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파르테스의 가장 큰 행사인 선거가 다가왔다.
후보는 두 명.
[스첼레투스 소속 파우스트]
[룩스 루나에 소속 릴리아나]
한 명은 데제스를 추종하는 인물로 수려한 미모와 뛰어난 의술로 각광을 받았다.
성적은 릴리아나보다 부족했으나 모두의 신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릴리아나가 마냥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세컨드 프린세스라고 조롱당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귀족 우월주의와 혈통을 중시하는 일부 학생과 데제스를 따르는 스첼레투스의 학생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릴리아나는 도도한 느낌과 기품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학생들 역시 존재했다.
게다가 그녀의 인기 요인은 단순히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먼저 그녀는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종종 인사를 하거나, 아카데미에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종종 소매를 거들고 도왔다.
에리가 말괄량이에 천진난만한 매력을 발산한다면, 릴리아나는 상냥함과 도도한 멋이 있었다.
후보자 명단에 적힌 파우스트와 릴리아나의 이름을 보며 한참 고민하던 맥캘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거 완전 비선 실세들이 깽판 부리는 거잖아.”
“……당사자 앞에서 너무 하네요.”
릴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크흠.”
민망한 마음에 맥캘리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구도가 두 사내의 대결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칼리언트와 데제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이 둘은 아카데미의 실권을 장악하는 문제로 다투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권을 장악하려는 건 데제스였고, 칼은 어디까지나 데제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거였다.
만약 선거에 나온 게 데제스였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을 거다.
그러나 데제스가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은 이제 그는 3학년이었기 때문이다.
1년 뒤 그는 졸업을 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가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인재를 포섭하는데 큰 지장이 생긴다.
그렇기에 데제스가 흥미를 가질만한 사람을 포섭하려면 파우스트 같은 남아있을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다.
“만약 데제스가 직접 나왔더라면, 엄두도 못 냈겠죠.”
하지만 데제스는 이번에도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칼 역시 릴리에게 조력을 하긴 하지만 직접 선거에 개입을 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투표 방식을 바꾼 것은 묘안이자 승부수였다.
학생의 수가 몇 명이든 모든 학파는 존재만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투표 방식.
학파에 얼마나 많은 수의 학생이 있냐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 오닉스 스퀘어의 경우는 학생이라고는 칼리언트 단 한 명밖에 없기에, 칼리언트의 선택이 곧 오닉스 스퀘어의 선택이었다.
“……어째 좀 치사한 것 같지 않냐?”
다시금 그 사실을 상기한 맥캘리가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야 좀 해볼 만해지니까요.”
단순히 인지도만으로 싸운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제안된 투표는 학파 간의 이해관계나 교수들 간의 경쟁 관계 등 여러 가지의 변수가 존재했다.
맥캘리는 대견하다는 듯이 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는 어느 학파들을 설득할 거냐?”
“물론 전부 설득할 거예요.”
릴리가 과감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자 맥캘리는 눈매를 좁혔다.
“힘들 텐데…….”
그 말에 릴리는 문득 데제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진심으로 일개 서민 따위가 파우스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정도를 걸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데제스는 그저 이 상황을 유흥거리로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에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보고 생각한 사실을 알려준 것뿐이었다.
빠직!
릴리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분하고 화가 났다.
“사실 저도 데제스의 말에 꽤 자극을 받았거든요. 서민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줄 거예요.”
그녀의 분노를 다스려 준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닌 또 다른 감정이었다.
[꼭두각시를 세운 게 아니야. 릴리가 이길 거라고 믿는 것뿐이지.]
자신을 믿어주는 한 남자의 발언.
그 말에 용기가 났고 심지어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사람 마음을 정말 제멋대로 흔든다니까.’
릴리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찰나.
지그시.
맥캘리는 수상쩍어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다. 아무것도.”
화들짝 놀란 릴리는 뒤로 물러섰고, 맥캘리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화끈!
“교수님!”
괜스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릴리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 * *
마침내 선거 운동이 시작됐다.
스첼레투스는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유세 활동을 하며 연신 파우스트를 외쳤고.
파우스트는 사람 좋은 미소로 대중을 환심을 샀다.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릴리가 훨씬 밀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릴리! 릴리!”
대규모의 선거단을 꾸린 에리가 적극적으로 릴리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견제하기 시작했다.
