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갑작스런 데제스의 마상창 시합 권유.
‘몸풀기 정도로 해보자는 거군.’
사실 이 정도로 앙숙이 되면, 상대의 실력이 서로가 궁금할 터였다.
“탈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말이지.”
탁!
그렇다고 딱히 도발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어 칼은 다시 데제스에게 투구를 던졌다.
“너답지 않게 궁색한 핑계를 늘어놓는데.”
데제스는 비꼬며 칼을 도발했다.
그 말에 칼의 이마에는 핏대가 두드러졌다.
그동안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어째 이 녀석만 보면 이렇게 살심이 치솟는지…….
‘아아, 갱생은 진짜 어렵네.’
씨익!
하지만 어느 순간 칼의 입꼬리는 악동처럼 올라가 있었다.
“울지 마라.”
“그건 걱정하지 마. 난 태어나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거든.”
데제스 역시 상쾌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전쟁을 앞둔 국가 정상끼리 나누는 대화인 것 같아.’
그 긴장감에 에클라 세트인 델피나마저 심히 긴장하고 있었다.
* * *
칼과 데제스 간의 마상창 시합이 확정 났다.
파르테스의 두 정점이 시합을 한다는 소식에 단순한 연습 시합임에도 어마어마한 소란이 펼쳐졌다.
웅성웅성!
경기장으로 몰려오는 인파는 연달아 굽이치는 파도 같았다.
“칼리언트 님이 이길 거야!”
“무슨 소리야. 어딜 봐도 데제스 님이 이기지.”
칼과 데제스를 지지하는 학생들끼리 말다툼을 하며 분위기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검술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둘 다 막강하겠지.”
검술을 배우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많은 말이 오고 갔다.
데제스는 재작년 검술 대회의 우승자였다.
그리고 칼은 작년 검술 대회에서 단 한 번의 경기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이 대결의 구도는 많은 이들을 흥미진진하게 하기 충분했다.
한편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가장 많은 고생을 하게 된 이는 당연 릴리였다.
“경기장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줘.”
릴리는 학생회 임원과 요청한 이실리아의 병사들을 이용해 철저히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행사 아닌 행사가 돼버린 탓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별로 화가 안 났나 보네.”
바쁘게 움직이던 중 에리는 릴리를 살피고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왕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니, 짜증을 내기보다 열심히 하는 게 좋잖아.”
그리 말을 한 릴리는 피식 웃으며 속마음을 살짝 내비쳤다.
“그리고 나도 궁금하거든. 누가 이길지 말이야.”
마상창 시합이 시작되기 전.
의상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데제스가 칼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
데제스의 말에 칼은 눈을 감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쿠라빌.”
말하기가 무섭게 검푸른 불꽃과 함께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르르.
투레질을 하던 쿠라빌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데제스를 노려보았다.
데제스는 희열로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평한 싸움을 원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내 말도 꽤 훌륭하거든.”
히이잉!
데제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새하얀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일각수의 상징이자 신성의 증거인 뿔이 돋아있었다.
‘유니콘까지 가지고 있었군.’
게다가 보통의 유니콘과 다른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름은 크루델. 나와 함께 대륙에 명성을 떨칠 신수 중 하나야.”
싸아아아아.
서로를 마주 본 쿠라빌과 크루델은 벌써부터 기 싸움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 시합에서 보자고.”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대기실로 향했고, 크루델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칼은 그런 데제스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흑마법을 쓰면서 스스로를 성국의 차기 교황이라고 소개하는 남자. 그리고 유니콘과 그리폰을 거느리며 마검의 주인이기도 했다.
아마 이외에도 여러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칼은 데제스가 지닌 이중성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백색 어둠인가.”
하얗지만 결코 빛이 될 수 없는 남자.
그것이 칼이 생각하는 데제스푸아르, 아니 데제스 싱클레어란 남자였다.
* * *
“아직도 덜 자랐군.”
플레이트 아머를 몸에 걸친 칼은 갑옷이 헐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생각보다 멋지다고 생각하는데요?”
델피나의 칭찬에 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부는 됐어.”
“진심으로 말할 때는 좀 믿어달라고요.”
델피나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다 곧 진지한 눈으로 칼에게 물었다.
“데제스 선배도 분명 에클라 세트겠죠.”
“맞아.”
어차피 머잖아 알게 될 사실인 데다가 데제스의 비밀을 지켜줄 이유는 없었다.
“푸른 물결의 기사단장, 에릭 듀란트 경은 얼마 전 크라켄을 단신으로 해치우는 업적을 이루었어요.”
크라켄.
바다에서 서식하는 해상 몬스터로 크기가 10미터를 넘는 데다가 끈적끈적한 점액과 무수한 촉수 등으로 선박을 가격해 침몰시키는 위험한 생명체였다.
그렇기에 토벌을 하기 위해서는 수천 개의 작살을 사용해야 하는 데다가 무수히 많은 선박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육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역시 바다 위에서는 그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는 못했다.
