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인간이 되어 살아가며 이 말의 진의를 깊이 느끼고 있는 칼이었지만.
‘이건 도무지 짜증이 나서 못 해 먹겠군.’
도저히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영역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르테스의 교양 과목 중 하나인 ‘음악’이었다.
현재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자유롭게 리라를 퉁기고 있었다.
두웅!
칼이 현을 퉁길 때마다 무척이나 둔탁해서 듣기가 싫은 음이 튀어나왔다.
“와! 저 정도면 완전 재능이 없는 거 아니야?”
“저런 점은 데제스랑 완전히 다르네.”
칼이 의외로 못 하는 분야가 있다는 것에 모두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찌릿!
칼은 조용히 수군거리는 남학생들을 노려보았다.
“히끅!”
그 시선에 바싹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같은 3학년이라도 엄연히 칼보다 한 살 위이건만.
그들은 이미 칼의 눈빛에 압도돼 스스로 굴복했다.
물론 칼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어째서 자신이 이 수업에 참여했냐는 것이다.
‘대체 이걸 왜 하는 건지. 원.’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교양 과목이었기에 딱히 학점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강해지기 위한 수련을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흥을 느끼기 위해서 음악을 창조한다라…….’
칼은 전생 시절에 체험하지 못했던 경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족이란 전투에서 자신의 힘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할 때만이 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다.
마족과 다르게 전투뿐만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흥을 느꼈다.
또한 악마와 다르게 굳이 정점에 서지 않아도 즐기고 만족했다.
이것이 여러모로 칼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귓가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음률이 울려 퍼졌다.
“?!”
모두가 놀라 귀를 쫑긋거릴 때였다.
“옆의 교실에서 잘생긴 애가 치고 있는데.”
한 여학생의 말에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우르르 옆 반으로 몰려갔다.
‘분명 괜찮은 음률이지만, 끝이 묘하게 날카롭고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모두가 호감을 느낄 때 홀로 수상함을 느낀 칼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발을 옮겼다.
디리링.
고운 선율을 자아내는 리라를 연주한 이는 금색의 장발을 묶어 자신의 어깨에 걸친 남학생이었다.
“쟤가 파우스트구나.”
“와아! 데제스가 그렇게 밀어주고 있는 애라고 하는데, 진짜 그 이유가 있었구나.”
“그보다 잘 생기지 않았어?”
“꺄아아악!”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학생이 호감과 찬사를 보낼 때, 파우스트는 연주를 멈추고 지그시 칼을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칼에게 걸어와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칼리언트 선배님. 파우스트라고 합니다.”
파우스트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칼은 받아주지 않고 팔짱을 끼었다.
괜스레 민망해진 파우스트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인사 정도는 받아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칼은 그에게 힐난의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
일순간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칼과 파우스트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아서였다.
파우스트는 미묘하게 경직된 얼굴로 칼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선배님. 초면에 실례인데요.”
칼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말은 잊지 않고 남겼다.
“데제스에게 언제까지 사냥개만 보낼 생각이냐고 대신 좀 물어 봐줄래? 이제는 조금 지겨워져서 말이야.”
“?!”
사냥개라는 대목에서 파우스트는 눈에 힘을 주며 칼을 쏘아봤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 * *
오닉스 스퀘어 학파 진영.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공부 중인 릴리의 앞에서 칼은 리라를 들고서…….
두웅!
다시금 둔탁한 음을 자아냈다.
그 소리에 놀라 깃펜의 펜촉으로 종잇장을 꼭 누른 릴리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느새 잉크가 종이 위로 커다랗게 번졌다.
“이렇게 끔찍한 소리는 처음이야.”
다재다능하다고만 생각하던 칼의 의외의 면모에 릴리는 화를 내기보다는 매우 놀랐다.
“이건 노력으로 안 되는 영역이야.”
검에 대한 재능은 탁월하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칼은 그것을 인정했고, 릴리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노력을 하는 건데?”
“글쎄.”
“뭐든 잘하는 것도 좋지만,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음악은 말이야.”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칼에게서 리라를 빼앗았다.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던 칼은 곧 묘한 모순을 발견하고는 지적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늘 출세하겠다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공부하는 릴리가 할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도 즐길 때는 즐긴다고. 공부만 하는 것 같지만 교우 관계도 꽤 신경 쓰고 있어.”
“출세를 위해서?”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친구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아.”
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현을 튕겼다.
띠링.
현을 타는 릴리의 모습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을 통해 울려 퍼지는 선율은 파우스트가 자아내는 것과 달리 깊고 청명했으며 무엇보다 가슴 속에다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
어느새 칼은 리라를 연주하는 릴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릴리가 리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씨익.
기분이 좋아진 릴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꽤 괜찮지? 승마는 못 하지만, 음악은 교수님들이 제발 이 길로 가달라고 애원할 정도라고.”
모처럼 칼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생겨서 기분이 좋은지 릴리는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홱!
“조, 조금 잘하는군.”
