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에 아나스타샤는 크게 당황했다.
단순히 자신을 가둔 아이스 스피어에서 느껴지는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마법의 주도권을 강탈했어.’
그보다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소녀는 바로 델피나였다.
나름 흑마법에 재능이 있어 스첼레투스의 유망주로 기대받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마법이 어이없이 무너지자 급격히 흥분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알 것 같기는 하지만 굳이 아는 척은 하지 않을게. 여기는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니까.”
울컥!
여유가 넘치는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분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 오빠는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이 될 사람이야.”
“그거랑 지금 네가 벌인 일은 상관없어.”
델피나는 바그로바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지 마.”
“아악! 짜증나!”
바로 그 순간 어두컴컴한 마력이 아나스타샤 주변의 아이스 스피어를 깨부쉈다.
“내 여동생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죠?”
마법을 사용한 이는 다름 아닌 파우스트였다.
“오빠!”
반색한 아나스타샤는 재빨리 그의 뒤에 숨으며 말했다.
“저거 가지고 싶은데, 못 가져가게 자꾸 방해하잖아.”
아나스타샤의 검지가 털을 꼿꼿이 세운 바그로바를 향했다.
파우스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나스타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방법이 틀렸잖아. 아냐.”
그러더니 파우스트는 돈주머니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언뜻 봐도 상당한 양의 금화가 담겨있었다.
“이 정도면 어때?”
“…….”
정작 그 돈을 바라보는 델피나와 레인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평소에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레인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출했다.
“바바는 거래하는 물건이 아니에요.”
“아아, 시녀가 어디서 건방지게 입을 여는 걸까요?”
싸아아아.
살포시 웃던 파우스트가 살벌한 동공을 드러내자 레인은 몸을 움츠렸다.
“그만두시죠. 여자를 상대로 유치하게 힘자랑하고 싶은 건가요?”
그러나 델피나는 전혀 겁을 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에 파우스트는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들어온 입학생 중 수석이라고 들었는데 보통내기는 아니네? 델피나라고 했던가. 너도 데제스님의 파벌 쪽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아마 네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양할게요. 남의 도움 없이 잘 클 자신 있어서요.”
히죽!
바로 그때 파우스트가 이죽거리며 흉악한 미소를 드러내었다.
기분 나쁜 것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 델피나와 레인이 몸을 떨었다.
“희귀한 소재인 노빌레 레오네의 새끼부터 마나가 가득한 육체, 덤으로 건방진 시녀라…… 제법 재미있는 소재가 많단 말이지.”
파우스트는 마치 무언가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델피나는 레인을 감싼 채, 지팡이로 그를 경계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전투를 하게 된다면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델피나는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죽인다.”
그러던 중 들려온 한마디에 파우스트는 발을 멈추고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칼이 예리한 심홍색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꾸며낸 말투로 칼에게 말했다.
“전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막 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
스릉.
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비어벨을 뽑아 파우스트의 목에 갖다 댔다.
“오빠!”
예상치 못한 행동에 크게 놀라 몸이 경직된 아나스타샤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죠?”
거듭되는 거친 행동에 파우스트는 슬쩍 날카로운 눈을 뜨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조소하며 그에게 말했다.
“나 너 같은 또라이들의 성격을 잘 알아.”
“태어나면서 처음 들어본 말입니다. 흥미가 가는군요. 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선배님.”
진심으로 호기심이 생겼는지, 파우스트는 언짢은 감정을 접어두고 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칼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하찮은 것들은 내 가치를 이해하지 못해. 오직 데제스 님만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어. 이딴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
정곡을 찔린 파우스트는 말문을 잃었다.
칼은 비어벨을 거둬들이며 그에게 경고했다.
“난 너 따위 알아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칼은 델피나와 레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도리어 칼에게 호기심이 생긴 파우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랑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난 것 같은데, 그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질문에 칼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파우스트와 아나스타샤에게 답했다.
“이미 세상에 없으니까 궁금해할 필요 없어.”
순간 그 미소가 무척이나 흉폭하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슴 언저리에서 공포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했다.
주륵.
어느새 파우스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은 델피나와 레인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오, 오빠 괜찮아?!”
한참 후에야 칼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아나스타샤는 걱정되는 마음에 파우스트에게 다가갔다.
“허, 허세만 가득하네, 그렇지? 오빠가 먼저 선제 기습하면…….”
“……허세가 아니야.”
“오, 오빠?”
여동생의 말을 끊은 파우스트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따로 상처를 입은 건 아니나 그 서늘한 감각은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 남자. 진짜로 날 죽이려고 했어.’
만약에 그가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죽인다는 말을 허투루 들었다면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본 죽음의 위기에 파우스트는 공포와 희열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완전 광견이군.”
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자비한 남자라는 것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앞으로의 일이 기대됐다.
* * *
입학 후 어느 정도 학생들이 적응을 마치자 어느덧 가장 큰 행사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학생회장 선거였다.
다른 아카데미의 경우에는 학생회장은 큰 권한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게 크게 두각이 드러나는 행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르테스의 학생회장은 교수진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다.
