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칼이 데제스의 사냥개라고 지칭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어떤 분야에서든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이다.
프랭크는 근력, 모리스는 검술, 그리고 파우스트는 의술.
그리고 데제스는 이 중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자를 자연스럽게 배제해버린다.
프랭크는 왼팔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자로 전락했다.
또한 밀어주던 파우스트 역시 가차 없이 애완동물인 자우버의 먹이로 제공했다.
우적우적.
파우스트의 사체를 질겅질겅 씹는 자우버의 모습에…….
“오, 오빠.”
큰 충격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데제스는 그런 그녀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렸다.
“남은 찌꺼기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파우스트의 뒤는 네가 잇는다. 아나스타샤.”
찌꺼기는 파우스트의 시체를 지칭하는 거였다.
파우스트의 시신을 능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에게 그 뒤를 이으라는 명령에 아나스타샤는 눈에서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싸아.
데제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마음이 완전히 제압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아나스타샤는 곧 슬픔을 지우고 고개를 조아렸다.
칼은 팔짱을 낀 채, 데제스에게 말했다.
“화근을 알아서 키우는군.”
“화근? 같잖은 소릴.”
크르르르.
그럴 일은 결단코 없다는 듯이 말을 한 데제스는 칼의 앞에서 털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바그로바를 쳐다보았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그 기세에 키메라들이 벌벌 떨며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노빌레 레오네. 고귀한 신수로 주인의 역량에 따라 힘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저렇게 강한 건 아무래도 네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사실 저건 내가 마미안트 부인에게서 사기로 한 거였는데 말이야.”
“왜 내가 중간에 가로채서 안타깝나 보지?”
샘나냐는 듯한 말에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필요 없어. 이 녀석 역시 최고 등급의 신수중 하나니까.”
데제스는 자신의 뒤에 있는 그리폰을 가리켰다.
여타의 그리폰들과 달리 순백과 같은 하얀 깃털과 우아한 자태가 엿보였는데, 크기는 대략 2미터로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라지아 종이군.”
칼은 단번에 그리폰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그라지아 종의 그리폰은 노빌레 레오네와 동급의 신수로 그 이름값 역시 만만치 않았다.
높이가 해발 4000미터를 넘는 우랄 산맥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설원처럼 새하얀 깃털로 인해 허공을 누비는 모습은 식별조차 어려웠다.
무엇보다 빠르고 민첩하며 은폐 능력 역시 뛰어났다.
또한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이번도 단숨에 사냥하는 힘과 영리한 사냥 기술은 절로 감탄을 내뱉게 만든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주인의 역량이 높을수록 강해진다는 특성 또한 노빌레 레오네와 일치했다.
찌릿!
그리고 지금.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신수는 상대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자우버.”
그러나 데제스가 이름을 부르자 자우버는 시선을 거둬들이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데제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칼에게 다가갔다.
크르르르.
주변에 있는 수많은 키메라가 공포를 느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탈 슬라임과 뒤섞여 회색의 빛을 띠는 다이어 울프, 수십 개의 오크 머리를 갖다 붙인 오우거, 오우거의 힘줄로 강화된 고블린 군단 등등.
하나같이 위험한 종들이었다.
그때 데제스의 전신에서 하얀 손아귀들이 튀어나오더니 단숨에 키메라들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콰직!
전신이 얼어붙은 키메라들은 이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전쟁에 쓸 귀한 자원들이었을 것 같은데. 과감하게 버리는군.”
조롱 섞인 칼의 말에 데제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키메라들은 먼 훗날을 대비한 예비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없어도 세계 정복은 가능하거든.”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릴리아나에게 학생회장이 된 걸 축하한다고 전해줘.”
“마음에도 없는 소릴.”
“그럴 리가. 이래 보여도 나 그 녀석한테 꽤 진심이었거든.”
“장난감으로서 괜찮다고 생각한 거겠지.”
칼은 슬그머니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으나, 데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떤 식으로든 내 관심을 사는 건 대단한 거라고. 그리고 이번 체스에서는 너한테 당했지만, 너무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피식.
초승달처럼 스산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무척이나 서늘해 보였다.
“역전승이라는 게 있잖아. 난 그럴만한 역량이 있고 말이지.”
아직 방안은 무수히 많다.
다음에는 어떤 음산한 방법을 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을 상대하는 건 정말 짜증 나.’
데제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 칼은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 성정대로라면, 앞뒤 안 가리고 육탄전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지략 전에 스스로 발을 내민 순간부터 이미 데제스의 의도에 말려들었다는 느낌이 들어 꺼림칙했다.
데제스는 그런 칼을 보며 말했다.
“지금 짜증 났다고 생각했다면,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해 줄게.”
“마음에 안 들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랑 반대네. 난 네가 제법 마음에 들거든.”
