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파라디스는 수천 년을 묵은 초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파라디스를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자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엘프.
타앗!
사아악!
지금 이 순간에도 엘프 하나가 숲을 가로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체격을 보면 어린아이 같았으나, 그 몸놀림은 마치 날렵하게 비행을 하는 잠자리 같았다.
먼 옛날부터 엘프를 노예로 잡으려는 인간들이 고군분투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상대가 매우 좋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입가에 침을 겔겔 흘리며 그녀를 전력으로 쫓는 짐승은 마수인 그리즐리 베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린 그 녀석은 흉포성을 내보이며 거리를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다.
‘괜히 성급하게 다가갔다가…….’
꽈악!
엘프 소녀, 밀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깊은 후회에 잠겼다.
지금의 파라디스는 혼란 그 자체.
생태계의 질서가 크게 무너져 최상위 포식자들이 무척이나 예민한 참이었다.
어느새 밀란을 따라잡은 그리즐리 베어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꺄아아아악!”
밀란은 가까스로 그 일격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크르르르르!
잔뜩 흥분한 그리즐리 베어에게는 더 이상 인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야성이 폭발한 그리즐리 베어는 그대로 밀란을 덮치려 했다.
“오, 오라버니!”
밀란은 양손을 모으고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그닥!
콰아아앙!
느닷없이 나타난 쿠라빌이 전력 질주하던 속도 그대로 그리즐리 베어를 힘껏 들이받았다.
그리즐리 베어의 체구도 육중한 데다 특유의 근력이 있다 보니 밀려난 거리는 고작 2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히이잉!
한낮 마수가 감히 자신한테 저항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쿠라빌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힘껏 포효했다.
“어, 어째서 저런 존재가 또…….”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밀란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둡고 흉포한 기운.
쿠라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파라디스에게 이로울 게 없는 기운이었다.
크르르르르.
흥분한 상태인 그리즐리 베어는 투지를 불태웠다.
쿠라빌이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털을 꼿꼿이 세우며 전력을 다하려는 찰나였다.
저벅저벅.
그리즐리 베어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어?”
그 광경에 밀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나름 폭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저 그리즐리 베어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밀란은 무심코 등을 돌렸다.
“흡!”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심홍색의 강렬한 눈이었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은 주변의 생물들을 공포로 떨게 할 만큼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 사람 맞아?’
엘프 중에서도 유난히 상대의 기백을 잘 살피는 밀란은 강한 공포심을 가지고 칼을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어느새 칼은 그리즐리 베어 앞에 도달했다.
‘해, 해치우려는 건가?’
손에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한 그녀가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스윽.
그러나 칼은 양손을 주머니에 낀 채로 검을 빼 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 미쳤어?!’
굶주림에 흉폭한 상태의 그리즐리 베어 앞에서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배짱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칼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즐리 베어의 사념을 읽었다.
[위,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바싹 긴장한 그리즐리 베어는 칼의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두려움이 섞인 사념을 보냈다.
그러자 칼은 눈짓으로 엘프 소녀인 밀란을 가리키며 그리즐리에게 사념을 전달했다.
[다른 거 찾아봐. 건들면 죽는다.]
[아, 알겠습니다.]
칼의 경고에 그리즐리 베어는 순순히 물러나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세, 세상에.”
밀란은 집채만 한 그리즐리 베어가 겨우 한 인간의 기백에 짓눌려 도망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
보고도 믿기지 않은 장면에 밀란은 잠시 침묵했다.
‘어,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정황상 도와준 것 같기는 한데, 근래 흉흉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밀란은 섣불리 칼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도, 도리는 지켜야 된다고 오라버니가 말했으니까…….’
심호흡을 한 밀란이 어렵게 입을 뗐다.
“도,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제 이름은 밀란이라고 해요.”
“칼리언트.”
짤막한 대답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려고 할 때.
갸르르릉.
뒤늦게 쫓아온 바그로바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칼의 다리에 얼굴을 문댔다.
스윽.
그리고 칼은 어김없이 발로 바그로바를 밀어냈다.
“노, 노빌레 레오네?!”
바그로바의 정체를 알아본 밀란은 크게 당황했다.
노빌레 레오네.
개체 수가 너무 적어 평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최고 등급의 신수를 설마 여기서 볼 줄이야.
바그로바를 살피던 밀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의 품성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지만 주인의 성품과 영향을 받은 신수는 주인의 안 좋은 성향도 물려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걸 감안해서 볼 때, 바그로바는 애교 많고 장난기가 다분한 어린 사자였다.
결코 악한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라, 밀란은 쭈뼛쭈뼛하며 입을 열었다.
“카, 칼리언트 님.”
“왜?”
“여, 여기는 위험해요.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릴 테니까. 얼른 나가시는 게 좋아요.”
“난 너희를 보러왔다만?”
“네?”
갑작스럽게 용무를 밝히기 무섭게…….
쇄액!
귓가에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크르르르!
그러자 바그로바는 갑작스럽게 이빨을 내세우더니 전신에서 붉은 마력을 내뿜었다.
크아아아앙!
이어서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켰다.
