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90화 (90/197)

#제90화

파라디스에 위치한 엘프들의 마을은 산맥과 초목이 우거진 곳에 있었다.

맑고 푸른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은폐에 적합했고 경치 또한 일품이었다.

엘프들의 장로, 에르바의 자택.

“크하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에르바!”

그의 집에 당도한 슈미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은발의 남성 엘프에게 다가갔다.

“하하하하. 이제 수염도 달리고 제법 어른 같구나.”

에르바는 슈미트를 끌어안으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겉보기에 더 늙어 보이는 건, 슈미트 쪽인데.’

칼은 마치 아이 다루듯 슈미트를 대하는 에르바의 모습이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칼의 시선을 눈치챈 에르바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나이는 770세라네.”

“그렇습니까.”

무덤덤한 반응이었지만, 칼은 자신의 속마음을 간파당했다는 것에 살짝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에르바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늘어나는 건 눈치 보는 것밖에 없거든. 그나저나 그쪽이 날 보자고 우리 아이들을 협박했다고 들었는데.”

‘과연.’

부드러우면서도 묘하게 날이 선 어조였다.

칼은 불쾌함보다는 에르바의 관록에 다시 한번 감탄을 했다.

루드거 슈타크가 위풍당당하다면, 에르바는 태풍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갈대 같은 여유와 쉽사리 부러지지 않는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갱생 중인 칼에게 필요한 덕목을 이 남자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

칼은 그런 에르바에게 속으로 경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협박이 아니라 조금 억지를 부려본 거죠.”

울컥!

칼의 대답에 뒤에 서 있던 베르데가 쌍심지에 불을 켰다.

“하긴 그것도 그래. 구해준 사람을 몰아붙이면서 활을 겨누는데, 화가 안 나겠냐?”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슈미트의 지적에 베르데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정황상 여동생인 밀란을 구해준 것은 칼이 맞았기 때문이다.

스윽.

에르바는 칼과 슈미트, 그리고 베르데와 밀란을 한 번씩 쳐다본 뒤 칼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단 내 딸을 구해줘서 고맙네.”

“아버지?!”

크게 놀란 베르데는 에르바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베르데. 이 이상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말거라.”

에르바가 엄격한 목소리로 제지했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잠시 후.

칼과 에르바는 단둘이서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차를 홀짝 마시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둔 에르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즉 자네가 온 이유도 파르테스란 곳에 우리 아이들을 보내 달라는 요청 때문이군.”

“그렇습니다.”

릴리가 준비한 서류를 훑어보던 에르바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회장이 훌륭한 재목이라는 것을 알겠어. 실제로 우리 아이들이 가면 이로운 영향도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더군. 하지만 세 가지 이유로 거절하겠네.”

‘어차피 한 번에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어.’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봤다.

에르바는 이번에도 칼이 반문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차별 때문이라네.”

“차별 말씀입니까?”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 의식과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생기는 거지. 자신들과 다른 족속이 있다고 하면 신기해서 눈이 가기도 하겠지만, 보통 우호적으로 지내기보다는 경외의 대상이 되어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겠지. 또 인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지 않는다네. 혹시나 모를 불상사는 언제든지 생기겠지. 난 우리 아이들이 상처를 받길 원하지 않아.”

‘첫 번째부터 반박 불가군.’

굳이 엘프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파벌이 생긴 마당에 그런 일이 안 생길 거라고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또 불쾌한 이야기지만 엘프의 외모에 혹한 귀족들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에르바 입장에서는 그런 위험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학을 보낼 리 만무했다.

후룩.

에르바는 다시 한번 차를 홀짝인 뒤, 두 번째 이유를 거론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한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거라네. 지금 파라디스의 생태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가까스로 그 붕괴를 막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단 외적의 습격을 철저히 차단해야 된다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이 숲에 엘프들의 적이라도 있는 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분명 인간들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외교 관료 캐로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칼은 에르바의 말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뭡니까?”

“그에 대한 후폭풍일세.”

“후폭풍이라니요?”

칼은 고개를 갸웃했고, 에르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겠지.”

*  *  *

칼은 엘프들의 마을 내부를 걸었다.

“끄윽!”

“하아, 하아.”

마을 곳곳에는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고통을 호소하는 엘프들이 한가득했다.

숫자는 거의 백 명에 달했다. 혼란스런 가운데 대다수의 엘프는 무장을 한 채 부상자들을 이동시키면서도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뭐, 뭐야? 이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괴이한 풍경에 슈미트는 크게 당황했다.

이곳에 올 때는 마을의 위치를 들키면 안 된다는 이유로 눈과 귀를 가리고 왔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진실이었다.

반면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 냄새가 난다 싶더니만. 이것 때문이었군.”

에르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행을 하고 있는 밀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그리즐리 베어에게 쫓기던 것도 치료에 필요한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정작 그 때문에 위험을 맞이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지만, 밀란은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죄송해요.”

“그래서 고귀한 수호자들을 괴롭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칼의 질문에 에브라는 말없이 뚜벅뚜벅 걷더니 파라디스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절벽 끝에 멈춰 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는 불길한 점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황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진 몸통.

