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휘익!
칼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가 펼치고 있는 검술은 과거 그랜드 마스터의 검술이었다.
그러나 비어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에서는 칼만이 지닌 개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콰앙!
결국 발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부서졌다.
칼이 검을 휘두르는 걸 멈췄을 때, 주변을 가득 메웠던 안개가 갈라져 있었다.
그때 갈라진 안개 사이로 루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한데, 꼭두새벽부터 이토록 어마어마한 검술을 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
칼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좁혔다.
시선에 담긴 생각을 알아챈 루시아는 정색하며 말했다.
“또 귀찮은 게 왔네. 라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네.”
졸업생이며 동시에 전 학생회장에 대한 예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색하는 시선을 보니 말하는 투에 섭섭함이 절로 묻어났다.
“용건이 뭐야? 나는 적국 사람이랑 친분을 맺을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아.”
비어벨을 검집에 넣은 칼은 외투를 어개에 걸친 뒤 바위에 앉았다.
루시아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너의 적이 되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네 의지가 아니라 가문의 의지겠지.”
다리를 꼬고 앉은 칼의 모습은 무척이나 오만해 보였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오만한 모습에 루시아는 오히려 안도하며 말했다.
“헨리까지 제압당했으니 파르테스는 사실상 데제스의 뜻대로 돌아갈 거야.”
“어째서 그렇게까지 데제스를 경계하는 거지? 아카데미에서 학업은 끝마쳤잖아. 이제 그 녀석이랑 안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칼이 보기에 루시아는 아직 데제스를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그런데도 루시아가 데제스에게 보이는 경계심은 칼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에 찬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으로서 데제스와 마주치면서 그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었어. 데제스는 뛰어난 사교성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동기들을 굴복시켜 부하로 만들어. 물론 내가 데제스를 위험하다고 생각한 건 전술 전략 수업 때 본 그의 사상 때문이지만.”
“사상?”
“데제스는 수업에서 펼치는 모의 시합에서 늘 승리했지.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포로를 잡지도, 약탈을 하지도 않았지.”
“무슨 말이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 싫은지 루시아의 눈은 어느새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략 전술 수업을 들을 때 데제스는 묘하게 흥이 넘치고 진지했다.
“……녀석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지워버릴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칼은 동요하는 그녀를 보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본 그 녀석은 생각보다 권태로운 녀석이야.”
“권태롭다니?”
“자기가 손을 쓰면 뭐든지 쉽게 끝나버리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타인의 손을 빌려 쓰는 거지. 그리고 본인은 그 과정과 결과를 보는 걸 즐기는 거야.”
“어, 어째서 그렇게…….”
“취향 차이겠지. 나는 별로 신경 안 써.”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심홍색의 눈동자.
그 눈을 마주 본 루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데제스랑 견줄 수 있는 건, 이 남자뿐이야.’
실제로 데제스 역시 칼리언트와 검술이든 전략 전술이든 승부를 겨루는 걸 즐기고 있는 걸로 보였다.
호적수를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마음속으로 결단을 한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데제스는 파우스트를 이용해 파르테스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고 있어.”
“선거인가?”
그리 말한 칼은 곧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학생회장이 되어서 얻는 이익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생각보다 많아. 교칙을 개정하는 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거나, 졸업 후에도 이실리아의 준귀족으로 대우받기도 하지.”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칼은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그런 특혜 때문에 데제스가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다.
칼이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할 때, 루시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마 데제스가 노리는 건, ‘지식의 서고’ 게스턴 비블리오의 입장권일 거야.”
“게스턴 비블리오?”
처음 들어본 단어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자 루시아는 설명을 이어갔다.
“이실리아가 마탑과 연계해서 복원하고 있는 마도 유산이야.”
마도 유산.
그것은 과거 지금보다 문명이 뛰어났다고 하는 초고대 문명 시절에 존재했던 기이한 물건이다.
아직도 학계에는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마도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마도 유산의 기원에 대해 밝혀내지는 못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원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물건. 어느 하나라도 복원에 성공한다면 세계를 쟁취할 힘을 얻게 된다.’
칼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문구를 떠올리며 루시아에게 물었다.
“실재하나?”
“다른 유산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게스턴 비블리오는 내 눈으로 확인했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건지, 루시아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비록 게스턴 비블리오에 접근했다가 기절해서 당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무슨 소리지?”
“게스턴 비블리오는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기록된 유산이야. 그중 7할의 기록은 날아갔지만, 남은 3할의 기록만으로도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 수 있어.”
‘그거라면 녀석이 탐낼 만하겠군.’
제아무리 데제스가 모든 분야에서도 완벽한 축복받은 인간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그 한계가 있었다.
만약 데제스가 파우스트를 이용해 게스턴 비블리오에 입장한다면?
아마 전 인류를 죽일 방법이나 무기, 혹은 그러한 기록 등을 찾아낼 수도 있다.
“네가 왜 그렇게 절박한지 알겠군.”
칼은 그제야 어째서 루시아가 데제스의 발목을 잡으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원하는 걸 찾기도 전에 기절했지만, 데제스라면 원하는 걸 알아내고 말 거야.”