릴리는 짐짓 평온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선거 운동이 익숙지 않기 때문인지 귀 끝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데제스는 그 광경을 아카데미의 옥상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이것도 의미 없는 짓이려나.”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때마침 데제스가 있는 옥상정원에 올라온 칼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모리스가 다급히 칼을 제압하려고 했으나, 데제스는 도리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칼은 자연스럽게 데제스의 앞에 착석했다.
“마침 잘 됐어. 심심했었거든.”
데제스는 테이블 위에 있는 체스 말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탁.
그 도발에 칼 역시 말을 움직이며 물었다.
“데제스 싱클레어. 이 아카데미에 온 목적이 뭐지?”
움찔!
데제스의 본명이 언급되자 모리스는 누가 들을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나의 야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지. 이곳에 마련된 무대는 나의 말을 모으기 위한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아.”
데제스의 대답에 칼은 말을 움직이면서도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정확히는 너의 유흥을 위해서겠지. 너는 사람을 기만해도 제멋대로 조종하려는 악질적인 심보를 감추고 있어.”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적어도 내 휘하에 있는 녀석들은 그걸 알면서도 날 따르고 있는 거야.”
부정할 생각이 없는지 모리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체스가 천천히 진행되던 와중에 이번에는 데제스가 칼에게 물었다.
“칼리언트 슈타크. 아쉽게도 너의 행동 패턴은 꿰뚫지 못하겠더라. 제멋대로 행동한다 싶다가도 어떤 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자기 성질을 죽여 버리더군.”
“…….”
자신의 행동 방식을 간파당한 칼은 드물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아아, 빌어먹게도 지금은 갱생 중이라서 말이지. 여러모로 자제하고 있어.”
칼은 의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탁!
그러자 데제스는 ‘나이트’를 앞으로 올리며 자연스럽게 선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각 학파에 연설이 있겠지. 첫 번째는 물론 엘레멘탈 스피릿이겠고.”
엘레멘탈 스피릿은 구성원이 가장 많은 학파였다.
제아무리 승자독식제의 방식으로 간다고 해도 다수의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타악!
칼은 폰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는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나.”
“난 어떤 충고도 하지 않았어. 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러줬을 뿐이지.”
“사람 참 쉽게 다루네.”
“쉽게 다루지 못하면, 권좌에 앉아있을 필요도 없지.”
씨익.
칼은 그 말에 실소를 터뜨리며 잠시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거 알아?”
“?”
뜬금없는 말에 데제스는 의구심 섞인 눈빛으로 칼을 쳐다보았다.
칼은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고집이 센 놈들은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더라고.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자기가 하는 일이 주인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말지.”
“마치 겪어 본 것 같이 이야기하는군.”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어 봤지.”
정확히는 마족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고를 칠 놈은 누가 위에 있든 꼭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야. 너는 어지간히도 릴리아나를 신뢰하고 있나 보군.”
“물론.”
칼은 피식 웃으며 퀸을 집어 데제스의 진영에 갖다 놓았다.
체크.
아직 빠져나갈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그 구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칼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여왕님은 아주 강하다고.”
* * *
엘레멘탈 스피릿 진영.
건물 내부에서는 파우스트가 모여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분위기는 조용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파우스트 역시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데제스를 웃돌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에 엘레멘탈 스피릿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것도 파우스트의 영향이 크다 보니, 그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파우스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학생들이 점점 연설에 넘어왔을 때 가장 강력한 패를 꺼내 들었다.
“여러분의 진취적인 뜻을 이루기에는 연구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예산을 늘리고 여러분들의 연구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적극 개선하겠습니다.”
예산증가.
그 말에 학생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는 물론 과제를 하는데도 돈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예산 부족으로 성과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우스트의 연설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수고했어.”
릴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파우스트에게 말하며 그를 지나쳤다.
‘수고? 건방지게?!’
도도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파우스트는 인상을 살포시 찌푸렸다.
그 사이 단상 위에 선 릴리는 인사를 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한 가지 혁신적인 제도를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회장이 되기 위해 내뱉는 허위공약이 아닙니다. 파르테스라면 마땅히 추진되어야 할 제도입니다.”
웅성웅성.
“혁신?”
“무슨 말을 하려고?”
“뭐 별것 있겠어?”
“이번에도 말로만 거창한 거겠지.”
다들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으나, 그래도 릴리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듯 귀를 기울였다.
릴리는 조금 긴장되었으나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엘프들과의 교류를 추진하려고 합니다.”
“에, 엘프?!”
예상하지 못했던 이종족과의 교류 선언에 장내는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