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마상창 시합은 많은 볼거리와 묘미 덕분에 군중들에게 각광을 받는다.
말 위에서 펼쳐지는 기세 싸움.
특히 기사들이 펼치는 마상창 시합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인기가 많은 만큼 도박이 성행하기도 했다.
시합의 룰은 간단했다.
몸통을 맞히거나, 상대의 창을 부러뜨리면, 1점이 주어진다.
상대의 투구를 맞히면 2점, 상대를 낙마시키면 3점이 주어진다.
이렇게 10점의 점수를 먼저 획득한 측이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칼과 데제스의 마상창 시합에 군중은 입을 벌린 채로 넋을 놓고 있었다.
콰아아앙!
시합장 내부에서 붉은색의 마나와 백색의 마나가 뒤엉키며 서로를 밀어내었다.
그 파장은 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찌릿!
두 사람의 마나에 노출된 관중들은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고통마저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만큼 칼과 데제스의 마상창 시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면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정신없이 울려 퍼졌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시합이 펼쳐지는 곳을 보면, 백색과 적색의 빛이 서로 뒤엉키며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칼의 창이 데제스의 머리를 향해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카앙!
이에 당할세라.
데제스는 손잡이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다음 신속히 고삐를 틀었다.
주르르륵.
타아아악!
그 움직임에 맞춰 크루델은 발굽이 지면 위를 미끄러지며 자연스럽게 데제스에게 유리한 거리를 확보했다. 크루델의 행동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낭비도 없었다.
스윽!
그 상태로 데제스는 다시 한번 랜스를 내찌를 준비를 취했고.
그것을 용인할 생각이 없던 칼은 쿠라빌을 접근시켜 그 움직임을 방해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랜스끼리 부딪치며 격렬한 파장이 터져 나왔다.
주륵.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모리스는 팔짱을 낀 상태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미 교관의 수준을 벗어났어. 이미 한 국가에서 비대칭 전력으로 인정받을 수준이야.’
비대칭 전력, 그것은 다른 말로 소드 마스터를 의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소드 마스터인가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삐질삐질.
때마침 모리스의 옆에서 리자크 교관 역시 이마에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고 있었다.
파르테스의 검술 교관으로 채택된 남자이지만 이제는 칼과 데제스로 인해 존재감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쓸모가 없군.”
모리스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갑작스러운 험담에 리자크는 버럭 화를 내며 모리스를 쳐다봤지만.
모리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경기에 집중했다.
“끄응.”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됐는지.’
화낼 기력도 잃은 리자크는 다시 칼과 데제스의 시합으로 눈을 돌렸다.
같은 경기를 봐도 누군가의 눈에는 단순히 경외가 실리지만.
냉철하게 경기를 분석하는 눈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관찰과 분석에 대해 최고의 재능을 지닌 맥캘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특기를 살리고 있었다.
‘힘과 속도는 쿠라빌이 약간 우세하지만, 세밀한 움직임과 방향 선회는 크루델이 뛰어나.’
칼은 계속해서 몰아붙였고, 데제스는 그 공격을 막아내며 틈이 보일 때마다 반격했다.
격렬한 공방전에서 두 사내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우직!
어느새 칼과 데제스의 충돌로 지면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주춤!
그로 인해 갈라진 땅에 발을 잘못 내디딘 쿠라빌은 균형이 미세하게 무너졌고.
데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위험해!”
깜짝 놀란 맥캘리가 소리치기 무섭게 데제스의 창이 칼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투구를 박살 내버렸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칼은 몸을 힘껏 젖히고 있었는데.
움직이기도 어려운 그 자세로 그대로 랜스를 내찔러 데제스의 투구를 부숴버렸다.
찌릿!
서로를 직시한 두 사내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창을 끌어당겨 찌를 자세를 취했다.
서로의 급소까지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자칫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관없다는 듯이 두 남자는 그대로 창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서킷이 펼쳐지더니…….
파직!
서킷 끝에서 체인 라이트닝이 번쩍였다.
“?!”
당황한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콰아아아앙!
“?!”
갑작스럽게 쏘아진 일격에 두 사람은 고삐를 틀어쥐어 겨우 전격을 피해냈다.
차분하게 호흡을 고른 칼은 곧 관람석 쪽에 있는 자신의 스승, 맥캘리를 쳐다봤다.
찌릿!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에 맥캘리는 팔짱을 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적당히 하지? 동아리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지나치다는 생각 들지 않아?”
그녀의 손끝은 경기장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쩌적!
쿠라빌과 크루델의 정신없는 질주로 지면에는 김까지 피어오르고 있었고.
칼과 데제스의 충돌로 인해 엉망진창으로 쪼개져 울퉁불퉁한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웅성웅성.
흥미진진하게 시합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위험했었다는 것을 자각한 듯 보였다.
맥캘리는 두 사람의 시합에 정신이 나가 엉덩방아를 찍고 있는 심판을 대신해 판정을 내렸다.
“두 사람 다 잘했어. 2대 2로 무승부야.”
데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교수님께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어쩔 수 없죠. 다음을 기약하지.”
“흥!”
칼은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며 데제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칼은 릴리가 전날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데제스가 글라우벤 학파로 이적한 진짜 이유는 아마 게스턴 비블리오에 다다르기 위해서일 거야. 학생들 중 게스턴 비블리오를 접할 수 있는 학생은 학생회장뿐이지만, 사실 방법이 하나 더 있거든.
