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85화 (85/197)

#제85화

본래 사냥개의 역할은 사냥감을 물어뜯는 것이 아니다.

사냥개의 역할은 사냥감을 계속 쫓으며 놓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는 주인의 뜻이라면 따라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편리한 인간에게 ‘사냥개’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하지만 사냥개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면?

주인은 그 사냥개를 버려버린다.

대체할 사냥개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상황이 바로 파르테스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사냥개는 스첼레투스 학파이며, 주인은 데제스푸아르다.

데제스가 새로 선택한 사냥개는 다름 아닌 글라우벤 학파였다.

스첼레투스와는 근본이 다른 신성 마법을 연구하는 학파로써 두 학파는 서로 앙숙이었다.

실제로 글라우벤 학파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릴리에게 표를 몰아주기도 했다.

즉, 글라우벤 학파로서도 스첼레투스에서 몸을 담고 있던 데제스가 오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학생회실에서는 데제스의 학파 이적에 관해 한참 말이 나오는 중이었다.

회장 자리에 앉아있는 릴리는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임기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켜주네.”

부회장이 된 에리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데제스는 스첼레투스라는 거대한 학파를 버리고서 글라우벤 학파로 이적한 걸까? 이제와서 스첼레투스를 적으로 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도대체 속내를 모르겠어.”

릴리도 에리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너희 바보냐?”

릴리와 에리는 눈꼬리를 삐죽 세우며 동시에 칼을 노려보았다.

후룩.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파르테스는 제도상 전과가 가능하잖아. 학파 간의 경쟁 때문에 진짜로 하는 놈이 그동안 없었던 것뿐이지.”

“…….”

평소에 이실리아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에리도 그 사실에는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시선을 살짝 회피했다.

이상과 현실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는 법.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데제스는 그 한계를 무너뜨리고 혁신적인 일을 벌인 것이다.

에리의 눈치를 본 릴리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신경 쓸 것 없어, 에리. 어차피 의도가 불순하다는 건 다 알고 있잖아.”

학생회장으로서 특정 학생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미 데제스에게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기에 릴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의 말에 수긍했다.

“맞아. 그리고 한 가지 착각한 게 있는데, 녀석은 스첼레투스를 버린 게 아니야.”

“그러면?”

칼은 피식 웃으며 데제스의 악랄한 노림수에 대해 설명했다.

“스첼레투스는 오른팔인 모리스에게 맡긴 채로 본인은 글라우벤 학파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거겠지.”

“설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리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제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스첼레투스 학파와 글라우벤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쌓인 앙금과 갈등이었다.

제아무리 데제스라고 해도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비눗물을 넣으면 섞이는 법이잖아. 녀석은 자신의 색으로 글라우벤 학파를 오염시켜 정복하려는 거야.”

오싹!

“…….”

칼의 말에 에리는 소름이 끼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데제스의 악의가 파르테스 곳곳을 헤집는 것 같았다.

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이번 투표와 관련이 있겠지.”

두 후보 중 표가 제일 많은 후보에게 한 학파의 표를 몰아주는 승자독식제의 투표방식.

데제스는 이번 투표 결과로 인해 파르테스의 움직임이 달라질 것을 확신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만약 데제스가 스첼레투스 학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것처럼 글라우벤 학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릴리아나의 입지가 깨질 수도 있었다.

“역으로 체크메이트를 당한 건가.”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칼은 짜증이 났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연쇄적으로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군.’

데제스와 지략전에는 타국과 외교를 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릴리는 데제스의 행동에 숨겨진 또 다른 목적을 간파했다.

“무슨 소리야?”

칼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파르테스 아카데미의 교칙에 대해 살펴보던 릴리가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데제스가 노리고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아.”

“그게 뭔데?”

에리가 짐작이 가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릴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게스턴 비블리오.”

*  *  *

‘재능의 싹이란 뭐지?’

글라우벤 학파의 대표인 리브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수려한 외모의 남자.

그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었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학파의 수업은 교양 과목 중 하나인 미술이었다.

가문을 계승하길 포기한 시간 많은 귀족들이 이 길로 접어들기도 하는데, 이따금 나오는 천재들이 만든 작품은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와아아!”

“저렇게 완벽하게 표현할 줄이야.”

“저건 무조건 수만 골드는 할 것 같은데.”

스윽, 스윽.

모두의 찬사가 터지는 가운데.

데제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순고한 표정으로 검을 들고 있는 여신 이실리아였다.

풍요와 정의를 관장하고 있는 이 여신은 검술 축제의 기원이기도 해서 세계 곳곳에 이름을 떨쳤다.

글라우벤 학파는 대개 신앙심이 깊은 학생들이 많이 소속돼 있었다.

그들은 명화나 예술품 등으로 신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교양 수업을 많이 들었다.

“이건 완벽한 예술이야.”

데제스의 그림을 지켜보던 지도 교수는 수업 중이라는 것마저 미처 망각한 듯싶었다.

“데, 데제스 님. 이것도 한 번 그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것도요.”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교단과 관련된 것들을 그려달라고 간청했다.

“시간이 된다면.”

데제스는 상쾌하게 웃으며 거부했다.

“…….”

글라우벤 학파의 학생들은 그의 매혹적인 미소에 빠져들었다.

오싹!

그걸 지켜보던 글라우벤 학파의 대표 리브스는 오한을 느꼈다.

학생들은 데제스가 스첼레투스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은 듯 보였다.

