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
광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휘잉!
칼리언트와 데제스.
두 사람은 메노스 템벨의 테러를 손쉽게 막아내었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교수진들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칼은 입학생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여기에 들어온 녀석들이라면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겠지? 돈, 가문의 영광 등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음성 증폭 마법을 쓴 것처럼 모두의 귀에 선명히 들렸다.
칼의 말에 입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을 뽐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슬그머니 쳐다본 칼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그건 너희 게 아니잖아.”
“?!”
갑작스레 분위기가 급변했다. 정곡을 찌르는 칼의 말에 신입생들이 움찔거렸다.
칼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거로 개수작 부리다가 내 눈에 띄면 죽는다.”
칼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입학생들은 동요했다.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그, 그래도 파르테스의 교칙을 생각하면 맞는 말 아니야?”
대다수는 당혹해했고, 일부만이 긍정하거나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라. 이상한 친목질에 놀아나지 말고.”
축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뭐, 뭐 저런 놈이 있어?!”
이번에도 전통과 격식을 깡그리 무시한 칼의 행동에 교수진들은 일제히 분노를 터뜨렸다.
휙!
그 힐난의 시선은 모두 오닉스 스퀘어 학파의 교수 맥캘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칼을 가르치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왜, 왜 그러시죠?”
꿀꺽!
교수진들의 눈치를 살피던 맥캘리는 남몰래 먹고 있던 쿠키를 재빨리 목구멍으로 넘겼다.
하지만 완전히 증거를 감출 수 없었는지, 입가 주변에 가루가 묻어있었다.
빠직!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맥캘리!!!”
분노한 교수진들은 일제히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래야 칼이기는 하지.”
잠시 후 교수진과 왕국의 병사들이 사건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한차례 소동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일정이 급하게 진행되었으나, 데제스는 격식을 갖추고 축사를 진행했다.
칼과는 다른 그의 말에 많은 입학생들이 감명을 받았다. 그중에는 심지어 벌써부터 데제스를 신봉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데제스가 예상했던 상황과는 달랐다.
그중 절반가량은 칼에 대해 수군거리거나 혹은 칼과 데제스의 축사를 비교하기도 했다.
‘잘은 몰라도 데제스가 원하는 그림은 아닐 거야.’
물론 축사를 하고 있는 그의 속내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칼의 등장으로 데제스의 절대적인 존재감에 미묘하게 균열이 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긍정적인 소식이라 생각하던 릴리는 무심코 칼과 같이 있던 아리따운 여학생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누구지?’
릴리는 칼의 뒤를 쫓아다니는 델피나를 바라보다가…….
‘왜 화가 나는 거지?’
저도 모르게 뚱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 * *
거하게 신고식을 치른 칼은 만족한 표정으로 나무 그늘에 몸을 눕혔다.
칼의 옆에 앉아있던 델피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선배는 원래 그렇게 독선적인가요?”
“무슨 의미야?”
눈을 감고서 잠을 취하려던 칼은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며 대꾸했다.
이미 익숙해졌는지 델피나는 검지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너희는 못났고 난 잘났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사실이잖아. 뭐가 문젠데?”
“…….”
엄청난 자신감에 델피나는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칼은 천천히 눈을 뜨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원래부터 혼자여서 남의 눈치는 안 봐. 왜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죄, 죄송해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칼의 얼굴에 델피나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어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칼은 그녀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거야. 물론 갱생 중이라서 참는 것도 여러 가지 있지만.”
“갱생이요?”
엉뚱한 답변에 델피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있어. 그런 게.”
다시 한번 자신의 상황을 자각한 칼은 차이트에게 패배한 과거를 떠올렸다.
마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도 완전히 패했다.
차이트는 미쳐 날뛰는 칼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삶과 사명을 부여했다.
졸지에 절대자에서 시간의 신의 사도가 되었지만, 칼은 굴욕을 느끼기보다는 차이트와의 재결투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그 녀석 얼굴에 주먹을 꽂을 수도 없어.’
전생과 비교해서 지금 그가 지닌 힘은 티끌과 같았다.
“그 녀석과의 결투는 먼 훗날의 일이야. 지금은 이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가는 위기를 막는 게 먼저다.”
사명을 자각한 칼은 슬쩍 델피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체가 뭐지?”
델피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검지로 배배 꼬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는데, 그 질문 한참 늦은 것 같은데요. 더군다나 파르테스에서는 자기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되잖아요?”
“칼리언트 슈타크다. 지금은 오닉스 스퀘어 학파에 소속돼 있어.”
거침없는 자기소개에 델피나는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칼이 이렇게 나온 이상, 그녀 역시 정체를 숨길 수만은 없었다.
“델피나 아코니트에요. 소속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엘레멘탈 스피릿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코니트라…….”
대륙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마도 가문의 이름이었다.
그 어느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마탑을 운영하는 가문.
하지만 칼은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렸다.
“너도 에클라 세트겠지?”
