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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93화 (93/197)

#제93화

에르바가 마련한 처소.

칼이 베르데와의 전투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서 씻고 나온 참이었다.

“흐아암, 넌 안 피곤하냐?”

침대에 앉아있는 슈미트가 꾸벅꾸벅 졸며 지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머리에 물기를 수건으로 감싸 닦고 있던 칼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파.”

“너가 아프다고 하니, 무진장 신기하네.”

“나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다고.”

“안 똑같아. 너는 팔 하나 잘려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죽일 놈이잖아.”

“…….”

슈미트의 반박에 칼은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분명 통증을 느끼긴 한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라도 고통을 호소하기는커녕, 그 상대를 작살내버릴 것이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한 칼은 문득 지금까지 가장 느낀 고통 중 가장 컸던 걸 떠올렸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힘을 해방할 때로…… 그 고통에 비하면, 베르데가 준 상처의 고통은 고통 축에도 끼지 못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는 고통과는 기준 자체가 달랐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칼은 자연스럽게 어째서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마왕 벨리앗의 영혼을 한낱 인간의 육신 따위로는 감당할 수 없다.

지금은 그나마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마나 연공식을 이용해 몸과 영혼의 균형을 맞추고 있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버티기에는 칼의 영혼은 무척이나 거대하고 강대했다.

하지만 여기서 칼의 예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칼은 머릿속으로 초월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찬란한 금발에 얄궂은 표정의 미소년.

몸놀림이 광대같이 기묘한 그는 자신을 시간의 신이라고 지칭하는 괴짜, 차이트였다.

‘분명 그 녀석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거겠지.’

벨리앗 시절의 그를 쓰러뜨리고 금제를 가한 절대적인 영역에 위치한 신.

꿍꿍이는 모르지만 그는 칼에게 갱생의 여지를 주었고.

성격에 맞지 않지만, 언약을 중요시 생각하는 칼은 그 맹세를 지켜나가기로 했다.

‘조금 더 성장하면, 이 몸 안에 잠들어 있는 그 녀석의 힘이 뭔지 알 수 있겠지.’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심적인 근거는 있다.

차이트는 칼에게 갱생을 요구하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할 시, 금제를 가하는 방법 역시 심어놓았을 것이다.

또한 칼이 마왕의 마력을 지녔음에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역시 마왕의 힘을 억제하는 어떤 힘이 작용함이 분명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저 생각 없는 놈이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칼은 머릿속에서 차이트가 얄궂게 웃으며…….

[나 별 생각 없는데?]

라고 대꾸를 하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아, 그 녀석 생각만 하면 빡치네.’

눈 밑에 그늘이 진 칼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가까스로 화를 삭였다.

“뭘 그렇게 골똘히 있어? 어울리지 않게.”

“그냥 생각 좀 하느라고.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베르데를 알고 있는 거지?”

“아, 그 꼬맹이.”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슈미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 스승님인 레밍호프가 에르바와 친구 사이거든. 그래서 종종 엘프 마을에 놀러 오고는 했었지, 그때는 팔에 근력이 없어서 화살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애송이였어.”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처음 손에 집은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한다.

하지만 베르데는 그 천재조차 뛰어넘은 에클라 세트.

활을 만진 것과 동시에 두각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칼에게 슈미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당시 얼마나 말하는 게 싸가지 없던지, 세상을 아주 만만하게 보더라고. 그래서 혼쭐을 내줬지.”

“혼쭐을 내주다니?”

칼의 반문에 슈미트는 아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크크크크. 일부러 시위를 당기지 못할 활을 만들어줬어. 그리고 그것도 못 쏘냐면서 엄청나게 약 올렸지. 크하하하하하. 그 당시 분해서 훌쩍이는 녀석의 얼굴이 어찌나 통쾌했던지.”

“얼굴을 보지 못해서 아쉽군.”

지금의 베르데의 성격을 떠올리면 분해서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

문이 덜컥 열리며 이마에 잔뜩 핏대가 선 베르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참 순진했지. 지금 생각하면 그 활은 지금 정도의 체격이 돼야 쓸 수 있는 거였어.”

“와, 왔냐?”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슈미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꽈악!

베르데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슈미트를 흉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훗! 인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이가 있지. 그렇게 쏘아본다고 쫄 것 같아?”

배짱 있게 말을 내뱉은 슈미트는…….

스윽.

슬그머니 칼의 뒤로 모습을 감췄다.

“…….”

어처구니없던 칼은 슈미트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살쪄서 훤히 보여.”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지독한 것을 더 지독한 것으로 막아내는 거야. 표현을 하자면 코브라 같은 놈을 블랙맘바로 막아내는 거지.”

그의 답변은 칼의 심기를 은근히 자극했다.

따악!

칼은 검지를 끌어모아 슈미트의 이마를 가격했다.

“크아아아아악!”

이마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자, 슈미트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바닥에 굴렸다.

그러나 칼과 베르데는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스윽.

칼에게 용건이 있었던 베르데는 양피지와 몇 가지 물품이 담긴 자루를 건네주었다.

