화살이 다 떨어졌군.”

오늘 밤만 해도 백에 가까운 숫자를 죽였거늘.

킬러비를 전멸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파라디스의 따뜻한 기후와 자원이 넘치는 생태계는 오히려 킬러비가 대량으로 증식할 수 있는 발판이 돼주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숲이 적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베르데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위잉!

그 마음을 알 리 없던 킬러비들은 베르데를 사냥감으로 인지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휘릭!

베르데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쿠크리를 빙그레 돌리며 역수로 쥐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끊임없는 전투로 온몸의 근육은 비명을 내질렀고, 입가에는 단내가 풀풀 풍겼다.

또 늘 넘쳐났던 마력도 동료를 지키는 데 아낌없이 소진한 터라 이제 남은 건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다.

“밀란이라도 도망갈 수 있어서 다행이군.”

엘프의 멸망을 직감한 베르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가 에클라 세트냐?!’

이딴 벌떼도 진압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거늘.

이 정도만 해도 너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는 구차한 칭송 따위는 필요 없다.

바라는 것은 승리. 그리고 생존이었다.

베르데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원수가 된 킬러비들에게 소리쳤다.

“와라!”

위이이이이잉!

킬러비들은 사방에서 베르데를 향해 독침을 쏘기 위해 다가왔다.

서걱! 서걱! 서걱!

끝없이 몰려오는 킬러비들을 베어 나가던 도중이었다.

위잉!

한 개체의 날개에 손목이 강타당하며 들고 있던 쿠크리 단검이 날아갔다.

“젠장?!”

당황한 베르데의 복부를 향해 킬러비의 독침이 날아왔고.

“크윽!”

아슬아슬하게 허리 쪽으로 비켜 맞은 베르데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뚝뚝.

지면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상처가 얕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지잉!

독으로 인해 두통과 함께 시야가 희뿌예지기 시작했다.

‘야단났군.’

위이이잉!

머리를 움켜쥔 베르데를 향해 킬러비들이 최후의 일침을 날리기 위해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여기까지인가.’

최후를 직감한 베르데가 고개를 드는 순간.

스슥! 스슥! 스슥! 스슥!

허공과 지면으로 거대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이 생기더니 킬러비들을 뒤덮었다.

파지지직! 콰아아앙!

동시에 서킷을 타고 온 붉은 전광이 킬러비들을 통째로 검은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누, 누구?!”

가까스로 시야를 되찾은 베르데는 놀란 표정으로 잿더미가 된 킬러비들 사이에서 걸어오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어김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베르데에게 말했다.

“잔챙이 따위로 쩔쩔매다니? 에클라 세트란 이름이 아깝군.”

“시끄러워.”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 굴욕을 느낀 건지, 베르데는 인상을 찌푸렸고.

피식.

칼은 입가에 웃음기를 그리며 미리 챙겨온 화살통과 해독제를 건네주었다.

“……이건.”

의외의 행동에 크게 놀란 베르데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여왕을 사냥하려는 참이야. 모처럼 즐거운 사냥 축제인데, 혼자서 재미 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아 겁나면 해독제만 받고 빠져도 돼.”

아까와 달리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베르데는 화살통과 해독제를 건네받으며 확실히 말했다.

“네놈은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광견이군. 칼리언트.”

“광견이라…… 어감은 별로지만, 뜻은 좋군.”

“무슨 소리지?”

칼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를 놓아줄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잖아.”

“정말이지.”

베르데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콰아아앙!

곧이어 칼과 베르데의 전신에서 집채만 한 마력이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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