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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88화 (88/197)

#제88화

릴리는 몽롱한 상태로 업무을 보다가 결국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머리는 감고 잔 건지, 어디서 자고 있는지, 여러 생각이 오고 갔지만.

새근새근.

이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안 가 눈앞에는 붉은 노을이 펼쳐졌다.

릴리는 이것이 꿈이라는 건 자각했지만,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놓고 바라봤다.

붉은 노을에 젖어 든 황야.

저벅저벅.

거기엔 심홍색의 머리칼을 지닌 소년이 해가 저무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수사자가 쫓고 있었다.

이것은 미래의 풍경인 걸까?

릴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칼.”

스윽.

릴리의 말에 소년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 밑에는 그늘이 졌지만, 슬쩍 입꼬리를 올린 그 모습은 분명 칼이었다.

저벅저벅.

칼은 다시금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어, 어디 가!”

당황한 릴리는 손을 뻗어 칼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칼은 어느새 사라졌다.

“가지 마!”

묘하게 현실감이 있는 꿈을 꾸던 릴리는 결국 잠에서 깼다.

“어디 안 간다.”

“어머, 릴리 깼어?”

“하아, 하아.”

놀란 표정으로 호흡을 고르던 릴리는 뒤늦게 이곳이 자신이 머무는 학생회장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책상에는 맥캘리와 에리가 그녀를 대신해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눈치 빠른 릴리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 미안.”

그 말에 에리는 얄궂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나도 부회장이니까 같이 해야지. 그리고 지금은 맥캘리 교수님이 무서운 속도로 일을 처리하고 계셔.”

촤르르르륵.

맥캘리는 엄청난 속도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빠, 빨라!”

옆에서 봤을 때는 그저 대충 보고 훑어 넘기는 것 같았다.

맥캘리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으며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 광경을 본 릴리는 한마디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게을렀던 게 아니군요.”

“게으르긴 누가 게을러! 파르테스에서 준비하는 논문의 양은 이것에 열 배 이상이고, 나는 다른 양아치 교수들이랑 달리 학생들한테 내 논문을 쓰게 하지는 않아!”

울분이 치솟은 맥캘리는 버럭 화를 냈고.

에리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조금 정정해 주었다.

“진실은 학파에 학생이 딱 한 명밖에 없으니 도와줄 일손도 없다는 거지만요.”

빠직!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맥캘리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래, 그 망할 제자!! 바빠 죽겠는데 대뜸 아침부터 찾아와서는 밥 먹고 싶으면, 일손을 거들라고 협박을 하잖아?!”

“카, 칼이 교수님을 보낸 거예요?”

깜짝 놀란 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본인이 안 오고 교수님이…….”

“왜긴 왜야? 혼자 아주 먼 여행을 떠나버렸으니까 그렇지.”

“여, 여행이요?!”

‘설마 꿈에서 본 그 풍경이…….’

릴리가 불안해하자, 에리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칼은 릴리를 대신해서 엘프들의 숲인 파라디스로 향했어. 유학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데.”

“……뭐?!”

돌아온 황당한 답변에 릴리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반문했다.

*  *  *

라흐만 대륙에는 소국의 크기와 맞먹는 거대한 숲이 존재한다.

숲의 이름은 파라디스.

엘프들이 머무는 땅은 지명이 곧 엘프들의 국가 명칭과 같았다.

본래 엘프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엘프가 살아가는 터전을 망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그들 역시 거대한 집단을 구성해 대항했다.

그 결과 인간들은 파라디스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엘프들의 기세를 깨달은 국가들은 엘프들과의 화친을 요청했지만, 엘프들의 답변은 거부였다.

화친을 요구한다는 세력들이 아직도 엘프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인간을 적대하는 건 아니었다.

우연이든 아니든 현재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더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숲의 초입에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홍색 머리칼을 지닌 남자, 칼은 머나먼 이실리아 땅에서 불과 열흘 만에 여기까지 도착했다.

간단한 외출복을 입은 칼의 가슴팍에는 기나긴 여행에 지친 바그로바가 졸고 있었다.

갸아아앙!

숲에서 나는 짙은 각종 수목들의 향기에 정신을 차린 바그로바가 기분 좋게 하품을 했다.

“이곳이 파라디스인가. 엄청나게 넓군.”

“하아, 하아. 그러니까 준비 좀 하고 가자고 했잖아! 이 자식아!!”

바로 뒤에서 칼을 뒤쫓아 온 슈미트는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것 같은 표정으로 칼을 비난했다.

칼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짐은 쿠라빌이 다 들고 오는데, 왜 혼자 고생한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짐 챙기는 건 나라고!”

슈미트는 역정을 내더니 이내 쯧 혀를 찼다.

칼과 동행을 하는 것에는 불만이 없다.

다만 여행 갈 일이 생겼다며 닥치고 따라오라는데, 사람이라면 어찌 당황하지 않을 쏘랴.

-이, 이거 다음 주까지 만들어줘야 하는데.

열심히 망치를 두들기던 슈미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칼에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럼 말든가.

칼은 즉각 그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당사자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삐져서 대화를 포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리언트 님이 따라오라고 하잖아요! 잔말 말고 따라가세요! 여기는 제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

디아나는 칼이 그냥 가버릴까 봐 두려워 슈미트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때리며 강제로 밀어냈다.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슈미트는 분노를 곱씹었다.

‘요놈 계집애. 손속만 매워가지고는 원.’

