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데제스와 칼.
이 두 사람의 싸움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에릭 듀란트였다.
그는 전에 사용하던 창 대신에 푸른색의 창을 들고 있었다.
푸른색 창은 얼마나 단단했는지 명검 두 자루를 튕겨내면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에클라 세트는 역시 다르군.’
여기서 일이 더 커져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칼은 비어벨을 검집에 넣었다.
흥이 식었는지, 데제스 역시 아르젠트 파우라를 거두었다.
데제스의 시선이 에릭에게서 그의 창끝으로 옮겨갔다.
“……바다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마레라이트로 만든 레밍호프의 역작, 신창 아인벨레. 드디어 제 주인을 만났나 보군.”
“흐음.”
데제스가 무구의 정보를 정확히 꿰뚫자, 에릭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외에도 아는 게 더 있을 것 같은데?”
“에릭 듀란트, 이실리아의 푸른 물결 기사단의 단장.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그 역량을 인정받아 최연소 스피어 마스터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과 에클라 세트 중 하나라는 것 정도?”
“좀 아는 게 아니라 아예 줄줄이 꿰뚫고 있네. 나름 기밀 정보인데.”
에릭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 차며 말했다.
“페트로 님에게 이야기는 들었으니 이번 난동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어. 하지만 적당히 해두는 게 좋을 거다.”
“그러지.”
짤막하게 대답을 마친 데제스가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 찰나.
“잠깐만요.”
칼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델피나가 데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한테 용건이 있나? 델피나.”
“?!”
데제스가 서슴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델피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사람 날 알고 있어?!’
그러다 이내 그녀는 동요를 숨기며 데제스에게 말했다.
“……당신이 쓴 그 기분 나쁜 마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눈도 깜빡하지 않을 수 있죠?”
데제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에 일일이 얽히다가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어. 민간인을 신경 쓴 결과 어떻게 됐지? 저 남자는 지금 범죄자들을 탈옥시킨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을 한 거야.”
데제스는 칼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울컥!
격분한 델피나는 쌍심지에 불을 켜며 반박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그 범죄자들이랑 다를 바 없는 거잖아요! 그건 위선이에요!”
“흐음.”
논쟁이 생각보다 거칠어지자 에릭은 난감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데제스는 그런 그녀의 논리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가 아가씨의 논리네. 원래 세상은 그럴듯하게 말을 바꾸면 대의명분이 만들어지고 악이 선으로 포장되는 거야. 그걸 이용 못 하는 놈은 도태되다 사라지지. 바로 분수도 모르는 너처럼.”
데제스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델피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움찔!
심연과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델피나는 의외의 사실을 알아챘다.
얼핏 보면 가소롭다는 눈이지만, 좀 더 들여다보자면 그 눈에는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오싹!
델피나의 가슴 속에 슬그머니 공포심이 일렁일 때.
칼이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
당황한 델피나가 동공을 파르르 떨 때, 칼은 데제스를 향해 역으로 비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용건 다 봤으면 꺼져. 어린애 괴롭히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쓸데없는 논쟁을 하게 됐군.”
데제스는 그대로 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근데 있잖아.”
그 타이밍에 칼은 슬그머니 한마디를 내뱉었고.
데제스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너처럼 찌질하게 안 굴어도 이 녀석이 말한 그대로 다 할 수 있거든.”
그리 말하며 칼은 델피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
단순히 위세를 떠는 것뿐일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그 말에 델피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데제스는 싸늘한 눈으로 칼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그 허세가 어디까지 먹힐지 기대되네. 네 발언에 대한 책임은 오늘 네가 놓친 녀석들을 잡는 걸로 져야 할 거다.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말이야. 그 녀석들이 입학식에서 수작을 부릴 놈들이거든.”
넌지시 한마디를 내뱉은 데제스는 그대로로 걸어갔다.
“어지간히도 말이 많은 녀석이군.”
발언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던 칼은 인상을 홱 찌푸렸다.
한편 칼이 여전히 자신의 머리에서 손을 안 떼자 델피나는…….
“이제 그만 손 내려주시죠.”
라고 요구했고, 그제야 칼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조금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모자를 꼭 눌러썼다.
이에 에릭은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오, 여러모로 숙녀들이랑 사이가 좋네. 그 아가씨가 누군지는 알고 있나?”
“어디 한 나라의 공주나 귀족이겠지.”
칼은 별 흥미가 없는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언제 오게 된 거지? 그 무기는 뭐고.”
어깨를 으쓱거린 에릭은 신창 아인벨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사단장으로 부임한 지는 며칠 안 됐고. 이건 여왕 폐하께서 하사하신 무구야. 기사 단장 정도 되면 그에 걸맞은 무구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
바로 그때.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다수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처음에는 치안군이 몰려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에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델피나에게 몰려 있었다.
“요란스럽군.”
“그러게나 말이에요.”
델피나는 한숨을 쉬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안경을 고쳐 쓰더니 칼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밤은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조만간 동료분들과 함께 제가 초대하는 자리에서 봬요. 오늘만큼 근사한 저녁을 대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그러지.”
“인사가 너무 짧다고요.”
짤막한 칼의 대답에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 * *
델피나를 배웅한 칼은 곧장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항구 근처에 자리 잡은 술집 바실레마에서 에릭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쨍!
힘껏 맥주가 흘러넘칠 정도로 칼과 잔을 부딪친 에릭은 그것을 꿀꺽 들이켠 뒤,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 어지간히 사고치고 돌아다니는구나.”
