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칼의 뇌리로 그동안 이실리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흑마법사 조직인 갈까마귀의 부리를 퇴치하기 위해 섬 곳곳에 저주를 흩뿌린 산크투아리움의 이단 심문관들.
왜인지 그들은 묘하게 데제스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결국 칼에 의해 그들은 배와 함께 하나도 빠짐없이 바닷속에 처박혔지만.
‘모든 일이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기왕 섬에 들어왔으니 그들을 이용해서 나에게 엿을 먹인 거군.’
불쾌한 감정이 칼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번에도 악수는 안 해줄 건가?”
데제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손을 내민 행위는 두 가지를 뜻했다.
포섭될 것이냐? 아니면 적대할 것이냐?
산크투아리움은 루콘조차 집어삼킬 정도의 막강한 대국이었다.
차후 많은 국가와 국경선을 맞댄 알테어로 돌아가야 하는 칼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맞았다.
손익을 따지면 손을 잡는 게 마땅했다.
스윽.
그러나 칼은 이번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악수를 거부했다.
“호오.”
페트로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둘을 지켜보았고.
칼은 피식 웃으며 데제스에게 말했다.
“내숭 부릴 것 없어. 사실 이렇게 나와 주길 바랐잖아? 만약 네 역량만으로 안 될 것 같으면 그 잘나신 신분으로 날 찍어 눌러도 상관없어. 어차피 굽혀줄 생각은 없으니까.”
“?!”
칼이 자신조차 몰랐던 속마음을 간파하자 데제스는 잠시 동공을 파르르 떨다 입을 열었다.
“아아, 역시 넌 정말 재미있어.”
이어서 한마디 더 하려던 데제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페트로의 권위를 배려해서 말 대신 사념을 날렸다.
[언젠가 네놈의 머리를 반드시 짓밟아주지.]
그에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데제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그대로 학장실을 빠져나갔다.
“하하하하, 성정이 참 괴팍한 친구야.”
그 광경을 인상 깊게 바라보던 페트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훈훈하게 웃었다.
데제스는 그런 페트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것은 규칙 위반이니, 벌점을 받아야 되겠죠?”
파르테스의 교칙상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 때문에 서로의 신분을 몰래 캐고 다니는 기이한 문화가 탄생했다.
데제스의 질문에 페트로는 털털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됐네. 난 그렇게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네. 오히려 좋지. 이 시대를 대표할 천재들의 격돌은 가슴을 설레게 만들거든.”
페트로가 능글맞게 웃자 데제스는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아, 그리고 월반 시험은 해결했습니다. 제 요청은 기억하고 계시겠죠.”
“아아, 그거라면 물론 준비했네.”
서랍을 연 페트로는 목함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목함을 열자 내부에는 쿠션 담겨 있었고, 그 위로 자그마한 돌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돌에서는 미심쩍은 기운이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페트로는 진지한 눈으로 데제스에게 말했다.
“기생수, 타라의 씨앗의 화석이라네.”
* * *
해가 진 후.
수업을 마친 칼은 바그로바와 함께 시내를 걷고 있었다,
바그로바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칼의 발뒤꿈치를 양발로 붙잡으려는 듯 폴짝 뛰었다.
칼은 어김없이 발로 바그로바의 얼굴을 스윽 밀어내었다.
“레인 녀석 아직도 시일이 걸리나 보군.”
본래라면 수련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지만 칼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레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스스로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로웰은 특훈을 하느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친한 릴리와 에리는 여자 기숙사에 머물고 있어 만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칼의 발길이 향한 곳은 디아나와 슈미트가 머무는 숙소였다.
“일일이 밥을 해 먹는 것도 귀찮은데…… 인간의 몸은 번거롭군.”
귀찮아하던 칼은 이내 진지한 눈으로 생각했다.
‘혼자 밥을 먹으면 되지 않나? 난 언제부터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게 당연해진 거지?’
같이 밥을 먹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간다?
스스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칼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묘하게 발이 허전해 뒤를 돌아보니 바그로바가 보이지 않았다.
“바그로바!”
칼은 소리를 내어 바그로바를 불렀다.
끼잉!
들려온 바그로바의 목소리에 칼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모자를 눌러쓴 소녀가 바그로바를 끌어안고 있었다.
에메랄드 같은 눈에는 렌즈가 없는 뿔테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그걸 본 칼은 다소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어휴, 가만히 있어 봐.”
바그로바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칼은 슬그머니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거지?”
“응? 왜?”
소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바그로바는 칼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척!
칼은 그런 바그로바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내 고양이인데.”
갸아아아앙!
어지간히 자긍심이 강한 것인지 고양이라는 말에 바그로바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계속 발로 밀어내고 있어서 집 잃은 고양이가 아무나 쫓아간다고 생각했어요.”
갸아아앙!
처음 본 소녀까지 자신을 고양이 취급하는 것에 분노한 바그로바가 신경질을 냈다.
칼은 바그로바의 코를 툭 치고는 소녀의 품에서 빼내었다.
“……죄송해요.”
소녀는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수그렸다.
꼬르륵.
그때 배에서 허기진 소리가 났다.
“읏!”
얼굴을 홱 붉힌 그녀는 재빨리 양손으로 배를 가리며 변명했다.
“이건 제 배에서 울린 소리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칼은 그런 소녀를 지그시 쳐다보다 입을 뗐다.
“부모님은 어디 있는 거지? 길이라도 잃어버렸나?”
울컥!
“얼핏 봐도 당신이랑 비슷한 연령대잖아요! 그리고 왜 미아 취급을 하는데요?”
“아니면 왜 밥도 안 먹고 이런 곳에 기웃거리고 있어?”
“그,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잖아요.”
대답 직후였다.
타다다닥.