학교 운영이나 교칙을 정하는 일 등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학생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특혜까지 있기에, 학생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파르테스의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전대 학생회장인 루시아는 무난하게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해마다 이때가 오면, 회의의 분위기는 늘 술렁였다.
어떤 방법으로 학생회장을 선출할 것이냐?
그걸 정하는 것은 학생회였기 때문이다.
전에는 여덟 학파에서 각자 추천하는 후보자를 내세워보기도 했지만, 인원수의 차이가 극명하기에 공정한 승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생이 투표를 하게 만든다면, 누가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
고심이 깊은 교수들을 보며 페트로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하하하하, 이것은 마치 데제스푸아르 학생에게 우리 교수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 같구먼.”
데제스의 실력은 이미 교수들과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뛰어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이곳에 있는 교수들의 프라이드가 너무나 높았다.
항의가 쏟아지려는 찰나, 페트로는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이 안건은 보류하지.”
그러자 교수진들 역시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긍하며 회의는 끝내려는 찰나였다.
고문 역할로 회의에 참석한 전대 학생회장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그나마 공정하게 선거를 치를 방법이 있긴 한데 말이죠.”
잠시 후.
그녀가 내놓은 제안에 모든 교수진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
학생회장 선출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스첼레투스 학파의 선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벅저벅.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파우스트는 자신의 존재를 뽐내며 복도를 걸었다.
데제스를 대신하여 나선 것뿐임에도, 위용이 넘쳐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며 그를 쳐다보았다.
반면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인원 역시 있었다.
“조금 전에 글라우벤 학파 소속의 글렌이 완전히 굴복해서 후보에서 자진 사퇴를 했다는데.”
“또 안 보이는 데서 협박하는 거 아니야?.”
“생긴 건 말끔하게 생겼는데, 뒤에서 하는 짓이 영…….”
데제스는 굳이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는 남들보다 훨씬 우월했고, 상대가 알아서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데제스에 비해서 한참 격이 덜어졌다.
데제스만큼 매력이 없어 경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면, 상대가 경쟁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면 된다. 그게 파우스트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파우스트를 바라보던 데제스가 피식 웃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릴리가 데제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쟤가 하는 짓이 치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신을 높이 사고 있어서.”
울컥!
교묘하게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말투에 릴리는 반박했다.
“과정이 정당하지 않으면 올바른 결과 역시 나오지 않아.”
“이상론이네. 현실은 그렇지 않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쪽이 원하는 결과를 쟁취하고, 정당함을 따지는 쪽은 패배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그저 자기만족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지.”
그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릴리는 어째서 데제스를 보면 기분이 나쁜 것인지 깨달았다.
“……칼과 너의 결정적인 차이가 뭔지 알아?”
“글쎄.”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데제스가 미간을 좁히자 릴리가 답했다.
“긍지야.”
“긍지?”
“너한테는 긍지가 없어. 데제스푸아르.”
릴리의 말을 곱씹던 데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확실히 일리는 있다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애초에 정도를 걸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
‘지고 싶지 않아. 증명하고 싶어.’
그에 릴리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머릿속에 있는 발언을 내뱉는 순간 데제스에게 적으로 인지될 것이다.
“내가 입후보해서 그 결과를 보여줄게.”
하지만 그런 생각과 별개로 그녀는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 난 이번 선거에 관여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선언에 데제스는 잠깐 놀랐던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너의 인망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긴 하지. 하지만 파우스트라면 무난하게 널 짓누를 거야. 어떤 방법을 가져와도 넌 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평소처럼 어김없이 그녀를 무시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꼭 그렇지도 않아. 이번 선거는 방법이 좀 재밌게 바뀔 거거든.”
때마침 등장한 칼이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스윽.
데제스는 차가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릴리의 옆에 선 칼은 데제스의 푸른 눈을 직시하며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스첼레투스와 룩스 루나에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학파는 후보자를 내는 걸 포기했다고 하더라고. 누군가의 간계 때문이려나? 그러니 사실상 입후보한 사람은 둘뿐이지.”
두 후보자는 바로 파우스트와 릴리아나였다.
“두 후보를 두고 학파마다 내부에서 투표를 하게 될 거야. 그리고 학파는 거기서 이긴 후보자에게 표를 줄 거고.”
“설마?!”
“네 생각대로야.”
칼의 말에 데제스는 처음으로 불쾌한 감정을 표출했다. 칼은 무뚝뚝한 얼굴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파우스트를 보며 말했다.
“난 저 밥맛없는 자식은 뽑지 않을 거거든.”
오닉스 스퀘어에는 학생이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8개밖에 되지 않는 표 중 하나는 무조건 릴리에게 향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스첼레투스 학파 역시 파우스트를 밀어주고 있었다.
결국 수많은 스첼레투스의 표와 칼리언트 한 명의 표가 같은 취급을 받게 된 셈이다.
“…….”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데제스는 낯빛을 굳혔다.
씨익.
반면 칼은 얄궂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정성껏 마련한 무대야. 지고 싶지 않으면 힘껏 발악해야 할 거야. 데제스푸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