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엘프와의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엘레멘탈 스피릿 소속 학생들 사이로 릴리의 발언이 퍼져나갔다.
고귀한 숲의 수호자들이라 불리는 엘프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인간에게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직 대륙 곳곳에는 엘프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 은연중 일어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간을 향한 엘프들의 경계와 적개심은 매우 컸다.
릴리의 주장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엇갈렸다.
누군가는 릴리의 공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또 누군가는 굉장히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릴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들이댔다.
“파르테스가 추구하는 건 공평한 제도에 의한 재능의 도약이지, 편견에 의한 쇠퇴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분명 이 제도의 이점은 여러분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확실히.”
엘레멘탈 스피릿의 수장인 알버튼 로 교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 없이는 성장 역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너무 경쟁과 성장만 추구하다가는 도리어 도태되는 일 역시 잦았다.
이런 경우에는 분명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야 했다, 그때 마침 릴리가 새로운 방법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엘프.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교류가 어렵긴 하겠지만.
그들은 태생적으로 인간과 달리 4대 속성 친화력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자유분방하게 마력을 다룰 수 있었다.
옆에서 그들의 마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공약은 이실리아의 국가적 방침과도 매우 적합했다.
‘엘프들과 교류한다는 건 곧 평화를 향한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건가.’
릴리는 그 점을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그 발언은 확신에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 서민이라는 편견을 가진 학생들조차 긴가민가 고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루시아 못지않은 품격을 지니고 있어.’
“……이상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친 릴리아나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짝, 짝.
그때 알버튼 교수는 연장자답게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짜자자자자작!
뒤이어 그녀를 향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날 투표 결과는 122표 대 83표였다.
기권표는 4장이었으며, 릴리는 39표 차이로 파우스트를 압도해 엘레멘탈 스피릿의 표를 획득했다.
* * *
한 번 기세를 탄 릴리의 질주는 폭풍과 같았다.
두 번째 연설은 글라우벤 학파의 진영에서 펼쳐졌다.
파우스트도 혼신의 힘을 쥐어 짜냈지만, 릴리의 연설에 비하면 뒤처지고 말았다.
결국 글라우벤 학파의 표도 릴리가 획득했다.
패인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파우스트는 경쟁 상대인 릴리의 역량을 너무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무척이나 치명적이었다.
현재 파르테스는 릴리가 내놓은 이종족과의 교류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참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파우스트의 이름은 자연스레 잊혀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좀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엘프들의 유학이라는 게 학생들을 설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종족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아름다움으로 소문이 난 엘프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기대와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은 릴리아나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파르테스에 대한 파우스트의 오해 때문이었다.
파우스트는 어떤 학파든 예산을 늘리고 복지를 해준다고 하면 무조건 자신에게 가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파르테스의 학생들이 얼마나 배움에 뜻을 두고 있는지 몰랐다.
분명 복지와 예산 증대는 매력적인 제안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파르테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걸 배우고 자신만의 연구를 완성하는 것.
그런 마음으로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의 수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많았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파우스트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스첼레투스 학파에서 선거 캠프를 꾸린 것이긴 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자를 협박하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기본적인 정보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어두운 밤.
퍼어억!
격분을 이기지 못한 파우스트는 자신을 지지하는 스첼레투스 학파의 간부들을 소집해 구타하고 있었다.
“커, 커헉!”
제일 심하게 구타를 당한 이는 입을 가린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쓸모없는 새끼들. 네 피부를 모두 뜯어내 깃발 대신에 써줄까? 설마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
여유를 잃은 파우스트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폭언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하는 폭언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라는 남자는 한다면 정말로 하는 남자였다.
“내가 선거에서 지면 너희도 끝이라는 걸 설마 모르진 않겠지?”
“…….”
데제스는 지금의 상황을 관전할 뿐, 아직 어떤 지시도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파우스트에게는 더 공포로 다가왔다.
이 정도까지 지원을 해줬다면 성과를 내야 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사실상 3대 1이다.
나머지 네 학파의 표를 획득하지 못하면 파우스트는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콰앙!
파우스트는 자신의 앞에서 엎드리고 있는 학생의 뒤통수를 힘껏 짓밟았다.
“커헉!”
바닥과 충돌한 학생은 이가 부러져 괴로움에 찬 숨을 내쉬었다.
스첼레투스 학생들은 동공을 파르르 떨며 파우스트를 노려보았다.
순진무구한 탈을 뒤집어쓰고 있던 파우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키메라 연구를 할 때와 같은 집착과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건들거리는 것도 끝이다.”
“…….”
꿀꺽!
그를 지켜본 학생들은 고인 침을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데제스가 모리스가 아닌 이 남자를 선택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저벅저벅.
파우스트는 일렬로 서 있는 그들의 명치를…….
퍼억!
주먹으로 힘껏 가격했다.
“쿠헉!”
격통에 남자가 쪼그려 앉자 파우스트는 넌지시 한마디를 했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면 상대의 힘을 깎아내면 그만이야.”
퍼억! 퍼억!
