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삽화)
서걱!
카아아앙!
새하얀 빛줄기가 끊임없이 궤적을 그려나갔다.
카앙! 카앙! 카앙!
그 궤적에 닿은 메노스 템벨의 제레타(신앙자)들은 몸이 얼어붙더니 이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데제스는 우아하게 검을 휘둘렀다.
스릉.
수십의 사람을 베었음에도 그의 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고, 칼날 역시 너무나 멀쩡했다.
“마, 마검 아르젠트 파우라. 저, 저걸 사람이 다룰 수 있다니!”
데제스가 휘두르는 검을 알아본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르젠트 파우라.
은의 공포라 불리는 그것은 북방의 설원 지방인 툰드라에서만 생성되는 희귀한 금속인 아이스 스키르탈로 만든 마검이었다.
설원의 요정 손에서 탄생한 이 검은 검신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검신은 절대 녹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을 동사시켜버리기도 했다.
스릉.
그런 아르젠트 파우라가 데제스의 손에서 고결하게 자신의 기운을 방출하고 있었다.
“네놈!!!”
분노한 줄라탄은 팔을 미노타우로스의 것으로 변형시킨 뒤 데제스를 향해 휘둘렀다.
서걱!
하지만 그 일격이 데제스에게 닿기 전, 새하얀 빛줄기가 줄라탄의 주먹을 스쳐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이어서 줄라탄의 주먹 일부가 얼어붙더니 깨져나갔다.
빠득!
“으아아아아악!”
줄라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신 이빨을 갈더니 괴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엄호하고 있던 후크는 재빨리 데제스의 주변으로 불꽃을 집약시켰다.
화르르르륵!
바닥에서는 불꽃이 원형을 그렸고, 주변 곳곳에서는 파이어 애로우가 날아들었다.
이윽고 데제스의 발밑으로 플레임 써클이 치솟았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발을 뺀 줄라탄은 후크에게 소리쳤다.
“당장 퍼부어!”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얼굴에 식은땀을 한가득 흘리던 후크는 완드를 휘둘러 템페스트 마법을 사용해 불꽃을 확산시켰다.
화르르르륵!
콰콰쾅!
살아남은 제레타들이 일제히 파이어볼을 난사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불이야!!!”
불길이 건물 밖으로 퍼지며 확산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후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옆에서 화염 마법을 퍼붓고 있는 중간 계급 아뎁타스 마이나(소달인)에게 말했다.
“거기 너!”
“네, 네!”
“쉬지 말고 계속 공격해!”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그는 힘차게 답한 뒤, 정신없이 화염 마법을 난사했다.
화르르르르륵!
어두컴컴한 밤인데도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대낮처럼 밝았다.
그 강력한 불길에 동상을 입은 주먹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던 줄라탄이 중얼거렸다.
“해, 해낸 건가?”
하지만 후크의 대답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럴 리 없잖아. 도망쳐.”
“뭐?!”
콰아아아아앙!
줄리탄이 반문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의 손 형태를 한 하얀 마력 덩어리 수십 개가 화염을 뚫고 튀어나왔다.
“저, 저건 뭐야?!”
그 손들은 메노스 템벨 인원들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쩌저저저적!
“크아아아아악!”
하얀 손에 붙잡힌 자들은 일제히 몸이 동결되더니 흰자위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얼음 동상들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콰아아아아앙!
“히익!!!”
그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메노스 템벨의 일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후크에게 전장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아뎁타스 마이나(소달인)는 허무한 표정으로 손을 늘어뜨렸다.
반항해봤자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덥석!
콰아아앙!
그런 남자의 얼굴을 하얀 손이 어김없이 움켜쥐어 존재를 파멸시켰다.
한편 그들을 남기고 도주를 선택한 후크와 줄라탄의 등에는 식은땀이 한가득했다.
커튼처럼 젖혀진 불길 사이로 하얀 손을 다루는 데제스가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크는 뒤늦게 데제스가 음지에서 불리는 이명을 떠올렸다.
“디, 디아블로 비안코(하얀 악마)!”
“말하지 마. 저 하얀 손에 닿지 않게 배리어나 치고 있어!”
그리폰의 날개를 꺼내든 줄라탄은 후크를 안아 들고 허공으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범인으로는 도저히 잡을 방법이 없는 속도와 높이었다.
그걸 보며 데제스는 냉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재밌겠는데. 숨바꼭질 꽤 즐기는 스타일이거든.”
쇄애애애액!
동시에 수백 개의 하얀 팔이 기다랗게 늘어지면서 날아들었다.
“으아아아악! 오지 마!!!”
경악한 후크는 배리어를 치는 것과 동시에 록 스피어 마법을 연사했다.
콰콰콰콰콰쾅!
7서클의 마도사가 쏟아내는 바위의 파편들이 하얀 팔들을 요격해나갔다.
“꺄아아아악!”
바위 파편에 터져 나간 하얀 팔 중 일부는 사람들을 향해 떨어졌다.
저 팔에 닿으면 어찌 될지는 뻔했으나 데제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칭!
콰아아앙!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붉은색 마력이 요동치며 록 스피어와 하얀 손들을 단숨에 깨뜨렸다.
타깃을 놓친 데제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 저자는 뭐야? 서, 설마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킨 거야?”
또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후크는 길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칼을 발견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 *
“이 괴물 새끼! 히끅!”
