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선거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오늘 투표를 통해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이 결정된다.
남은 두 학파는 룩스 솔리스와 스파라기다였다.
룩스 솔리스는 정통적으로 룩스 루나에와 경쟁 구도에 놓여 있어 릴리아나에게 다소 불리했다.
반면 스파리기다는 정령 소환에 특화된 학파다 보니 릴리가 공약으로 건 엘프와의 교류에 적극 찬성하는 데다, 스첼레투스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구도상으로 보면 4대 4로 무승부가 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지만.
두 사람은 무승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릴리는 두 학파의 마음을 잡을 만한 묘책을 고안했고.
파우스트는 릴리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리거나, 룩스 솔리스와 스파라기다 학파의 구심점인 학생들에게 구타를 가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오두막.
그 비열한 방법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던 에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부 추방해버릴까?”
칼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럴 바에야 데제스 한 명을 쫓아내는 게 더 이득 아닌가?”
칼의 대답에 에리는 난색을 표했다.
“음, 그게 있잖아. 우리나라의 국력이 제법 강하다고 해도 저쪽의 광신도, 아니 성국의 성기사단이 몰려오면 답이 없거든.”
당연하게도 그녀 역시 데제스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
에리는 도리어 칼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넌 어째서 데제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칼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에리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칼이 루콘 최강의 무가, 슈타크 가의 사람이라도 데제스에 비해서는 그 배경이 떨어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국 산크투아리움의 차기 교황으로 내정된 사내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사내가 불순한 의도로 군대를 움직인다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에리는 스첼레투스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하되, 데제스에게만큼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표하지 않았다.
칼은 그녀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며 말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릴 수는 있지. 그런데 하늘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아니지.”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적이 되는 것을 피해 봤자 나중에는 더 큰 적이 되어서 만날 뿐이야. 미루면 미룰수록 오히려 손해인 셈이지.”
“…….”
어떤 말인지 깨달은 에리는 침묵했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루시아는 그 점을 알고 데제스가 더 큰 힘을 갖기 전에 어떻게든 막으려는 거야.”
“그래도 데제스를 추방할 명분이 없어. 무엇보다 릴리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데제스에게 한 방을 먹이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방법은 쓰지 않을 거야.”
“난 그런 방법 답답해서 못 써먹어.”
칼은 곧장 그녀의 의견에 반박하며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꿀꺽!
칼이라면 어떤 방법을 쓸까?
에리는 내심 궁금해졌는지, 칼의 얼굴을 쳐다봤다.
씨익.
그러자 칼은 짓궂게 웃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 미친개가 될 거야.”
“미친개?”
“한번 물면 숨통을 끊을 때까지 목덜미를 놓지 않는 거지.”
물론 갱생 중이라 먼저 건드린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했다.
물론 에리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건데?”
그녀는 칼이 어떤 일을 벌일지 너무나 기대되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선거의 마지막.
그동안은 각 학파에서 한 번씩 연설했지만.
처음 진행하는 선거방식이다 보니 시간이 예상보다 지체되고 말았다. 결국 룩스 솔리스와 스파라기다 두 학파가 모두 모인 가운데에서 연설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연설에 앞서 대기실에서는…….
“후우.”
릴리가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힘껏 내뱉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뜬금없이 생겨난 헛소문에 마음이 많이 동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는 데 성공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
후회와 미련을 가진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끼익.
바로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바그로바와 함께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갸르릉.
“꺄악! 바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던 릴리는 바그로바의 귀여움 앞에 무너졌다.
갸르릉!
바그로바는 귀찮다는 듯 릴리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릴리는 바그로바를 인형처럼 꼭 안았다.
“칼, 응원하러 와준 거야?”
“딱히.”
칼은 건성건성 답했고, 릴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학생회장이 되면, 소원 하나 들어줄래?”
“너한테 좋은 일인데, 왜 내가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건데?”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릴리는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칼의 소원을 들어줄게. 물론 음흉한 건 안 된다.”
툭!
칼은 검지를 말아 그녀의 이마를 툭 친 다음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했다.
“없어.”
단호한 말에 릴리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럼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거야? 난 너한테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의 말에 칼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미 많이 받았어.”
“……?”
뜬금없이 이게 뭔 소리지?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뭘 줬는지에 대해 떠올리려고 했다.
“아!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있으려나.”
“뭔데?”
릴리가 반색하며 칼을 쳐다보자 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 것.”
“……그게 뭐야? 일단 알았어.”
수수께끼 같은 말에 릴리는 그 의미를 곱씹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햇살은 따듯했다.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만개하는 장소.
그곳에는 스파라기다와 룩스 솔리스 소속의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릴리는 학생들의 앞에 서 있었다.
쭈뼛쭈뼛.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승부의 갈림길이다.
“릴리아나입니다.”
그녀가 다소곳하게 예를 갖추자 몇몇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질투와 힐난, 그리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소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저는 서민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릴리아나가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줄곧 신분은 그녀의 발목을 옭아매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의 무기였다.
“먼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으로 혼란을 드린 부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면 추후 따로 자리를 갖겠습니다. 지금은 이 아카데미의 주인인 여러분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논하고자 합니다.”
