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스윽, 스윽.
빠르게 확산한 마력이 지그재그로 지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는 허공에까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단숨에 베르데를 덮치려고 했다.
쇄액!
베르데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을 피하며 생각했다.
‘살상 능력은 존재하지 않아. 일반적인 마법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대체 이 기술의 용도는 뭐지?’
경계는 하되 공세를 멈추지는 않았다.
꽈아아악!
베르데는 쉼 없이 발을 굴리면서도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뭐, 뭐야?!”
서킷에서 피어오른 강대한 붉은 마력에 휩쓸린 베르데는 엉거주춤 발을 멈췄다.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지?’
불길한 직감이 등골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무류의 화신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그는 머릿속의 잡념을 잠재우고 어렴풋이 신형이 드러난 칼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거리는 약 900미터.
이 거리에서 표적이 된 대상은 ‘무류의 화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죽기 마련이다.
베르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윽.
“거기군.”
칼이 대수롭지 않게 그의 위치를 간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발각당했어?!’
깜짝 놀란 베르데는 즉각 화살을 쏜 뒤, 나뭇가지의 탄력에 힘입어 도약했다.
카앙!
그와 동시에 칼은 화살을 비어벨로 튕겨내며 베르데의 신형을 쫓기 시작했다.
* * *
서킷의 활용은 무궁무진했다.
창조에 대한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나 활용에 있어서만큼은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칼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좋은 패였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말이다.
우웅!
발밑과 허공에 그려진 붉은 마력의 실루엣.
쿵, 쿵!
서킷은 마치 맥박이 뛰는 것처럼 붉은 마력이 일정하게 흘렀다.
반경 1km의 범위를 뒤덮은 서킷.
서킷에 주입한 마력은 나가았다가 다시금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온 마력에서 묻어나온 다른 마력의 흔적을 통해 주변 환경과 적의 위치를 특정한다.
이것은 마력에 예민한 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맥캘리가 같은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림잡아 어디에 뭐가 있다 정도가 구분이 가능할 뿐이지,
칼처럼 정확하게 식별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얼마 안 가 칼은 진녹색의 진한 마력을 잡아냈다.
‘에클라 세트라는 이점이 너에게는 오히려 독이 됐군.’
다른 사람과는 다른 성운 같은 기운을 띠는 마나.
이 마나의 주인은 물론 베르데의 것이었다.
번뜩!
눈을 뜬 칼은 그 기운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이제 막 시위를 당기는 베르데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군.”
“?!”
크게 놀란 베르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즉각 사라졌다.
카아앙!
칼은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을 비어벨로 튕겨낸 뒤, 즉각 발을 박찼다.
우웅!
아직까지 칼의 탐지 방법을 눈치채지 못한 베르데는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단숨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아냈다.
화살은 마치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 양이 여러 명의 엘프가 한꺼번에 화살을 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카카카카캉!
칼을 그것들을 모조리 쳐냈다. 그럼에도 그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피잇! 피잇!
그 와중에도 몇 발은 칼의 몸 구석구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미 승기를 다잡았다고 생각한 칼의 표정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칫!”
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버리자, 자존심이 상한 베르데는 화살에 오러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늦었어.”
콰칭!
칼이 손목에 착용했던 팔찌가 끊어지며, 터져 나온 붉은 마력의 파장이 베르데의 오러를 흐트러뜨렸다.
“……마나 브레이크?!”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덮인 베르데는 미처 반격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퍼억!
칼은 그대로 주먹을 말아 쥐어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쿵!
우악스런 그 힘에 베르데는 다시 한번 나무 기둥에 등을 부딪쳤다.
“크윽! 네놈!”
아랫입술이 터져 피를 흘린 베르데는 즉각 반격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푸욱!
그 순간 베르데의 얼굴 옆으로 비어벨이 꽂혔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다시 놓아줄 수도 있는데.”
칼의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베르데는 분한 듯 몸을 떨었다.
생살여탈권을 빼앗겼으니, 확실히 패배한 셈이었다.
여기서 궁색한 핑계를 대고 다시 싸운다고 해도, 그의 긍지를 훼손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졌다.”
그래도 어지간히 인정하기 싫었는지, 베르데는 인상을 왈칵 찌푸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상황이 어느 정도 종결된 것을 본 엘프 장로 에르바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승부가 끝난 듯싶구나. 설마 베르데가 지다니…….”
엘프 최강의 실력자인 베르데가 당했다는 사실에 에르바는 상당히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의표를 찌르기는 했지만, 방심해서 진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점에서 지금의 전투를 분석하고 결과를 내놓았다.
“그래서 이 오밤중에 왜 갑작스럽게 시비가 붙었는지 알고 싶군.”