“……글쎄요. 하하”
칼의 지적에 델피나는 난처한 웃음을 보였고 칼은 지그시 눈매를 좁혔다.
‘역시 이실리아는 파르테스로 에클라 세트를 집결시키려는 거 같군.’
지금까지 칼이 만난 에클라 세트는 총 네 명이다.
산크투아리움의 차기 교황인 데제스.
이실리아의 푸른 물결 기사단장인 에릭 듀란트.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그의 스승인 맥캘리.
마지막으로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신입생 델피나였다.
‘에릭의 말대로라면 1년 안에 에클라 세트가 집결하는 자리가 생긴다. 그때는 나머지 세 명도 볼 수 있겠지.’
적어도 2~3년 후면 이 재능의 폭주자들은 명성을 떨칠 것이다.
“점점 학교생활이 재밌어지는군.”
칼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다 곧 델피나를 휙 쳐다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정정했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뭐, 뭔데요?”
괜히 긴장한 델피나는 쭈뼛쭈뼛 칼을 쳐다봤다.
칼은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요구사항을 말했다.
“칼이라고 부르지 마.”
“…….”
뭐야? 겨우 그거였어.
델피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요. 그냥 편하게 칼 선배라고 부를래요. 그 정도는 제 마음이잖아요.”
“내 의지가 전혀 방영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아무도 선배를 칼이라고 안 부르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요.”
델피나는 빼꼼 혀를 내밀며 상쾌하게 웃었다.
“당돌한 녀석이군.”
앞으로 흥미진진한 만큼 골치 아픈 일도 생기겠다 싶은 마음에 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데제스의 저택에서는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본래 데제스는 조용한 걸 좋아했으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외부에서 초청한 악단들이 경쾌한 리듬의 곡을 연주했고, 무도회장에서는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데제스는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흔들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륵.
곁에 있던 모리스는 그런 데제스를 보며 긴장했다.
연회의 규모 자체는 작았으나, 들어가는 음식이나 악단을 초청하는 비용 등 세세한 부분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사치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 데제스가 이 정도 돈을 썼다는 것은 지금 기분이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억지로라도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해 분노를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 녀석 때문이라면 어떻게든 내가 처리할게. 데제스.”
모리스가 칼을 떠올리며 제안을 하자, 데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력이나 암투로 승부를 보는 것도 재밌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야.”
“다른 방식이라니?”
모리스는 두 가지 의미에서 깜짝 놀랐다.
첫 번째는 데제스의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
두 번째는 데제스가 칼을 자신의 호적수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데제스는 오른손에 턱을 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곧 파르테스를 떠나. 3학년 애송이들을 진압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러니 내가 떠난 뒤 이곳에 영향력을 끼칠 사람이 필요해.”
모리스는 자연스럽게 데제스가 하려는 말을 내뱉었다.
“……학생회장.”
그의 답변에 데제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직접 나가면 쉽게 끝나겠지만, 이번에는 다른 후보를 밀어줄 생각이야.”
“그건 누군데?”
모리스의 질문에 데제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동시에 데제스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남성 한 명이 파트너를 대동한 채로 멋들어진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화려한 금발을 지닌 남녀 한 쌍.
인형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지닌 두 사람은 연인이라기보다 남매에 가까워 보였다.
남자는 절도 있게 예의를 갖추며 데제스에게 인사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제스님.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이군. 파우스트.”
‘파우스트?!’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으나, 그 이름을 들은 모리스는 몸을 떨었다.
본명은 파우스트 펠레스.
검이나 마법 같은 것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의학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녔다.
아직까지 신성력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사제들과 달리 그는 그만의 특별한 기술로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려한 입담과 재주로 사교계에서도 떠오르는 태양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는 데제스를 통해 이미 이 남자의 흉악한 면을 알고 있었다.
‘키메라 제조자까지 무릎 꿇렸군. 데제스.’
겉으로는 선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파우스트는 음지에서 생명을 도구처럼 다루는 잔학한 의사였다.
불과 16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의 흉폭함을 아는 이들은 누구나 꺼려했다.
“이쪽은 제 여동생인 아나스타샤입니다.”
“아나스타샤 펠레스에요. 데제스님께 인사드립니다.”
뒤이어 파우스트는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했고, 아나스타샤는 양쪽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데제스와 모리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들의 등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데제스, 설마…….”
“맞아. 이 녀석이 날 대신해 학생회장 후보로 나설 거야.”
데제스는 양손에 깍지를 끼며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파우스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하하, 제가 어떻게 데제스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다만 그동안 쓸모없는 부하로 인해 고초를 겪으신 데제스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왔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리스는 마음에 안 드는지 눈매를 좁히며 파우스트를 노려보았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파우스트는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항변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꽈아악!
그러나 일전에 에리얼과 프랭크가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모리스는 주먹만 으스러져라 쥘 뿐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기대하지.”
데제스는 파우스트 남매를 쳐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