결국 사람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 존재.
그러다 보니 자신을 과신하는 소드 마스터 중에는 크라켄의 촉수에 붙들려 바다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크라켄이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라 영리한 몬스터라는 증거였다.
그리고 에릭은 그런 크라켄의 간사한 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신으로 크라켄을 잡는 데 성공했다.
아직 에클라 세트임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에릭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벌써부터 그에게는 신창(Blitz Lanze)이라는 이명이 붙여졌다.
“그래서?”
델피나가 갑작스럽게 에릭을 언급하자, 칼은 투구를 쓰다 말고 그녀를 쳐다봤다.
“……전 선배가 에클라 세트도 아닌데, 어떻게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에클라 세트는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전설.
그들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범인을 절망시킨다.
한때 델피나는 칼리언트 역시 에클라 세트 중 한 명이 아니까 생각했지만.
이내 칼이 에클라 세트가 아님을 알고는 당황하기도 했었다.
칼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델피나에게 말했다.
“왜냐면 난 그 녀석들을 한참 뛰어넘은 존재니까. 오히려 데제스가 건방지게 내 앞에서 거만한 거라고.”
“…….”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도 강한 성격.
그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에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 남자를 선배라 부르며 쫓아다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클라 세트? 힘의 크기?
그런 것과는 관계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의 행보가 기대돼서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다.
‘왜 모두들 선배를 주목하고 있는지 알겠네.’
그 기대감에 델피나는 구태여 안 해도 될 말을 털어놓았다.
“에클라 세트 소집이 선배님으로 인해 앞당겨졌어요. 적어도 반년 안에 모임을 가지게 될 거예요.”
“그게 왜 나랑 관계있는데?”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에클라 세트가 명성을 떨치기도 전에 선배한테 주도권을 빼앗기니까요.”
에클라 세트.
각 국가에서 기밀로 취급되며 비장의 수단으로 평가받는 인물들이긴 하지만.
마냥 숨긴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잠잠하지만 각국의 지방에서는 영지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언제든 난세가 시작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클라 세트를 등장시키면, 반란을 꾀하려던 영주들도 자연히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들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수단.
하지만 칼의 등장으로 에클라 세트의 입지가 다소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에클라 세트의 전설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것은 명분과 이해득실을 따지는 각국의 왕과 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소식이었다.
델피나에게서 이야기를 듣던 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제야 지금이 긴박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가.’
나름 중요한 정보를 줬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려는 찰나.
“너의 아카데미 생활은 끝나겠군.”
“?!”
예상치 못한 칼리언트의 발언에 델피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 그게 다예요? 좀 더 심각한 게 있잖아요. 나라 대 나라 입장이라거나. 뭐 그런 거요.”
“왜 거기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데?”
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뭔가 굉장히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요.”
델피나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칼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런가.”
그러자 칼은 머리에 투구를 걸치며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피식.
그런 칼을 보던 델피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가급적이면 후배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달라고요. 저도 데제스 선배가 당하는 걸 한 번쯤 보고 싶거든요.”
“그럴 생각이야.”
대기실의 문을 박찬 칼은 안장을 걸친 쿠라빌 위에 올라타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 * *
경기장에서 칼과 데제스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히 서로의 격을 시험하는 유흥의 장.
두 사람은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와아아아아아!!!
주변의 반응은 대회를 할 때 이상으로 뜨거워졌다.
백은의 갑주를 걸친 데제스는 크루델을 타고 당당한 모습으로 중앙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멀끔한 자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맞은편에서 쿠라빌을 타고 오는 칼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적색 갑주를 걸친 채, 상대를 낮잡아 보는 오만한 시선은 군주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의 데제스를 저렇게 낮잡아 보는 것은 오직 칼리언트 밖에 없으리라.
이 대결이 모두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우와! 어떻게 저 체격에 저렇게 무거운 헤비 랜스를 들고 있는 거지?”
“저건 완전히 실전용인데.”
마상창의 본질은 명마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를 관통시키는 것에 있었다.
데제스와 칼의 랜스는 원뿔 형태로 일반 성인의 키만큼 길고 묵직해 보였다.
학생 간의 경기에서는 당연히 사용이 금지되어야 하는 무기였으나.
이 둘의 선택을 감히 금제할 수는 없었다.
본격적인 시합이 펼쳐지기 직전.
데제스는 투구 사이에서 은은한 푸른빛의 눈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단순한 놀이지만, 지기 싫은 싸움이야.”
“입만 나불거릴 줄 알았는데, 직접 나설 줄도 아네. 패기 좋은 구실을 줘서 아주 고마워.”
심홍색의 눈빛에 투지가 서렸다.
“……시작!”
묘한 긴장감을 느낀 심판은 고인침을 삼키며 곧장 시합을 개시했다.
다그닥!
두 신수는 곧장 붉은 질풍과 하얀 파도로 변하여 서로에게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이윽고 두 자루의 마상창 끝이 충돌하면서 강렬한 마나의 파장이 경기장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