음색은 아름다웠으며 목소리는 차분했다.
높은 위치를 갈구하면서도 낮은 자세에서 학생들을 존중하는 말투로 말했으며.
공약 또한 이전보다 좀 더 세련되며 실천방안까지 제대로 언급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던지던 이들도 어느 순간 귀를 열고 있었다.
사르륵.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연설하는 그 모습에…….
“…….”
누군가는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그 강렬한 존재감에 학생들은 어느새 넋을 놓고 그녀의 연설에 집중했다.
* * *
릴리아나의 연설이 끝나고 약 5분의 대기시간이 주어졌다.
연설을 하는 단상과 이어진 길.
뚜벅뚜벅.
이전 상쾌했던 모습과 다르게 지금 파우스트는 탁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걷고 있었다.
여유로웠던 초반과 달리 온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가까스로 무승부 형국으로 만들었다.
그로서는 점점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선거, 너희들 모두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데제스의 엄포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승부는 있을 수 없어. 압도적으로 이긴다.’
심지를 굳히고 새로운 간계를 생각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무슨 간계를 꾸밀 생각이냐?”
칼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또 당신입니까?”
파우스트는 바짝 그를 경계하다 곧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가에 조소를 그렸다.
“이번에도 저를 협박할 심산입니까?”
“난 딱히 협박한 적 없어. 찔리는 게 많나 봐?”
파우스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슬그머니 본성을 드러냈다.
“자꾸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면 곤란하지 말입니다. 선배님.”
“주제를 모르는 건 너가 아닐까 싶은데?”
심홍색의 동공에는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에는 근본을 간파하고 그것을 뒤흔드는 악질적인 심보가 깃들어 있었다.
칼은 당연하다는 듯이 파우스트의 역린을 건드렸다.
“데제스 흉내를 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는 않나 보네, 게다가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한 서민에게 궁지에 몰리니 비열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참나, 데제스 눈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네놈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
쫘아아악!
순간 파우스트의 팔이 부풀어 오르더니 리자드 맨의 발톱과 오우거의 근육이 혼합된 손으로 바뀌었다.
그 손은 단숨에 칼의 목을 움켜쥐어 분지르려고 했으나.
꽈악!
어째서인지 훨씬 작은 칼의 손아귀에 붙들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안 움직여?!’
범인이라면 기습을 눈치채기도 전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을 터였다.
설사 눈치를 챘더라도 강대한 근력을 지닌 팔은 오러를 사용하는 오러 유저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칼은 도리어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발악해도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가?”
“네, 네놈. 정체가 뭐냐? 에클라 세트라도 되는 거냐?”
“날 그딴 거에다 갖다 붙이지 마.”
꽈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칼이 슬며시 손가락에 힘을 가하자, 파우스트는 손목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에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그에게 칼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제를 알아라, 버러지. 이번이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니 잘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칼은 살짝 무릎을 굽혀 그의 귓가에 대고 언질을 놓았다.
“사퇴하고 꺼져. 이 이상 짓밟히기 싫으면…….”
그러고는 다시 무릎을 피며 걸음을 옮겼다.
파르르르르.
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던 파우스트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으아아아아악! 다 죽여 버리겠어! 네놈도 그 괘씸한 서민 계집도! 이딴 학생회장 타이틀에 그렇게 집착하다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어!”
“그 학생회장이 되려는 거 아닌가?”
“같잖아.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우민도, 그런 우민에게 아양 떠는 가축들도 실로 어처구니가 없어. 어차피 가문에서 배척받는 반푼이들이잖아! 공정? 파르테스의 수재들? 웃기지 마! 이곳의 녀석들은 우리에 갇힌 가축에 불과해!!”
그는 릴리아나뿐만 아니라 학생 전체들을 꼬집어서 말했다.
피식.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때려치워.”
“닥쳐! 데제스 님이 내린 사명이다. 난 어떤 식으로든 파르테스의 회장 자리를 꿰찰……?!”
역정을 내던 파우스트의 머릿속으로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흥분하고 있던 그는 그제야 칼을 중심으로 지면에 깔린 수많은 붉은 광채의 마나의 선을 발견했다.
동시에 숨어 있었던 델피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칼에게 말했다.
“전송 완료. 이제 어떻게 되더라도 저는 책임 안 질 거예요.”
주륵.
파우스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칼에게 물었다.
“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네놈들.”
칼은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일전에 경고하지 않았나? 네가 먼저 시작했다고.”
* * *
연설장 지면과 허공에 갑작스럽게 서킷이 활성화되었다.
무슨 연출인가 싶어서 학생들이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던 도중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다 죽여 버리겠어! 네놈도 그 괘씸한 서민 계집도! 이딴 학생회장 타이틀에 그렇게 집착하다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어!]
[같잖아.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우민도, 그런 우민에게 아양 떠는 가축들도 실로 어처구니가 없어. 어차피 가문에서 배척받는 반푼이들이잖아! 공정? 파르테스의 수재들? 웃기지 마! 이곳의 녀석들은 우리에 갇힌 가축에 불과해!!]
서킷을 통해 터져 나오는 낯익은 남성의 목소리에 학생들의 얼굴에는 당혹과 분노가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