당황한 칼은 말을 더듬었다.
“칫! 칭찬해 줄 때는 확 해주라고.”
상당히 삐졌는지, 그녀는 칼을 쏘아봤다.
“크흠!”
칼은 헛기침으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하며 릴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다 잘하시는 숙녀분께서는 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어울리지 않게. 웬 숙녀?”
이것도 나름 칼이 장난을 걸어오는 것일까?
피식 웃던 릴리는 곧 진지하게 고민하다 답을 내놓았다.
“출세해서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게 사실 내 진심이야. 이런 거 있잖아. 아, 역시 릴리가 없으면 안 돼. 릴리만이 할 수 있어. 이런 인정을 받고 싶어. 너무 자아도취일까나.”
말해놓고도 쑥스러웠는지, 그녀는 민망한 웃음을 선보였다.
그러나 칼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꼭 그렇게 될 거야.”
“뭐?!”
깜짝 놀란 릴리는 반문을 했다.
“두 번 말 안 해.”
그러자 칼은 고개를 홱 돌리며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심술 맞네.”
릴리는 서운한 마음에 표정을 구겼다.
반면, 칼은 턱을 매만지며 자신이 내뱉은 발언에 대해 골똘히 고심하고 있었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째서?’
생전 처음으로 남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칼은 무척 당황하는 중이었다.
* * *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외진 숲.
갸르릉.
숲을 배회하던 바그로바는 나무 근처에 돋아난 버섯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같이 산책을 나온 레인은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바. 그거 독버섯이야. 절대 먹으면 안 돼.”
타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바는 독버섯을 앞발로 내려쳤다.
“푸훗!”
그 모습이 마치 반찬 투정을 하는 어린애 같아서 레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귀여워.”
무심코 내뱉은 말이 누군가와 겹치자, 레인은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그로바의 앞에 있는 금발의 소녀였다.
‘인형 같아.’
프릴이 달린 드레스에 검은 머리띠를 한 소녀.
그 모습이 마치 도자기 인형을 보는 것 같아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언뜻 봐도 귀족 소녀가 보일 법한 행동에 레인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소녀는 레인의 인사를 받아주는 대신, 바그로바를 향해 아이스 애로우를 날렸다.
푸푸푸푹!
?!
깜짝 놀란 바그로바는 잽싼 몸놀림으로 그것들을 피해냈다.
“지, 지금 무슨 짓이에요!”
레인은 그녀에게 소리를 쳤고,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가져가려는데,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그 고양이는 칼리언트 님의 애완동물입니다.”
갸아아아앙!
심각한 상황임에도 고양이란 말에 바그로바는 질색하며 레인을 쏘아봤다.
그 모습은 마치 ‘누가 고양이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칼리언트? 아, 그 파르테스의 망나니? 유명한 사람이기는 한데, 데제스 님만큼은 아니잖아. 경박하고 무례하다고 들었어.”
소녀는 피식 웃으며 단숨에 칼을 깎아내렸다.
울컥!
주인을 모독하는 것에 분노한 레인은 즉각 반박했다.
“함부로 남의 주인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보다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바바를 공격한 거죠?”
소녀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아나스타샤. 이번에 파르테스에 새로 입학한 학생이야. 저 고양이를 습격한 이유는…… 그냥 가지고 싶어서라고 할까.”
“가지고 싶다면서 죽이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크면 징그럽잖아. 그러니 귀여울 때 박제해놓는 게 좋다고 생각해.”
오싹!
청순한 외모와 걸맞지 않게 살벌한 취향에 레인은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 이상 해코지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바바, 이리 와!”
레인의 말을 들은 바바는 그녀에게 뛰어갔다.
“시녀 주제 어디서 건방지게 껴들어!!”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는 버럭 화를 내며 허공에 아이스 애로우를 생성해 레인에게 쏘았다.
“?!”
절체절명의 위기.
피할 수 없었던 레인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붉은 기운이 폭발하며 단숨에 아이스 애로우를 부스러뜨렸다.
“카, 칼리언트님.”
눈을 뜬 레인은 칼이 도와준 것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에 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바의 전신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바그로바는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표정을 한 채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바, 바바?”
익숙지 않은 그 모습에 레인은 어리둥절해 했고, 아나스타샤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그로바를 견제했다.
“흐음, 박제해 두려고 했는데, 오빠가 봤으면 눈 돌아갈 만한 소재네.”
바그로바에게서 피어오른 붉은 마력은 오히려 그녀의 흥미를 더욱 북돋웠다.
“역시 가져가야겠어.”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많은 아이스 애로우를 생성한 그녀는 단번에 바그로바와 레인을 노렸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그녀가 생성한 아이스 애로우가 기다란 아이스 스피어로 변했다.
푸푸푸푸푹!
그러더니 아나스타샤의 주변으로 꽂혀 그녀를 가두었다.
“이, 이게 어떻게?! 누구야!”
당황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델피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퇴학당하기 싫으면, 그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