손님에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는 에르바의 질책 어린 시선에 베르데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이 녀석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칼이 먼저 그에게 답했다.
베르데를 이긴 실력 때문인지, 에르바는 낮에 봤을 때보다 호의적인 시선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어떤 제안을 말하는 거지?”
에르바의 반문에 칼은 베르데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사건 범인은 잡아 오겠어. 덤으로 이 벌떼들을 세상에서 지워주지.”
울컥!
베르데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칼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게 쉬웠으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도 않았어. 그리고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지?”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제안이 있다고 했잖아.”
“제안?”
“파르테스로 와라.”
“…….”
이 와중에도 유학을 권유하는 칼의 말에 베르데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칼은 비아냥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겁이 나는 거냐? 에클라 세트.”
울컥!
짜증 나는 놈.
어떤 일이든 자기 위주로 해석하고, 그것이 잘못되었을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파라디스에서 살아오면서 여러 인간을 마주했었으나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처음인지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재수 없는 놈.’
한없이 미운 말만 나왔으나, 그래도 은연중 인정한 상대였기 때문에 베르데는 어느 정도 고집을 버렸다.
“베르데다.”
“응?”
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자, 베르데는 목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베르데! 그게 내 이름이야! 에클라 세트라고 지칭하지 마! 만약 네가 스스로 내건 조건을 해낸다면, 얼마든지 유학을 가주지.”
“?!”
베르데의 선언에 에르바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모처럼 큰 결정을 내린 아들의 의사를 번복할 생각이 없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씨익.
칼은 얄궂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다면 하는 남자다. 베르데.”
* * *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칼과 단둘이 남은 에르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꺾지 못한 베르데의 고집을 꺾다니 정말로 놀랐다네.”
“반대 안 하시는 겁니까?”
에르바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베르데가 숲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네. 목적과 의도 또한 선하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끌던 에르바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베르데가 어디 가서 쉽게 지고 올 아이가 아니거든.”
그 모습은 아들 자랑을 하는 팔불출 기질이 살짝 엿보였다.
“하긴.”
칼은 그 모습에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공감을 표했다.
뒤늦게 슈미트를 통해서 베르데가 얼굴도 알 수 없는 전설의 엘프 ‘무류의 화신(infalible simbolo)’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다리와 팔에 입은 부상은 모두 베르데가 입힌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데를 파르테스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파라디스에 킬러비를 푼 범인을 잡아 온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유학에 관한 건 엘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하지. 그리고 킬러비를 푼 범인을 잡아 오는 것은 엘프를 위한 일이고.’
에르바는 칼에게 돌아오는 이득에 비해 엘프가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고는 칼에게 말했다.
“우리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을 하겠네.”
“딱히 필요 없는데요. 여기 있는 애들 몇 명만 끌고 가면 됩니다.”
“…….”
여전히 무례하면서도 괴팍한 친절에 에르바는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나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은원 관계에 대하여 신중하다네. 그리고 마냥 자네의 도움만 받을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아.”
“…….”
에르바의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한 칼은 곧 태세를 전환했다.
“알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에 에르바는 만족한 미소를 띠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이 아이와 동행하게. 킬러비를 잡는 일에 충분한 도움이 될 걸세.”
“동행이요?”
칼이 불편한 듯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을 때였다.
저벅저벅.
에르바의 뒤편에서 밀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물쭈물 칼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떻게든 당당하게 보이려는 그 모습이 살짝이지만 귀엽게 느껴졌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칼리언트 님.”
“어째서 이 꼬맹이를?”
칼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에르바를 슬쩍 곁눈질했다.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심인 듯싶었다.
“이 아이는 킬러비의 특색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다네. 냄새나 그 최초 근원지에 대해서 말이야.”
확실히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면 동행하는 것도 좋겠다고 칼은 생각했다.
“그렇다면야.”
그런 의미에서 칼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에르바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을 잊었군. 내 딸이 조그만 것은 맞지만 나이로 치면 자네보다 연상일걸세.”
“…….”
불편한 진실을 들은 칼은 드물게 입을 꼭 다물었다.
전생을 포함한다면 나이로는 밀란을 커녕 에르바 역시 어린애와 같았다.
그러나 환생을 한 그의 지금 나이는 열여섯에 불과했다.
“아, 아버지?!”
하지만 놀란 것은 칼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나이가 공개될 상황에 놓인 밀란이 안절부절못하며 에르바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바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나이는 말일세…….”
에르바는 밀란이 들리지 않게끔 작게 속삭였고, 그걸 들은 칼은 입을 쩍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뭐라고 한 거야!!’
괜스레 초조해진 밀란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탁.
그러자 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에르바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뉘앙스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하,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아버지!!”
결국 참다못한 밀란은 얼굴을 화끈 붉히며 에르바에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