“네가 아버님에게 부탁했던 물품이야. 빠짐없이 챙겼지만. 악용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칼은 인정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경계심이 짙게 남아있었다.

물론 칼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건넬 뿐이었다.

“수고했어.”

빠직!

그게 묘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말투라 베르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너는 누군가의 신경을 긁는 데 타고난 것 같군.”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뿐이야.”

베르데에게서 시선을 거둔 칼은 문 건너편을 보며 말했다.

“준비는 됐나?”

“네, 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여행 채비를 갖춘 밀란이었다.

우아했던 녹색의 머리칼은 가지런하게 머리끈으로 묶어 색다른 미를 발산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베르데는 걱정이 됐는지, 칼을 쏘아보며 말했다.

“밀란을 건드리면 넌 죽는다.”

“안 건드려.”

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반박했다.

생각해보니 베르데는 첫 대면에도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칼을 소중한 여동생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오, 오라버니!!! 그만 하세요!”

괜스레 민망했던 밀란은 베르데에게 주의를 주었다.

베르데는 팔짱을 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칼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삐졌냐?”

울컥!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듯싶었지만 구태여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어째 귀엽게 느껴졌다.

베르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언제 출발할 거지?”

“지금 출발할 생각인데, 그걸 왜 묻는 거지?”

“……너는 아무래도 우리 상황을 잊고 있는 것 같군.”

베르데는 한숨을 쉬며 자연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목이 우거진 파라디스의 숲 위에는……

위이이이잉!

힘찬 날개짓 소리와 함께 킬러비들이 본격적인 사냥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엘프들은 분주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킬러비들이 표적을 삼은 대상은 엘프뿐만이 아니었다. 파라디스에 서식하고 있는 동물이나 몬스터도 포함이었다.

가만히 방치했다가는 여왕벌은 계속해서 알을 낳을 것이고, 성충이 된 벌은 더욱더 영역을 넓혀갈 것이다.

킬러비는 오크나 오우거마저 미트볼로 만들 정도니, 그 강함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물론 대형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은 킬러비로서도 체력 손실이 클뿐더러 자신들이 죽을 수 있어서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개체 수가 증가해서 다수로 상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제보다 더 많아진 것 같구나.”

몸에 갑주를 걸친 에르바의 낯빛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상기시켜 주었다.

무기를 갖춘 엘프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킬러비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푸푸푸푸푹!

화살을 맞아 쓰러진 킬러비를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창으로 확실히 숨통을 끊어버렸다.

“일단 자네에게 많은 짐을 맡기게 돼서 미안하네.”

에르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채비를 갖춘 칼을 쳐다봤다.

이번 여정에서 칼은 벌떼를 푼 내막을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누군가는 단순히 내막을 밝힌다고 해서 이 사태가 끝나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지적이었다.

왜냐하면 벌떼를 푼 장본인들은 아직까지도 엘프들이 찾지 못한 여왕벌의 행방을 확실히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곁에 서 있던 베르데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칼에게 말했다.

“강한 건 알겠지만 가급적이면 킬러비들을 건드리지 말고 숲을 빠져나가. 괜한 행동으로 인해 킬러비들의 움직임이 바뀌면 곤란하니까.”

“그러지.”

화륵!

대답과 함께 눈앞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푸르르르.

처음에는 그 흉흉함 때문에 크게 경계했었다.

그러나 주변에 적의를 발산하지 않고 순종적인 모습을 본 엘프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안도하는 눈빛으로 쿠라빌을 바라봤다.

“슬슬 출발해야겠지.”

칼은 자연스럽게 밀란을 들어서 안장에 앉혔다.

‘깃털 같군.’

어린아이의 체격이라 가벼운 것도 있지만, 엘프들의 골격 자체가 인간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한 점도 분명 관계가 있으리라.

“…….”

귀 끝이 빨개진 밀란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홱!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밀란은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고 이어서 칼이 쿠라빌 등에 올라탔다.

갸르르릉.

바그로바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신도 태워달라는 듯이 눈빛을 반짝이며 애원했다.

“이곳을 지켜라. 바그로바.”

그러자 칼의 명령에 곧장 날카로운 눈매를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역시 노빌레 레오네의 주인답군.”

에르바는 피식 웃어 보였고, 이곳에 남아 병장기를 관리해주기로 한 슈미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밀란을 쳐다봤다.

“힘내라. 이 악물고 버티면 참을 만해.”

“네?”

뜬금없는 그의 동정 어린 말에 밀란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슈미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쿠라빌 전력으로 간다.”

히이이잉!

칼의 명령이 떨어지자, 쿠라빌은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두그닥! 두그닥!

그 속도는 가히 쏜 살이라고 할 만했다.

갑작스런 사냥감의 등장에 킬러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쫓아왔지만.

거리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나중에는 그 집요한 킬러비들조차 사냥을 포기하고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쿠라빌의 질주에 공포를 느낀 밀란의 비명 소리가 파라디스 숲 전체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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