그 방법은 다름 아닌 글라우벤 학파의 교수인 스냅치 교수의 추천장을 받는 것이었다.
추천장을 받은 학생은 학생회장의 동행하에 게스턴 비블리오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타 학파와의 명백한 차별이 아니냐며 비난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글라우벤 학파는 여타의 학파와 달리 종교적 색채도 강한지라 ‘세계의 진실’이나 ‘근원’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만약 내가 믿는 신이 없는 존재라면?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게스턴 비블리오는 곧 신성모독의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파르테스의 여덟 학파는 글라우벤 학파에만 예외를 두었다.
대신에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글라우벤 학파의 대표는 게스턴 비블리오와 관련하여 결코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스냅치 교수의 추천을 받는 이는 이런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규칙은 꽤 오랜 세월 동안 쓰이지 않은 규칙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중에서 게스턴 비블리오에 대해서 아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데제스는 이 교묘한 점을 파고들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렸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새로운 부하들을 선정하고.
학생회장인 릴리의 입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이제 스냅치 교수의 추천장만 받으면 모든 게 데제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같잖아.’
칼은 릴리가 말한 가설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릴리는 너무나 우수해 가끔 간단한 진실을 놓칠 때가 있었다.
피식.
칼은 입가에 조소를 그리며 데제스에게 말했다.
“사실 아무 목적도 없지?”
“……그게 무슨 말인지?”
칼은 눈을 반쯤 감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데제스의 눈길을 바라보았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동공에는 흉악한 어둠과 호기심, 희열, 그리고 가소롭다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너무 쉽게 풀리니까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은 거잖아. 그러다 보니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 세계 정복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는 거고 말이야.”
“알아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아니, 없어. 너 같은 걸 갱생시켜 줄 생각도 없고 말이야.”
정작 칼도 스스로 갱생하기에 급급한 처지였다.
“그러니까 이번보다 더 큰 무대에서 만나자고.”
칼은 미소를 띠며 데제스에게 말했다.
‘누가 먼저 죽을지 보자고.’
칼의 속내를 간파한 데제스는 벌써부터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처럼 의견이 일치하는군.”
* * *
릴리가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된 지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우수한 인재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산더미 같은 업무를 해치우며 학생회를 제대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초인이라고 해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
릴리는 초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잠을 자.”
학생회장실에 들른 칼은 당연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말에 릴리는 오히려 안심이 된 건지, 피식 웃었다.
“칼은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 똑같이 대해주는구나.”
“넌 너야.”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 칼은 갓 우린 홍차를 그녀에게 내놓았다.
달그락.
그리고 레인이 준비한 딸기 케이크 역시 그 옆에 놓았다.
“?!”
잠이 확 달아난 릴리는 눈을 부릅뜨며 칼에게 말했다.
“……칼, 요리도 할 줄 알아?”
빠직!
칼은 버럭 화를 냈다.
“차 끓이는 게 무슨 요리야!”
“농담이야. 삐졌어?”
이제는 제법 칼을 다루는 게 익숙해졌는지, 릴리는 피식 웃어 보였다.
“못 말리겠군.”
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손님용 의자에 착석했다.
“흐음, 향긋해!”
홍차를 마신 릴리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칼. 저…….”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 도와줄 테니까.”
“…….”
예상치 못한 칼의 말에 릴리는 크게 당황했다.
평소에는 귀찮아 죽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도와주는 느낌인데, 이렇게 선뜻 상냥하게 나오니, 어찌할 줄 몰랐다.
“그렇게 신기한 일이냐? 널 회장으로 만들고 밀어주기로 한 건 난데 말이야.”
‘……책임감 때문이었구나.’
잠깐 실망했던 릴리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각별한 애정이 담긴 건 아니지만, 천하의 칼이 이렇게 순순히 도와주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냥 기분이 좋았다.
“역시 됐어. 혼자서 해볼게.”
잠시 후.
자리를 비운 지 한 시간이 되지도 않았건만, 릴리는 소파에 몸을 눕힌 채로 단잠에 빠져 있었다.
“…….”
칼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릴리를 쳐다보다 곧 책상에 있는 서류 더미를 들췄다.
「엘프 장로 에르바와 접촉 성공. 교육 취지와 의도를 밝혔으나,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 극도로 꺼려함. 차후 엘프와 공생하는 삶을 위해 이실리아에서도 힘을 쓸 예정.」
서류는 이실리아의 정보원에게서 온 것으로 엘프와의 교류를 추진하던 릴리가 한참 머리를 감싸고 고민한 듯 보였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파격적인 공약이지만, 성공할 확률은 미지수였다.
“이건 학생회장이 아니라 거의 외교관인데.”
칼은 새삼스레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이 가지는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여실히 깨달았다.
정작 그 권력을 쥔 당사자는 모두를 위해 홀로 고민하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오기나 부릴 줄 알지.”
칼은 그 모습이 얄미워 검지를 말아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
“으음.”
릴리는 귀찮은 듯 소매로 이마와 얼굴을 부비부비 문질렀다.
안건을 확인한 칼은 피식 웃었다.
“엘프라…… 어떤 존재일까나.”
기대된다는 듯이 중얼거린 칼은 릴리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