“마, 마나 브레이크?!”
우우우우웅!
인상이 찡그려질 만큼의 강렬한 파장과 함께 칼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모조리 우그러지더니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지켜주는 건 가상하다만, 힘 조절은 해야지.”
칼은 한숨을 쉬더니 검지를 말아 바그로바의 머리를 툭 쳤다.
“그래서 내 이마를 꿰뚫으려고 한 건방진 놈은 너냐?”
칼은 심기가 안 좋아졌는지, 멀찍이서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엘프를 노려보았다.
짙은 녹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성의 눈빛은 적의로 가득했다.
“밀란에게서 떨어져라.”
“오, 오라버니.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이분은 절 도와주셔서…….”
“밀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인간을 믿지 말라고.”
스슥! 스슥!
남성의 말과 함께 초목 곳곳에서 망토를 두른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칼을 향해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형을 갖춘 그들의 끝이 뾰족한 귀는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위협적인 정령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이런 엘프들이 인간처럼 번성했다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었을 터다.
아무도 환대해주지 않는 분위기.
‘이렇게 적대 받는 것도 오랜만이군.’
칼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사실 그럴 때마다 칼의 결정은 간단했었다.
타협도 협상도 없으며 누구 한 명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겨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릴리를 대신해 온 상황이었다.
“……갱생은 어렵군.”
칼은 작게 한숨을 쉬며…….
타악!
허리에 착용하고 있던 비어벨을 바닥에 던졌다.
“대화를 좀 하고 싶다만.”
그는 저항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내비쳤다.
웅성웅성.
주변 엘프들이 약간 동요하기 시작했다.
밀란의 오빠로 추정되는 엘프는 눈매를 좁혔다.
“이 신성한 곳에 부정한 종을 들여놓은 건 네놈이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투레질하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쿠라빌이 있었다.
“쿠라빌.”
칼이 부르자 쿠라빌은 곧 적의를 거둬들이고는 몸을 영체화하여 모습을 감췄다.
“수상한 종이라니. 무슨 소리지?”
“뻔뻔하긴!!”
“오, 오라버니 진짜 아니에요.”
당황한 밀란이 어떻게든 그를 만류해보려고 했으나, 그보다 한발 먼저 짙은 녹빛의 마력이 엘프의 몸 바깥으로 방출됐다.
성운 같은 반짝임을 지닌 마력.
“……에클라 세트?”
또 한 명의 천재를 목격한 칼은 그제야 이실리아가 파라디스와 화친을 맺으려는 이유를 깨달았다.
4년 전부터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생각하면, 그쯤부터 재능을 드러냈음이 분명했다.
흥미로움이 솟구쳤지만, 칼은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들은 무례하군.”
“무례?”
칼은 팔짱을 끼며 엘프들에게 말했다.
“나는 에르바랑 대화를 하러 왔다. 내 고집은 제법 완강하니, 무조건 들어 줘야 할 거야. 거절한다면, 여기에 있는 꼬맹이는 못 보낸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 잠깐만요.”
어느 순간 자신이 인질이 된 것을 깨달은 밀란은 혼란스러움에 결국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 도망가야 하는 건가?’
밀란이 칼의 눈치를 살필 때, 그녀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것을 간파한 칼은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얌전히 있어.”
“네, 네!”
그 말에는 묘하게 힘이 있어 밀란은 옴짝달싹 못 했다.
갸릉!
그걸 또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바그로바는 풀썩 바닥에 드러누우며 시체 흉내를 냈다.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그로바에게 말했다.
“그건 죽은 척이잖아.”
평소에 레인은 매를 길들이는 일 외에도 바그로바에게도 몇 가지 훈련을 시키는데, 주로 ‘가만히 있어.’와 ‘죽은 척’, ‘손’ 등의 간단한 명령을 내리고서 먹이를 주면서 길들였다.
여기서 바그로바는 ‘가만히 있어.’가 아닌 ‘죽은 척’ 흉내를 낸 것이다.
‘귀, 귀여워!!’
바그로바의 엉뚱한 행동에 밀란은 자신도 모르게 바그로바에게 매료돼 버렸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던 밀란의 오빠는 급격하게 분노했다.
“무례한 건 네놈이잖아!!!”
그는 강렬하게 분노하며 시위를 당겼지만.
“쏘게?”
칼은 오히려 쏴보라는 듯 그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도발적인 자세에 칼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뻔뻔한 인간은 또 처음이라 다른 엘프들 역시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칼의 뒤로 다른 인기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워해머를 매고 있던 슈미트는 질렸다는 기색으로 칼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허억, 허억. 너는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진 거냐? 뭐 이렇게 겁이 없어.”
“그냥 사는 거지.”
“으휴.”
칼의 대답에 슈미트는 어이가 없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웅성웅성.
그를 지켜보던 엘프들이 서로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클라 세트로 추정되는 사내 역시 슈미트를 보더니 놀란 나머지 손에 힘을 풀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슈미트.”
“응? 너 설마 베르데냐?! 하하하하하 만나서 반갑다. 이것들아!!!”
주변의 엘프들을 한 명씩 살펴보던 슈미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들과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