그 말을 끝으로 데제스는 자우버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 * *
릴리가 학생회장으로서 업무를 시작한 첫날.
루시아와 이전 학생회로부터 인수인계를 받던 릴리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이게 뭐예요?”
말을 건 대상은 머리를 땋아 어깨에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의 정체는 전대 학생회장인 루시아였다.
“보다시피 내 임기 중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야.”
“양심이 조금 없는 것 같은데요.”
릴리가 불편한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자, 루시아는 살며시 눈을 피하며 말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관행이라고 할까?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은 인수인계를 받을 때 서류로 된 산을 등반하게 된다는 말이 있거든.”
“없어져야 하는 관행이에요!”
잘못된 점을 확실히 지적한 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1년 동안 그 누구보다 파르테스를 위해 일한 사람이 바로 루시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회장님.”
“어머, 그건 너를 지칭하는 호칭이야. 지금은 고문으로서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교관님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예. 그러죠. 교관님.”
호칭이 마음에 든 건지, 루시아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데제스의 힘이 막강해졌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릴리는 최근 들려오는 소문을 떠올렸다.
스첼레투스 학파의 완전한 패배.
낙선한 파우스트는 누구도 모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지금은 그의 여동생인 아나스타샤가 데제스를 보필하는 거로 알려져 있었다.
‘수상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미 각오한 부분이었기에, 릴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한 명 더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한 명 더요?”
루시아는 창문 너머로 길을 걷고 있는 한 소년을 응시했다.
심홍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걷는 남자.
그 남자의 뒤로는 바그로바가 아장아장 쫓아다니고 있었다.
“제 친구입니다만 주의하라니요?”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고,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노리고 있거든.”
빠직!
그 한마디에 미소를 짓고 있던 릴리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호호호호, 그거랑 저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머, 상관이 없다면 나야 감사하지.”
콰앙!
릴리는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손바닥으로 강렬하게 내려치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움찔!
그 박력에 루시아도 묘하게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릴리는 여전히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수인계 절차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데, 저랑은 상관없지만, 고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리죠.”
“흐음. 어떻게 할까나.”
그런 그녀가 귀엽다고 느꼈는지, 루시아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럼.”
릴리는 인사를 하고는 전력으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 * *
‘정말이지 사람 구워삶는 재주가 좋다니까.’
이놈의 학교는 왜 이렇게 음침한 사람이 많은지.
릴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칙을 따르자면 엄숙하고 정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이제 내가 학생회장인데. 뭘.’
그러나 정작 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인물인 릴리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깔끔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휘이잉!
오닉스 스퀘어 학파로 향하는 길목.
“하아, 하아.”
릴리는 호흡을 고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칼을 쳐다봤다.
일찌감치 그녀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칼은 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급한 일 있어? 왜 이렇게 뛰어와?”
화악!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상기됐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붙들며 말했다.
“연설장에서 일어난 일. 네가 벌인 거지?”
릴리가 급하게 칼을 보고자 한 이유는 투표 마지막 날 연설장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파우스트의 음성 때문이었다.
“어, 내가 했는데.”
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꽈악!
그 말에 릴리는 주먹을 꽉 쥐며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칼 덕분에 여론이 급격히 돌변해 투표에서 이겼으나, 정작 릴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선거에서 이기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칼이 훼방을 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칼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화난 거야?”
“……그래. 웬만하면 내 능력만으로 이기고 싶었거든.”
피식.
칼은 드물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없을걸.”
“무슨?”
무어라 말하려던 릴리는 전에 저런 표정으로 칼이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 것.
그것은 그녀가 회장이 되면 칼에게 들어주기로 한 소원이었다.
“설마 그게…….”
“뭐 그런 이유야. 약속은 지킨다고 했지?”
칼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오닉스 스퀘어 학파로 향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릴리는 분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근.
……두근.
그것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얼굴이 잔뜩 빨개진 릴리는 양 뺨을 꼭 누르며 생각했다.
‘이 상태로 어떻게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냐고. 바보야!!’
* * *
이른 아침.
타다다닥.
덜컹!
다급한 표정으로 기숙사 복도를 달려 칼의 방 앞에 도착한 로웰은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소, 소식 들었어?! 칼!”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느긋하게 레인이 해준 아침을 먹고 있던 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찰박!
우유를 핥고 있던 바그로바는 졸지에 그릇에 얼굴을 담가버렸다.
크르르릉!
화가 난 바그로바가 로웰을 향해 달려들려는 찰나.
스윽.
칼은 발로 바그로바의 몸을 가볍게 밀어냈다.
“…….”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로웰은 곧 이성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그 녀석,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어.”
“무슨 짓을 벌였는데?”
로웰이 언급한 그 녀석이 데제스라는 것을 알아차린 칼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로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녀석 스첼레투스를 버리고 글라우벤 학파로 이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