모처럼 수준 높은 안주들 덕분에 흥겨웠던 슈미트는 오랫동안 디아나 몰래 보관하고 있던 비싼 명주를 칼과 나눠 마시다 반쯤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맛과 향은 뛰어나지만 도수가 너무나 높아서 물로 희석해서 마셔야 했다.
쭈욱.
그런 술을 칼은 약간의 물만 타서 마셨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간인 칼도 멀쩡한데 명색에 술과 낭만을 즐기는 드워프가 질 쏘랴?
오기를 부리던 슈미트는 결국…….
털썩!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게 왜 고집을 부려가지고…….”
술 싸움의 결말을 예상했던 디아나는 슈미트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디아나의 몸으로 육중한 슈미트를 옮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됐어. 내가 할게.”
칼은 마치 짐짝을 드는 것처럼 슈미트를 허리에 낀 뒤.
콰앙!
그대로 방문을 열어 슈미트를 침대에다가 던졌다.
슈미트는 ‘끄응, 썩을 놈’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몸에 이불을 둘둘 말고서 잠에 빠졌다.
“…….”
그 광경을 지켜본 디아나와 델피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델피나는 결국 한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막 다루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칼의 태도에 델피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라.”
“그러네요. 이제 가야 할 시간이네요.”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뛰어넘었다.
델피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길거리에서 본 사람들은 제 호위 기사들이에요.”
“알고 있어.”
“알고 있었다고요?”
무덤덤한 칼의 대답에 델피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의가 없었으니까.”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네요.”
칼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볼 수 없었던 델피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실리아에 오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호위 기사를 너무 많이 붙여주셔서 곤란한 참이었어요.”
“가정 사정까지 내 알 바는 아니지.”
냉담하게 말한 칼은 몸에 코트를 걸친 뒤, 델피나에게 외투를 던져주었다.
“?”
칼의 행동에 델피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당신까지 외투를 입는 건가요?”
그 질문에 칼은 귀찮다는 듯 툴툴거렸다.
“야밤에 여자를 홀로 가도록 하는 건 기사의 소양이 아니니까. 정말이지, 귀찮네. 기사도라는 건…….”
끼익!
칼은 문을 열어젖히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와.”
“네, 네!”
멍하니 있던 델피나는 칼의 짤막한 말에 걸음을 서둘렀고.
디아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배웅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잠시 후.
칼과 함께 거리를 배회하던 델피나는 쭈뼛쭈뼛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일은 고마워요. 이렇게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만나서 밥을 먹은 건 처음이에요.”
낯선 경험에 가슴이 설렜는지 그녀는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따라다니지 마.”
“애초에 전 아무나 따라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칼리언트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오늘처럼 또 따라다닐 거에요.”
“…….”
칼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앗! 방금 귀찮다고 생각했죠?”
“아마도.”
“정말이지, 그렇게 쉽게 수긍하지는 말아주세요.”
눈치가 어지간히 빠른지 칼의 기분을 읽은 델피나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델피나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요.”
“저쪽인가?”
그녀가 말을 했을 때 이미 칼은 도시의 중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때마침 그쪽에서 거대한 화염 기둥이 용솟음쳤다.
그리고 이어서 요사스러우면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하얀 손이 그 불길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어, 어떻게?!”
델피나는 두 가지 이유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는 하얀 마력으로 이루어진 손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과 거의 같은 속도로 불길을 감지해낸 칼 때문이었다.
“사냥을 시작한 건가, 데제스?”
심지어 칼은 하얀 손을 부리는 실체마저 알아챈 듯 보였다.
콰아아아아앙!
그 와중에도 격전은 요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모인 하얀 손들이 두 명의 사냥감에게 죽음의 손길을 뻗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인지 반항이 거세었다.
사냥감들이 난사한 록 스피어 마법에 결국 하얀 손들 중 하나가 터지더니 시민들을 향해 떨어졌다.
“꺄아아아아악!”
거리에 있던 한 명의 여성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위험해요!”
깜짝 놀란 델피나가 저도 모르게 나서려고 했다.
“쓰레기 새끼가.”
그보다 먼저 데제스의 만행에 분노한 칼이 나서며 즉각 트리거를 발동했다.
* * *
메노스 템벨을 소탕하는 작전은 칼이 중간에 개입함으로 인해 실패로 끝이 났다.
타닥, 타닥.
엉망진창이 된 격전지에서 빠져나온 데제스는 칼의 목에다 아르젠트 파우라를 갖다 댔다.
스릉!
동시에 칼 역시 비어벨을 꺼내 들어 데제스에 목에 대었다.
“자, 잠시만요.”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을까?
안절부절못하던 델피나는 그들을 만류하려고 했으나 어림없었다.
데제스는 싸늘한 눈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냐오냐해주니까 이제는 대놓고 훼방을 놓는군. 내가 어디까지 참아줄 것 같아?”
이에 칼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참지 말고 덤벼. 언제부터 이렇게 소심해졌을까? 데제스푸아르.”
거침없는 도발에 데제스는 검 끝에 힘을 주었고, 칼 역시 힘을 주었다.
서로의 검이 상처를 주기 직전.
카앙!
갑자기 창 한 자루가 파고들어 두 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
“?!”
데제스와 칼은 놀란 듯 동시에 눈을 부릅떴고, 창의 주인인 에릭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적당히 해. 이 또라이 자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