뒤이어 파우스트는 다른 이들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들은 어김없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 파우스트는 세뇌를 하듯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세울 수 있는 건 힘밖에 없잖아. 그간 데제스님 덕분에 권력을 휘둘렀으면, 그에 걸맞은 짓을 해보라고. 다음 투표가 진행되는 곳은 어디지?”
“……루, 룩스 루나에.”
릴리아나가 소속된 학파였다.
모처럼 자신의 학생을 학생회장으로 내세울 기회인 만큼 학파의 수장, 미라이 그라펜은 릴리아나를 적극 밀어줄 것이다.
파우스트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천박한 서민 년이 소속된 학파지.”
언행이 갈수록 거칠어졌지만, 파우스트는 상관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그 서민 년이 우리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작정이냐?”
울컥!
그들은 고통조차 잊고 분개한 표정을 지으며 기립했다.
스첼레투스는 자신들이 우월한 혈통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파우스트는 그들의 본성에 불을 지른 것이다.
꽈악!
파우스트는 기립한 그들 중 한 명의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힘으로 짓밟아. 부족하다면 그년 면상에 눈물이 날 정도로 명성에 흠집을 내. 여기서 꺾이면 아무 의미도 없어. 무승부는 없다. 내 말 뭔지 잘 알겠지?”
“네!”
파우스트의 말에 넘어간 그들은 선거 전략과 방향을 대폭 수정했다.
* * *
룩스 루나에 진영.
“흐흠.”
연설에 앞서 대기실에 있던 릴리는 크게 긴장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는 거 아니야? 자, 여기 허브차야.”
“고마워.”
“피곤하지?”
“조금.”
예전이었다면 더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인정을 하다니.
‘많이 변했네.’
에리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편으로는 릴리가 걱정이 됐다.
보통 때라면 한 번의 투표로 모든 게 결정지어졌을 테지만.
지금의 방식으로는 과반수를 차지하기까지 최소로 잡아도 나흘이나 소모된다.
릴리는 각 학파에 맞는 선거 공약을 내걸기 위해 철저히 그 학파를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3대 1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 데제스가 선택한 남자야. 절대 이대로 물러날 리 없어.’
하지만 여기서 한 표밖에 더 얻지 못한다면, 기껏 노력해도 4대 4로 무승부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되면 투표는 모든 학생의 표를 합산해서 계산하는 직접 투표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릴리는 이미 총 학생 수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엘레멘탈 스피릿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당선이 유력해지는 상황이었다.
“릴리아나 양. 차례네요.”
“네!”
밖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릴리는 곧 당당한 기세로 걸음을 옮겼다.
“갔다 올게.”
“릴리, 힘내.”
에리는 주먹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힘껏 응원했고, 릴리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탁.
문이 닫히고 대기실은 다시금 한산해졌다.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에리는 곧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고민에 빠졌다.
릴리 앞에서는 차마 하지 못한 고민.
‘어째서 질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언가 놓치면 안 될 것을 놓친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 * *
룩스 루나에 진영.
‘……이상해.’
연설을 하던 릴리는 불안한 조짐을 발견했다.
그녀를 보고 수군덕거리는 룩스 루나에 학파의 학생들.
그들의 수군거림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천박한 서민 주제에.]
[이제 보니 쟤 나이 많은 상인이랑 약혼 관계라며…….]
[진짜? 고고한 척 떠들고 다닌다더니만.]
[엘프들과의 교류도 정작 추진할 방법이 없잖아.]
[역시 허위 공약인가.]
“…….”
은연중 들려오는 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릴리는 차분히 눈을 감고서 호흡과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두근, 두근.
하지만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샘솟아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이날 릴리는 압도적인 차이로 파우스트에게 패배했다.
* * *
선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가지고도 룩스 루나에의 표는 파우스트가 획득했다.
파우스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블리오 마기아스의 표까지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줘.”
분에 찬 표정으로 말을 한 릴리는 전략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가까스로 3대 3까지 따라붙은 파우스트는 무척이나 상쾌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싸아아아아.
깔끔한 외모와 다르게 그의 방안에서는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차단 마법이 방 곳곳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심홍색의 머리칼을 지닌 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스윽, 스윽.
칼은 파우스트의 서적을 읽으며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칸투버그의 연구 결과물이네. 데제스가 가져와서 넘겨준 건가?”
흠칫!
정곡을 찔린 파우스트는 크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주륵.
어느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서, 선배님.”
“궁금해?”
탁.
칼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책을 덮은 뒤, 그에게 다가갔다.
움찔!
파우스트는 다시 한번 뒷걸음질 쳤고, 칼은 그의 몸 곳곳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우거의 근력, 트롤의 회복력, 리자드맨의 비늘 갑주. 흐음, 몬스터의 사체를 이용해 몸을 강화시킨 건가? 제법 재밌는 실험을 하네.”
“혀, 협박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당신이라도…….”
“데제스가 지랄하겠지. 근데 말이야…….”
칼은 알고 있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 곧 눈을 부릅떴다.
“내가 왜 그 자식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는 거냐?”
쿠구구구구!
두 눈에 가득 피어오른 살기에 파우스트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칼은 검지로 그의 명치를 꾹 누르며 말했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절대 잊지 마.”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칼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