씨익!
“재밌어졌어.”
데제스의 꿍꿍이를 파악한 칼은 처음으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이 남자도 보통내기는 아니야.’
루시아로서는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루시아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떻게 하게?”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지.”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루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회장 후보로 나서는 거야?”
칼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될 것 같지도 않고 이런 부분은 인망이 있는 사람이 해야지.”
“…….”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한 말에 루시아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마 그 녀석이라면, 조금만 밀어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칼은 벌써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그 모습에 루시아는 생전 처음으로 질투심을 느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이 남자가 진심으로 밀어주기로 마음먹은 상대가…….
“만약 그게 릴리아나라면, 차라리 에리로 방향으로 트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릴리아나는 학생 사시에서 꽤나 인망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가 서민이라는 것 때문에 극도로 꺼려하는 학생들도 일부 있었다.
반면 에리는 모두와 친했기에 선거에서 이기기에는 에리를 밀어주는 쪽이 더 탁월한 선택으로 보였다.
“그걸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말이지.”
자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밀어주는 것뿐이다.
본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 이기기 위해서는 선거 방식을 바꿔야 해.”
“어, 어떻게?”
그동안은 직접 투표를 하거나 혹은 교수들의 추천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 회장을 정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파우스트를 막을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씨익.
그때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린 칼이 루시아에게 말했다.
“승자 독식제를 도입했으면 싶은데.”
“승자 독식제?”
처음 들어본 표현에 루시아가 당황해하자, 칼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 낯선 발상에 대한 설명을 듣던 루시아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거라면, 승산이 있어.”
이윽고 칼의 설명을 모두 들은 루시아는 회의에 안건으로 내놓기 위한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칼은 피식 웃으며 설득에 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명분은 학생회장으로서 소통 능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라고 하면 적당하겠네.”
* * *
칼에게서 투표 방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데제스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승자독식제라…… 기가 막힌 발상을 해주었군.”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에 솔직하게 칼에게 감탄을 표했다.
다른 학파와 다르게 스첼레투스 학파의 인원들은 모두 파우스트를 지지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는 파우스트에게 어마어마하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바뀐 룰은 그 많은 인원의 표가 한 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각 학파마다 어떤 이득을 안겨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공약을 걸고 표를 가져와야 했다.
교수진들이 이 선거 방식을 채택한 이유에는 이런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도 있음이 분명했다.
“이건 너와 루시아의 합작품인가.”
“그렇다면?”
도발에 도발로 답하자, 데제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더 재밌게 해주는군. 파우스트의 역량을 시험하기 적합하겠어.”
그러고는 그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였다.
“이번에도 권태롭게 지켜볼 생각이야? 네가 수습하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텐데.”
“내가 나서면 너도 나서겠지. 그러면 이 아카데미는 불바다가 될 테고.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
오만한 폭군과 간사한 군주의 격돌.
언뜻 봐도 피해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스윽.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매를 좁힌 데제스는 릴리와 칼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종의 체스잖아? 기왕 꼭두각시를 세웠으니, 누가 체크 메이트를 당할지 기대되지 않아?”
“……데제스 너.”
자신을 체스 말로 취급하는 발언에 릴리는 발끈했다.
스윽.
그리고 칼은 팔짱을 낀 상태로 데제스에게 답했다.
“꼭두각시를 세운 게 아니야. 릴리가 이길 거라고 믿는 것뿐이지.”
“?!”
예상외의 호평에 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데제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칼을 쳐다봤다.
“진심으로 일개 서민 따위가 파우스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리하다고 우쭐대지 마. 파우스트 그 버러지의 상대는 그동안 너의 등 뒤를 바짝 쫓아오던 사람이니까.”
세컨드 프린세스라는 별명이 붙이기는 했지만, 릴리의 성적은 늘 데제스의 바로 뒤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서민 주제 안간힘을 쓰네.’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릴리는 지난 1년 동안 데제스와 경쟁을 해왔던 것이다.
이것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인지도에 있어서 그녀는 절대 파우스트에게 뒤지지 않았다.
“애써보라고.”
데제스는 흥미를 잃었는지, 그대로 발길을 옮겼다.
* * *
데제스의 저택.
파우스트는 선거를 위해 스첼레투스 학파의 핵심 인물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끼익.
그러던 도중 살며시 문이 열리며 데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파우스트는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데제스에게 말했다.
“데제스님. 여기에 무슨 일로…….”
덥석!
꽈악!
“크아아아악!”
데제스는 대답 대신에 파우스트의 목을 붙잡고는 힘을 주었다.
우아한 외견과 맞지 않는 우악스런 힘에 파우스트는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데, 데제스!”
당황한 모리스는 그런 데제스를 말리려고 했으나.
싸아아아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혹독한 눈빛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것은 죽기 일보 직전인 파우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숨 막히는 상황이 한참 이어지던 중이었다.
싱긋!
데제스는 그의 목에 손을 놓으며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이번 선거, 너희들 모두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오싹!
그 말에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면 죽인다.
아주 조금이지만 데제스가 처음으로 진심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