그리고 대표인 그의 영향력 또한 상당수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리브스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수업을 듣지 않기로 유명한 데제스가 착실하게 글라우벤 학파의 수업에 참가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던 스첼레투스 학파의 학생들과 거리를 두면서까지 말이다.

학생들의 요구를 정중하게 거절하던 데제스는 어느새 리브스에게 다가왔다.

“다음 수업, 함께 가시죠?”

데제스의 정중한 요구에 리브스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 편하게 해. 같은 3학년이잖아.”

“월반을 하긴 했어도 경우는 지키거든요.”

“나한테는 안 지켜도 돼.”

“그럼 그렇게 할까?”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철저하게 날 이용하고 있군.’

리브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데제스의 뒤를 따랐다.

언젠가 자신 역시 스첼레투스 학파의 무리처럼 데제스를 추종하게 되지 않을까?

그는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속 한 곳에서는 이미 데제스를 인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괴감에 빠졌다.

*  *  *

글라우벤 학파로 이적한 데제스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무렵.

데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고민하던 칼이 말했다.

“나도 다른 학파로 이적해버릴까?”

“그 학파가 어디야? 가기만 해봐. 내가 가서 아주 뒤집어 버릴 테니까.”

푸욱!

칼과 같이 걷던 맥캘리가 푸딩을 포크로 찌르며 파르르 떨었다.

“……그거 굳이 밖에서 먹어야 하는 거야?”

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맥캘리를 쳐다봤다.

“푸딩은 사랑이다!”

맥캘리는 다시 한번 소리치며 포크로 푸딩을 꼭 눌렀다.

주륵.

접시로 떨어지는 잼이 묘하게 흐르는 피 같기도 했다.

칼은 그녀의 말에 솔직하게 답변했다.

“내가 만약 이적하면 아마 스첼레투스겠지.”

“음. 저 뭐 있잖아. 사실 나도 네가 그쪽 분야에 굉장히 어울린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는데 말이야.”

당황한 나머지 맥캘리는 땀을 뻘뻘 흘렸다.

툭!

칼은 검지를 말아 그녀의 머리칼을 툭 때렸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 스승은 너뿐이야.”

피식.

맥캘리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려다가 곧 뻣뻣하게 표정을 구겼다.

하나밖에 없긴 해도 제자가 스승을 특별하게 대하는 데 기쁜 걸 어찌 감출 수 있으랴.

“교수님. 여러모로 귀엽네요.”

곁에서 그걸 보고 있던 레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러워!”

속마음을 들킨 맥캘리는 괜히 릴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시끄러워.”

“크흠, 망나니 제자야. 그렇게 스승을 공경한다면 좀 예의를 갖춰보지 그러냐?”

“그래야 할 때가 오면 그렇게 할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거냐?”

찌릿 노려보는 맥캘리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마상창 시합을 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

파르테스에서 각광 받는 분야이긴 했지만, 대회나 시합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부상자의 수는 많은 반면 참가자 수는 적기 때문이다.

히이잉!

칼이 들어선 경기장 안에는 여러 마리의 말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 선배 왔어요?”

마침 교양 수업 중 하나인 승마를 끝마친 델피나가 말을 끌고서 칼에게 다가왔다.

“허허, 그새 또 여자 친구를 만들다니 몹쓸 놈일세.”

맥캘리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칼을 쏘아봤다.

그때 맥캘리를 발견한 델피나가 황급히 그녀의 양손을 붙들며 소리쳤다.

“반가워요! 맥캘리 교수님! 교수님의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도 모두 외우고 있어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너무 신기했어요.”

“그, 그러냐?”

“특히 고유 마력의 각성에 관한 이론과 자투리 마력을 한곳에 모아 각성시키는 트리거 이론을 보고는 정말 놀랐어요. 그리고 칼 선배에게 마나 연공식을 가르쳐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 생각했고요. 이리도 참된 스승님이 실제로 있을 줄이야!”

가식이 아닌 진심이란 걸 느낀 맥캘리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보다니. 정말 특출나네. 하하하하!”

“교수님 앞에서 저는 반딧불이죠.”

델피나는 맥캘리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둘 다 에클라 세트니까 그렇겠지.’

칼은 지그시 미간을 좁히며 델피나와 맥캘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두 사람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비슷하지만, 전문 분야는 서로 달랐다.

맥캘리가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는 쪽의 천재라면, 델피나는 어떤 마법이든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

칼은 무덤덤하게 마상창 시합을 구경했다.

채앵!

하얀색 말을 탄 학생은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 가까이 큰 학생을 쓰러뜨린 뒤, 여유롭게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칼과 함께 시합을 구경하고 있던 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칼리언트님. 이곳에 왜 온 거예요?”

“적이 뭘 하고 있는지 정찰하러.”

“예?”

갑작스런 답에 레인이 당황할 때였다.

다그닥.

하얀색 말이 말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다가왔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백금색 갑옷을 걸치고 있는 학생이 투구를 벗어 모습을 드러냈다.

휘황찬란한 은백발을 뽐내며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데제스였다.

그 모습에 좌중의 사람들이 순간 멈칫거렸다.

피식.

데제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칼에게 말했다.

“슬슬 방해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어.”

“딱히 방해할 생각은 없는데? 어떻게 노는지 보고 싶었던 것뿐이지.”

칼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고,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데제스는 자신의 투구를 칼에게 던졌다.

“?”

그것을 받아든 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데제스는 그런 칼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심심하다면, 같이 놀아볼래?”

어느새 데제스의 입가가 올라갔고 들고 있는 마상창의 끝이 예리하게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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