“어떻게 알았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맥주를 들이켠 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에릭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저기 사장님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장사를 포기하고 너만 바라보고 있잖아.”
에릭의 말대로 사장은 양손으로 봉을 쥐고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칼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뜨끔한 칼은 어깨를 움찔거리다 곧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한번 뒤집어 놓은 적은 있었지. 그래도 깔끔하게 보상은 했다고.”
“너답다면 너답네.”
마검 블러디아를 쓰러뜨릴 때의 일을 떠올린 에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칼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홀짝 들이켰다.
“아, 미안. 그래도 이해해달라고. 네가 벌인 기상천외한 일들에 대해 공주마마께 많이 듣고 있거든.”
“의외의 협조자가 그 공주마마기도 하지.”
칼은 피식 웃다가 곧 진지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곳에서 설쳐대는 녀석들은 누군데?”
너무나 난감한 질문이었다. 이미 페트로에게 칼과 데제스가 입학식을 강행하려고 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고심에 잠겼다.
‘이미 데제스는 녀석들이 누군지 알아챈 듯싶군.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칼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을 텐데…….’
데제스푸아르.
에클라 세트의 일원인 그가 진심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에릭이라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패배할 확률이 높겠지.’
데제스의 재능은 에클라 세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우월했다.
이미 그 수준은 학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 녀석의 승리를 바란다고.’
에릭은 별수 없이 알고 있던 정보에 대해 말해 주었다.
“녀석들은 메노스 템벨이라는 비밀 결사야. 규모는 아직 짐작이 안 되지만 상당한 실력자가 있더군.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은 제로베이스에서부터 시작하는 평등, 즉 신분제의 타파야. 그래서 그 목표에 방해되는 귀족과 황족들을 없애려는 거야.”
“그딴 게 없어져도 명칭만 달라질 뿐, 인간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어.”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힘으로 모든 것을 가지려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마왕 시절에 겪은 바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에릭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럴싸하지 않아? 참고로 저 말에 빠져든 자들을 제레타(신앙자)라고 불러.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레타를 지배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거야. 바로 메이거스(마법사)이지.”
“아까 그 두 마리인가?”
칼은 데제스가 하얀 손으로 붙들려고 하던 이들을 떠올렸다.
한 명은 전형적인 마법사의 복장을 한 중년의 노인이었고.
또 한 명은 그리폰 날개가 달린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제스의 활약으로 그 두 명을 포함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투 처리한 상황이야. 내 예상이지만 아마 당분간 모습을 감출 듯 싶은데.”
에릭의 말에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뭔데?”
“이 정도의 근성을 가진 놈들이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 불나방들은 많이 만나봐서 알아. 놈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멈추지 않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에릭의 반문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목숨을 바쳐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겠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리고 질 높은 희생자가 많이 모이는 날을 목표로 삼을 거야.”
전생 마왕 시절에 마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성이었다.
그들은 전투 본능과 힘을 과시하는 데에 사로잡혀 두려움을 모르고 날뛰던 불나방들이었다.
그리고 메노스 템벨이란 이 집단은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반푼이들이지.’
칼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학식이겠군.”
에릭은 벌써부터 골이 아픈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지그시 미간을 좁혀 칼을 쏘아봤다.
“그나저나 너, 나보다 어린놈이 왜 이렇게 세상 경험을 많이 한 것처럼 말하냐?”
칼은 왼쪽 눈을 감으며 나른한 어조로 답했다.
“너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지.”
“참나. 헛소리 그만하고 잔이나 들지.”
쨍!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린 에릭은 다시 한번 칼과 건배를 했다.
* * *
이실리아에 위치한 미스틱 마운틴.
깊은 산속에 은신처를 마련한 메노스 템벨의 메이거스 줄라탄은…….
우드득!
뀌에에에에엑!
산속을 헤집어 찾아낸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 물어뜯는 기행을 벌이고 있었다.
가죽과 살점이 뜯어져 나가고 뼈가 부스러지는 고통에 멧돼지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줄라탄의 악력에 멧돼지의 모든 뼈가 부서져 버렸다.
뀌에에에에엑!
멧돼지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젠장! 하아, 하아.”
당연하지만 인간은 가죽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줄라탄은 상관없다는 듯이 뜯어 먹고 있었다.
스스스스.
그와 동시에 데제스의 공격에 날아간 손이 서서히 재생됐다.
“영양만 보충하면 재생하는 몸이라니, 한없이 부럽군”
인상을 구기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후크는 망토를 벗어둔 다음 긴히 명상에 잠겼다.
그는 아직 데제스라는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7서클에 도달하기까지 40여 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그런데도 그 녀석은 대체…….’
빠득!
모두가 7서클이 무척 굉장한 경지라고 칭하지만, 데제스의 앞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압도적인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우린 그 녀석을 이길 수 없어.”
“시끄러워. 그게 뭐 어쨌다고?”
상처를 회복한 줄라탄은 후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녀석만 빼고 다 죽이면 되는 거잖아. 그러고 나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고.”
단순무식한 놈.
그리 생각하면서도 후크는 저도 모르게 줄라탄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목적은 데제스를 이기는 것이 아닌 세상에 자신들의 뜻을 표출하는 거다.
“귀족가의 핏줄을 끊어버리고 라흐만 대륙의 역사를 피로 적셔야지.”
결의가 서니 어느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하늘에 떠오른 불그스름한 달을 쳐다보며, 후크는 비장하게 웃었다.
“죽기 좋은 날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