반강제로 칼과 동행하게 되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막상 파라디스의 절경을 보니 부정적인 감정이 싹 가셨다.

사르륵.

숲을 가로지르며 불어오는 바람은 폐부를 상쾌하게 했고, 산들바람에 잎사귀가 흔들리며 자아내는 고운 소리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이곳에 만나기로 한 관료는 어디 있는 거냐?”

여기까지 오게 된 사정을 들은 슈미트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칼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이실리아에서 파견을 보낸 외교 관료로 그동안 릴리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던 이였다.

칼과 슈미트가 이곳에서 기다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외교 관료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칼리언트 님 맞습니까?”

파라디스 숲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뭇한 턱수염을 잔뜩 기른 그는 키는 2미터에 육박하는 데다가 전신에 울룩불룩 근육이 두드러져 있었다. 옷 또한 숲을 탐색하기에 적합한 사냥꾼 복장이었다.

‘만나기로 한 건 2급 외교 관료인데, 웬 용병이 있는 거지?’

너무나 큰 의문이 들어 대답조차 하지 못할 때.

남자는 정중히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이실리아의 2급 관료인 캐로트입니다. 하하하, 어여쁜 학생회장님이 올 거라고 기대했는데, 직접 보지 못하다니 아쉽군요.”

“그 녀석은 바빠서 말이지, 내가 대신 교섭하러 왔어.”

“흐음.”

캐로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칼을 유심히 살폈다.

외교 관료인 자신도 엘프들과의 교섭에 실패했다.

그런데 과연 이 남자가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칼의 눈빛에는 점차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캐로트는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하하하, 이것 참 반갑습니다, 칼리언트 님. 작년에는 파르테스에 엄청난 활약을 벌여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 기백이 놀랍습니다. 하하하, 잠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파라디스에서 나는 유명한 작물을 한 번 시식해보겠습니까?”

캐로트는 어깨에 짊어지고 온 자루를 열어 자주색 빛을 띠는 과일을 꺼냈다.

“……그건?”

“리르라는 열매입니다.”

들고 있던 단검으로 리르를 두 갈래로 쫘악 가른 캐로트는 열매의 반쪽을 칼에게 건네주었다.

킁! 킁!

열매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에 심취한 바그로바는 칼이 입을 대기도 전에 먼저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반짝 눈을 빛내며 허겁지겁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

과즙이 얼굴과 옷에 튄 칼은 가까스로 짜증을 견디며 바그로바를 바닥에 내린 후 남은 열매를 건네주었다.

바그로바는 허겁지겁 그것을 섭취하기 시작했고, 캐로트는 칼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리르의 과즙은 염료로도 쓰입니다. 물이 들면 잘 지워지지 않죠. 저한테 옷을 주시면 색을 빼서 돌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버리면 돼.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뭡니까?”

칼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곳에 파견된 지는 얼마나 됐지?”

“대략 4년쯤 되는군요. 모든 국가와 중립관계를 유지하는 이실리아는 파라디스와도 관계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든요.”

“그것뿐이야?”

“네? 어떤 말씀이신지…….”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돼. 4년이란 시간은 너무 애매하지 않아? 정성을 들였다기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서.”

“……?!”

정곡을 찔렸는지, 캐로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업무 비밀이기 때문에 누설하기 어려웠던 캐로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쓸데없는 대화는 완전히 생략하기로 했다.

“…….”

너무 생략한 나머지 정말 말이 없어지기까지 했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칼이 그에게 버럭 화를 냈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대화를 끊자는 게 아니잖아!”

“크흠! 시, 실례했습니다.”

손님을 눈앞에 두고 이런 결례를 벌이다니…….

캐로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진심으로 사과를 전했다.

뒤에서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슈미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은근히 사람 먹이는 재주가 있네.”

“크흠!!!”

괜스레 민망했는지, 캐로트는 헛기침을 크게 하여 슈미트에게 주의를 주고는 칼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현재 엘프들과 교류하는 건 힘들 듯싶습니다. 그쪽이 지금 무척이나 예민하거든요.”

“어느 정도인데?”

“숲에 인간이 들어오면, 일단 화살부터 쏠 겁니다.”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의 마찰을 자제하는 엘프가 그 정도로 경계심을 높인다는 것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칼은 얼마 안 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숲에 엘프들의 적이라도 있는 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분명 인간들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게 뭐지?”

“그건…….”

캐로트가 대답하려는 찰나.

“꺄아아아악!”

숲 부근에서 엄청난 크기의 비명이 들렸다.

“?!”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당황한 캐로트와 슈미트가 비명이 들려오는 숲을 쳐다볼 때였다.

“……쿠라빌.”

칼은 근엄한 목소리로 한 쿠라빌을 불렀다.

화르르르륵!

히이이잉!

푸른 불꽃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쿠라빌은 곧장 비명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힘껏 질주했다.

그리고 칼 역시 숲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갸르르릉!

그 뒤를 바그로바가 어김없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칼을 쫓아가자, 당황한 캐로트는 즉각 칼을 만류했다.

“제 경고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화살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귀찮지만, 내가 일단은 기사가 될 사람이거든.”

“예?”

이 무슨 뜬금없는 답변이란 말인가.

캐로트가 당황해 휘둥그레 눈을 뜨자, 슈미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여자와 아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거야. 이상한 곳에서 성실하기는.”

피식.

슈미트는 말과는 달리 그런 칼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같이 가!”

그러다 이내 곧장 짧은 발을 박차며 칼을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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