주변을 지나가는 남성들을 보고 홱 놀란 그녀는 재빨리 칼의 등 뒤로 숨었다.
“……알 바 아니라면서 잘도 빌붙는군.”
그녀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델피나에요. 지금 저 남자들에게 쫓기고 있어서 그런데 잠깐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칼리언트다.”
달랑 이름만 말한 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민폐겠지.’
델피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점점 멀어져가던 칼의 발이 어느 순간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깜짝 놀란 델피나가 고개를 들자, 칼은 바그로바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밥 먹으러 갈 참인데, 먹으러 갈래?”
“……네, 네.”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델피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슈미트가 머무는 숙소.
칼이 온다는 통보가 있어서일까?
식탁 위에는 휘황찬란한 육류 요리와 갖은 풍미를 자랑하는 채소 요리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이,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봐요.”
델피나는 상기된 얼굴로 감탄했다.
그 이유는 먹음직스러운 요리 때문이 아니라 기사, 유니콘, 드래곤 등으로 조각된 각종 채소들 때문이었다.
“후후후후, 이게 이 몸의 요리 실력이지.”
“슈미트님은 꾸미는 것만 했잖아요.”
슈미트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찬을 준비한 디아나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핀잔을 날렸다.
“어쩐지 귀한 손님이 올 것 같더라. 평소라면 오늘도 마늘빵에 수프여야 했는데, 갑자기 있는 예산 없는 예산 모두 끌어와 진수성찬을 준비했잖아.”
마늘빵만 먹던 일상을 떠올린 슈미트는 원망 섞인 시선으로 디아나를 쳐다봤다.
“호호호,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양심에 찔렸는지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후룩.
이제는 둘의 투덕거림이 익숙했는지, 칼은 개의치 않고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카, 칼리언트님.”
디아나는 한껏 긴장한 상태로 그런 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맛있군.”
하루 종일 굶은 탓인지, 칼은 무척이나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디아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자, 잘 먹겠습니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델피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쟤는 어디서 잡아 온 월척이냐?”
닭다리를 뜯고 있던 슈미트는 뒤늦게 델피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길거리에 있길래 주워왔는데.”
“주, 주워 왔다니요! 지나가는 개도 아니고.”
흥분한 델피나는 정정을 요구했지만,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빵을 먹었다.
“…….”
괜스레 민망해진 델피나는 얼굴을 붉혔다.
슈미트와 디아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칼을 상대할 때 하나하나 흥분하면 결국 피곤해지는 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슈미트는 처음으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델피나에게 말했다.
“뭐 얼마나 지낼지 모르겠지만, 빠져들지 마라. 헤어 나오기 어려운 매력을 가진 녀석이니까.”
“그럴 일 없어요.”
델피나는 볼을 부풀리며 식사에 임했다.
* * *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다수의 사내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뜻을 가지고 이실리아로 왔다.
국가도 성별도 인종도 상관없다.
비밀 결사 메노스 템벨.
추구하는 이념은 제로베이스에서부터 출발하는 평등이다.
문제는 그들의 방식에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는 모든 국가의 왕족과 귀족을 죽이는 거였다.
비밀 결사인 만큼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지방에서 소동을 일으켜 영주를 죽이고, 꼭두각시 영주를 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급격히 늘리고 있었다.
조직의 규모는 이제 이천여 명까지 늘어났다.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준비 중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파르테스 아카데미.
메노스 템벨에서 두 번째 계급인 메이거스(마법사)들은 파르테스를 테러한 방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후크와 줄라탄.
그 중 후크는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무려 7서클의 마도사였고, 줄라탄은 드래곤의 실험으로 만들어진 키메라로 몸 곳곳에 파충류처럼 비늘이 자라나 있었다.
두 사람은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서로 달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쥴라탄, 네놈은 답답할 정도로 너무 신중해. 일전에 몇 번 말하지 않았나?”
“네놈이 멍청한 거겠지. 아직 신원 정보도 입수되지 않은 마당이잖아. 에클라 세트 같은 괴물이 얼마나 있을 줄 알고 그래?”
후크의 투덜거리자 줄라탄은 빈정거림으로 대답했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를 흘겨보았다.
‘언제쯤 결론이 나지?’
그걸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지친 표정을 지을 무렵.
쩌적!
“응? 갑자기 웬 얼음이?”
최하위 계급인 제레타(신앙자) 중 한 명이 벽에 성에가 끼는 걸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툭.
저도 모르게 성에에 손을 얹는 순간.
쩌저저저저적!
제레타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메이거스들의 회의를 보던 제레타들의 몸이 하나같이 얼어버렸다.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후크는 재빨리 완드로 바닥에 두들겨 플레임 써클을 시전했다.
화르르르륵!
지면에서부터 구현된 원형의 화염이 이내 창고 전체를 뒤덮었다.
점점 확산되던 얼음을 증발시킨 화염은 주변을 모조리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콰콰쾅!
그때 부스러진 벽 너머에서 한 남자가 은백발을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모습을 드러낸 그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느긋했다.
지면과 맞닿은 검 끝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데, 데제스푸아르.”
“어, 어떻게 네가?!”
그의 정체를 알아본 후크와 줄라탄은 당황해서 몸이 경직됐다.
데제스는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이 쑤셔서 직접 오게 됐지. 살인 허가증은 받아놓았으니까 안심해.”
검을 들어 올린 데제스는 싸늘한 눈으로 후크와 줄라탄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날 방해하는 장애물은 하나로 족해. 너희 같은 조무래기한테까지 간섭을 받으면 열이 받아서 말이지.”
그 말과 함께 데제스는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고.
“도망쳐!!!”
위기를 감지한 후크와 줄라탄은 다급히 소리치며 대응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