몸통 끝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고 예리한 독침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붉은색의 큰 겹눈에는 흉흉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 개체가 무려 수천 마리였다.

쇄액!

투두두두둑!

엘프들이 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화살은 벌과 같은 생김새를 한 것들을 일제히 떨어뜨렸지만, 화살이 여러 발 꽂혔음에도 죽지 않는 개체도 꽤 있었다.

슈미트는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말을 더듬었다.

“저, 저건 뭡니까?!”

에르바는 증오가 섞인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킬러비. 파라디스로 들어온 교란종이지.”

*  *  *

어두컴컴한 밤.

밤이 되면 사냥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킬러비들도 깊은 잠에 빠졌다.

“끄으윽!”

“자, 자 천천히 마셔.”

슈미트는 부상 당한 엘프들을 간호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

칼은 마을 구석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그때.

“카, 칼리언트 님. 시, 식사하셔야죠.”

밀란은 곡물빵과 수프를 쟁반에 받아 왔다.

“별생각 없는데.”

“그, 그래도 드셔야 해요.”

어렵게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며 칼은 마지못해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르르릉.

곁에 있던 바그로바는 자신도 달라는 듯 얼굴을 내밀었고, 칼은 피식 웃으며 빵을 둥글게 말아 바그로바에게 건네주었다.

밀란은 허겁지겁 먹는 바그로바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골똘한지라 칼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만져볼래?”

“네?! 괘, 괜찮나요?”

밀란은 눈을 반짝이며 반색했다.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먹는 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바그로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시 후.

그르릉.

밥을 먹고 피로가 몰려왔는지, 바그로바는 깊은 숙면에 빠져 있었다.

칼은 그런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자신의 옆에 쭈뼛쭈뼛 앉아있는 밀란에게 말했다.

“쿠라빌을 경계했던 것은 또 이상한 게 유입될까 봐 걱정했던 거겠지.”

“……네, 맞아요.”

처음에는 우연히 한 마리가 발견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밀란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왕벌까지 숨어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뜬금없잖아요. 번식기에 접어든 여왕벌이 갑자기 연고도 없는 파라디스까지 날아와서 집을 짓는다는 게…….”

“킬러비가 들어오게 된 원인을 인간이라고 보고 있는 거군.”

“……그것 빼고는 답이 없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오라버니도 인간에 대해서 치가 떨린다고 경멸하게 됐고요.”

“경멸할 만하다고 생각해.”

킬러비가 본래 서식하는 곳은 파라디스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인 알테어였다.

바로 칼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혼란의 중심지다.

몬스터들과 여러 나라의 군사들이 혼잡하게 엮이는 곳. 분쟁의 중심지인 그곳은 오히려 킬러비의 개체 수가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킬러비에 버금가는 몬스터도, 우월한 몬스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사회 근처에서는 완전히 씨를 박멸한 상황이었다.

그런 여왕벌이 머나먼 파라디스까지 와서 둥지를 튼다?

인위적인 개입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더 큰일이군.’

범인이라면 물러날 때라고 생각하겠지만.

“재밌겠어.”

칼은 씨익 웃고 있던 찰나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인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칼을 쳐다보고 있던 베르데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며 적의를 표했다.

“어떤 점이 쓸데없는 거지?”

“너희들이 하고 있는 모든 짓! 우리에게 혼란을 준 점과 벌떼를 풀어 우리를 곤란하게 한 점. 네놈들은 어떤 행위도 저지르면 안 되는 죄악의 일족이다. 유학? 가당치도 않은 소릴. 그딴 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증오감이 섞인 그의 눈을 보며 칼은 곧장 반박했다.

“킬러비들의 소행이 인간의 짓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는 것은 네놈의 터무니없는 억지다. 엘프.”

꽈악!

베르데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자신의 주장이 억지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칼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군. 그렇기에 변화에 대응하지도 못하는 거고, 이번처럼.”

움찔!

칼의 말에 베르데와 밀란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밀란은 칼의 말에서 어떤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인간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이번 재난을 잘 막아내도, 너희들은 다음에 또 다른 인간의 탐욕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될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네놈들은 안주하는 게 아니라 도태되고 있다는 거지.”

“……닥쳐.”

베르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살벌하게 경고를 날렸다.

칼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슬며시 몸을 일으켜 베르데와 대치했다.

왜일까?

눈높이는 얼추 비슷했지만, 칼의 시선이 묘하게 베르데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인간 사회를 배워야 하는 거다.”

“네까짓 게 뭔데…….”

툭.

칼은 베르데의 말을 끊고 주먹으로 살포시 가슴을 때리며 말했다.

“부정하고 싶으면, 한번 붙어보면 되잖아. 에클라 세트. 네가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그 그릇된 편견부터 깨부숴 주지.”

도발이 계속되자 이마에 핏줄이 치솟은 베르데는 분노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원한다면야.”

쇄액!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쿠크리 단검을 빼든 베르데는 칼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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