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파라디스와 인접한 국가, 포르타 왕국.
“사, 살았다.”
쿠라빌에 올라타 온종일 이동한 밀란은 겨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친 그녀의 모습을 보던 칼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숙소 잡아줄 테니까, 들어가서 쉬어.”
“그럴 순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동족들이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 저 혼자 편안히 있을 수 없어요.”
심지를 굳힌 그 눈빛을 보며 칼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주변 녀석들은 다 고집불통이군.”
칼은 슬그머니 도시의 풍경을 보았다.
이실라아만큼 건축물이 세련되거나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교역이 활발한 편이라 최소한의 생활과 산업 기반이 갖춰져 있었다.
그 증거로 각국에서 몰려온 상단들이 지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설명을 들어볼까?”
칼의 설명 요구에 밀란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킬러비들이 최초로 난리를 피운 곳이 바로 이곳이에요. 사고였는지 고의였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요.”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불과 1년 전.
때는 이른 봄. 느닷없이 도시로 몰려온 킬러비 무리가 무차별적으로 인간들을 습격했다.
당시 크게 놀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고군분투했고, 결과적으로 킬러비들을 모조리 숙청할 수 있었다.
킬러비가 어째서 이곳에 등장했는지 알기 위해 조사가 시행됐지만.
누구도 결말을 알지 못하는 미제의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배경을 파악한 칼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아마 실험일 거야.”
“실험이요?”
깜짝 놀란 밀란의 반문에 칼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운반 도중에 벌어진 실수라면, 반드시 증거가 남기 마련이야. 증거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계획하고 벌인 일이라는 거지.”
“그렇지만, 굳이 저런 위험한 몬스터를 풀어서 대체 뭘 실험하려는 걸까요?”
의도를 알 수 없기에 밀란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까지는 몰라. 단기적인 목표라면, 추측이 가는 게 있어.”
“……무슨 말이죠?”
학살이나 사냥 같은 대답을 예상하고 물어본 질문이었건만, 칼의 대답은 다소 엉뚱했다.
“처음에 운반했던 개체는 한 마리일 거야.”
“한 마리요? 분명 다수의 킬러비가 습격을 했다고 들었는……?!”
말을 하던 도중 칼이 하고 싶은 말의 맥락을 짚어낸 밀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운반된 개체 수는 한 마리지만.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등장했다는 말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서, 설마 여왕벌을 옮기고 있었던 건가요?”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분명 산란 중인 여왕벌이겠지. 알에서 부화한 킬러비 유충이 성충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럼 그들이 했던 실험이란 게…….”
“부화와 성충이 되기까지의 실험이지.”
집채만 한 킬러비를 성충으로 키우기까지 분명 엄청난 먹이를 소진했을 것이다.
또한 킬러비의 성격은 지나치게 잔혹하기에 분명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말했잖아. 단기적인 목표밖에 추측되지 않는다고. 나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어째서 그렇게 무모하게 킬러비를 들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밀란은 저도 모르게 칼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숲에 살았다고 해도 많은 인간을 보아왔다.
그러나 저런 냉철한 고찰을 할 수 있는 것은 연로한 엘프 중에서도 극히 소수였다.
칼과 비교가 가능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의 아버지인 에르바 정도일 것이라고 밀란은 생각했다.
밀란은 동경의 마음을 담아 칼에게 말했다.
“칼리언트님은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들리는 대답은 의외로 씁쓸했다.
“항상 죽고 죽이려는 지옥의 구렁텅이로 살아왔으니까.”
전생, 그가 마왕이었을 때는 마족들의 권모술수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악랄함으로 비교했을 때, 인간은 절대 마족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또한 환생한 몸의 원주인 역시 알테어 사선에서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생활을 해왔다.
‘나랑 이 녀석도 의외로 공통점이 있었군.’
칼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편, 칼의 이야기를 듣던 밀란은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아직도 숙적들에게 노려지는 건가요?”
칼은 피식 웃으며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전부 말살해버렸는데.”
심홍색으로 빛나는 그 눈에는 진심이 묻어나왔다.
짙은 투지와 살의에 밀란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뒤늦게 ‘전부는 아니지.’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말을 일부 정정했다.
끝없이 죽고 죽이는 전장 속에서 살아가던 마왕 벨리앗의 삶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지만, 칼리언트로서 삶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마족만큼 성가신 적들도 속속히 등장하고 있다.
아직 다 만나보지 못한 슈타크 가의 형제들.
아벤트로트의 보석 여왕, 마미안트 후작부인.
아직까지 그 끝을 알기 어려운 데제스 싱클레어.
그리고 이들을 모두 정리하고 사명을 마친 뒤에는 다시 한번 시간의 신 차이트와 복수전을 치러야 한다.
흥미진진한 것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지금의 삶 쪽일지도 모르겠다.
칼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아, 정말 갱생은 어렵단 말이지.”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지금은 벌떼를 푼 내막을 찾아야 하기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칼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밀란은 칼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갱생?”
* * *
칼은 밀란과 함께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벌떼를 푼 내막의 단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정보 길드도 없고 킬러비의 체취나 흔적도 쉽사리 찾기 어려웠다.
시간이 길어지자, 밀란은 불안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찾아야 해. 찾아야 해.”
지금 이 순간에도 동료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적의 실체는 그녀의 동요를 더욱 크게 확산시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순서를 잘못 잡았군.”
칼은 길을 걷고 있는 그녀의 후드를 뒤로 젖혔다.
홱!
순식간에 뾰족한 귀가 드러나자, 사람들의 이목은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깜짝 놀란 밀란은 동요하는 눈으로 칼을 쳐다봤다.
“카, 칼리언트 님.”
“따라와.”
“하, 하지만.”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자, 칼은 양팔로 밀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밀란의 얼굴은 화악 붉어졌다.
“사,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내려주세요. 칼리언트 님.”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 말에 토 달지 마.”
“……네.”
짜증이 잔뜩 섞인 칼의 험악한 표정에 주눅이 든 밀란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그래도 부끄럽다고요?!’
무서워서 차마 말은 못 하겠고, 그나마 속으로나마 대꾸하는 그녀였다.
잠시 후.
밀란의 정신이 안정되자 칼은 그녀를 내려주었다.
“칼리언트 님. 여긴 상단인데요.”
“그러니까 데려온 거지.”
칼은 스스럼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밀란은 상단 깃발 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프로메스?”
엘프 사회에서까지 널리 전파된 전설적인 상단의 이름이었다.
* * *
포르타 왕국에 세워진 프로메스 상단의 지부.
지부의 책임자, 레너드는 오늘도 어김없이 구시렁거리며 서류를 결재하고 있었다.
그는 진홍빛의 베레모와 짙은 갈색과 금색이 뒤섞인 꽁지 머리로 자신만의 특색을 잘 살린 멋들어진 미중년이었지만.
현재는 과도한 업무로 인해 눈은 퀭했고, 턱은 며칠 동안 제대로 다듬지 못해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있었다.
현재 그는 입에서 매우 험한 욕설을 내뱉으며,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입으로 중얼거리는 원망의 대상은 바로 상단을 총괄하는 상단주인 베게누 프로메스였다.
“이 미친 인간이 누구 잡을 일 있나?”
대개 주변에서 알려진 프로메스 상단은 상단의 대다수 구성원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레너드는 이에 대한 내용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개뿔.”
전성기에 비하면 현재의 프로메스 상단은 그 위세가 찬란하지 않았다.
한때는 전쟁 물자를 구비하고 그것들을 팔아서 덩치를 어마어마하게 키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물자는 모두 제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결과를 놓고 말하자면 새로운 방향 역시 크게 성공해 베게누 프로메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장사의 신’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초를 겪고 희생이 되는 사람도 어김없이 있기 마련이다.
레너드는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프로메스 상단에서 돈줄이 될 만한 사업은 모두 부상단주인 리젤과 레너드의 손을 거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는 금융업을 크게 북돋을 때라고 주장했지만.
베게누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때를 대비해서 더 많은 수익을 내는 사업을 구축해야 된다고 그의 제안을 기각했다.
그 한 번의 의견충돌에 레너드는 자존심이 팍 상했지만.
돈의 흐름을 쫓다 보니, 결국 베게누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침통했다.
그렇기에 그는 바빴다.
현재는 울분을 삭히며 다시 처음부터 묵묵히 돈이 될 만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에, 레너드님!!”
그의 비서인 키노가 문을 박차며 횡설수설 말을 걸어왔다.
“나 피곤한 거 안 보이냐? 빨리 말해.”
레너드는 신경질이 났는지, 깃펜을 쓱싹거리며 키노를 노려보았다.
불이라도 난 게 아닌 이상 일할 때는 건들지 말라고 해뒀기 때문이다.
“히끅!”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키노였지만, 그럼에도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갑자기 프로메스 상단의 차기 가주의 신분패를 든 자가 나타나서 저희에게 몇 가지를 요구할 게 있다고 합니다.”
“너 용케 이 바닥에서 사기 안 당하고 살아남았구나.”
레너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키노를 쳐다봤다.
“…….”
하지만 묘하게 곤란해하면서도 키노는 물러설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니, 레너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네. 진짜입니다.”
잠시 후.
레너드는 응접실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붉은 머리칼의 소년과 마주했다.
옆에는 어린 엘프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딱히 노예로 보이지도 않았다.
‘상당히 건방진 놈이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오만한 기품이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고 은연중 인정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부의 운영을 맡고 있는 레너드 바턴이라고 합니다. 요구사항을 듣기 전에 우선 신분을 확인해야 할 듯싶습니다만.”
그는 아직까지도 의심이 뒤섞인 눈길로 탁상에 있는 프로메스 가문의 신분패를 바라보았다.
‘저건 분명 에밀리 아가씨의 것인데…… 왜 이 녀석이.’
빠득!
과거의 애잔한 추억을 떠올린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
“시간 없어. 빨리 확인해.”
울컥!
어떻게 저런 놈이 신분패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화가 절로 나려고 했지만, 레너드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다졌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게누 프로메스가 모든 지부에 공식문서를 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혹가다가 누락되는 경우도 있어서, 지금과 같이 신분을 확인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얼마 안 가 키노가 양피지를 조심스레 들며 말했다.
“빨간 머리에 눈빛이 건방진 소년이라고 확실히 명시돼 있습니다. 광견과도 같은 사내니까 절대로 입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문구도 있네요.”
빠직!
“…….”
순식간에 칼의 눈 밑이 어두워지면서 이마에는 핏대가 잔뜩 두드러졌다.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하냐? 이 눈치 없는 놈아.”
레너드는 쯧 혀를 차며 키노를 쏘아봤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
키노는 살금살금 칼의 눈치를 살피며 마지막 한 줄을 소리 내서 읽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신속하게 처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