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옅었던 달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드러내며, 밤이 오는 것을 알렸다.
“예쁘게 가꾼 길이네요.”
말버러 공작과 산책을 나온 에리는 널따란 정원을 보며 연신 감탄 중이었다.
정원 중앙 연못에는 프리데아의 조각상이 배치돼 있었다. 검을 지면에 꽂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고고해 보였다.
거기에 더해 정원의 곳곳에는 큼직한 너도밤나무가 자라나 있었고, 정원까지 오는 기다란 가로수 길에는 털가시나무가 일렬로 서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자리에는 그네가 하나 있었다.
“적적할 때 여기를 둘러보고는 합니다. 정원사들이 늘 정성스럽게 가꾸어서 보기 좋죠.”
말버러 공작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호호, 덕분에 저까지 즐기게 되네요. 근데…….”
환하게 미소를 짓던 에리는 곧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사건을 떠올리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시작됐군.’
말버러 공작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에리는 늘 활기찬 미소로 주변을 밝히는 등불 같은 소녀였다. 하지만 이실리아의 공주라는 신분은 등불의 밝기를 옅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빛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리는 곧 차분한 표정으로 말버러 공작에게 물었다.
“외숙부님. 낮에 소개했던 에릭 듀란트가 에클라 세트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에클라 세트라는 걸 알 수 있으셨던 거죠?”
“성운입니다.”
“성운이요?”
“예. 그들이 발산하는 마력은 옅은 구름처럼 은은히 퍼지면서 별빛처럼 반짝이죠. 색깔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이 질투를 느끼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두각을 드러냅니다. 각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이 재능을 숨기려고 하고 있지만, 조만간 드러나겠죠.”
“에릭 듀란트는 어떻게 아시게 된 거죠?”
“저에게는 웨인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웨인. 설마! 그 스피어 마스터로 소문난 웨인 벨벳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에리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말버러 공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조그만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살던 중에 유독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고 하더군요. 창은 쥐지 않고 계속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합니다.”
“창을 쥐지 않는다고요? 근데 어떻게 재능을 알아본 거죠?”
“사내들은 언제나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은 법이라서요. 웨인의 문하생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소년 몰아붙였습니다.”
“조금 비겁한데요?”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 에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씨익!
말버러 공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소년은 자신을 몰아붙인 문하생 7명을 모두 쓰러뜨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소년보다 나이가 두세 살은 많았고요.”
“?!”
창을 한 번도 쥐지 않은 소년이 단련한 문하생들을 이겼다는 믿기지 않는 말에 에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정체를 깨달은 웨인은 곧장 저에게 보호를 요청하더군요.”
“보호요? 갑자기 왜…….”
“에클라 세트는 각국에서 탐내는 그릇이니까요. 저는 그를 보호함과 동시에 소년이 웨인의 밑에서 안정적으로 수련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아, 물론 여왕 폐하께는 보고를 드린 내용입니다. 하하하,”
“……저만 모르고 있었다니. 조금 서운하네요.”
“아직까지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하, 이만 들어가시죠. 날이 추워집니다.”
“조금만 있다 갈게요.”
“그러면 호위를…….”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제아무리 대모나스라고 해도 공작가의 내부에는 얼씬거리지 못할 거라 여긴 말버러 공작은 조용히 물러났다.
혼자가 된 에리는 적적한 정원의 풍경을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땅 꺼질 듯이 고개를 숙이고 다니냐?”
저벅저벅.
그때 에리의 옆으로 칼이 다가왔다.
피식.
수척했던 그녀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에리의 눈꼬리가 꿈틀거린 것을 본 칼은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또 어떤 장난을 칠지 고민하고 있군.”
“그냥 반가워서 그런 거거든?”
에리는 슬그머니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칼은 별말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에리는 이죽거렸다.
“내가 혼자 있으니까 불안해서 온 거구나.”
“마음대로 생각해.”
씨익.
“그럼 마음대로 생각하지 뭐. 나랑 혼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칼이 재빨리 의견을 번복하자 에리는 깔깔 웃으며 구석에 있는 그네에 올라탔다.
그러곤 세차게 지면을 차 그네를 흔들며 물었다.
“칼. 이곳 그린데피아는 이실리아의 꿈이야. 외숙부님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의 영지 운영을 포기하고 이곳에 온 거고.”
“좌천당했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어머니도 외숙부님도 서로를 믿고 있으니까. 그 결과 마침내 그린데피아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
활기찼던 에리는 곧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땅에 해괴한 짓이 벌어지게 놔두지는 않아.”
‘인간의 긍지는 고결하군.’
도를 넘으면 그것은 당연히 탐욕이 되고 말지만, 아직 에리에게는 그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리의 이런 분노는 정당할 뿐 아니라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탁.
칼은 에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어허! 한 나라 공주의 머리에 손을 올리다니.”
깜짝 놀란 에리는 애써 근엄한 척 말했지만, 칼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피식.
칼은 늘 자신만만한 그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의지에 가담해주지.”
“…….”
그 말에 에리가 도와준다는 말을 참 어렵게 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쇄액!
카앙!
돌연 그녀의 눈앞에서 불꽃이 번뜩였다.
키키키키킹!
에리의 눈앞으로 선혈처럼 붉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 끝이 에리의 이마를 찌르기 직전, 기습을 간파한 칼이 바스타드 소드로 마검을 쳐내 궤도를 뒤틀었다.
캉!
“…….”
깜짝 놀라 당황해하는 에리에게 칼은 냉혹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신 차려.”
“미, 미안.”
고개를 좌우로 흔든 에리는 자신을 습격한 적을 바라봤다.
어둠에 동화된 적은 바로 앞에 있음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19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장신인 남성은 선혈처럼 붉은 마검을 들고 있었다. 로브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슬 퍼런 눈동자에는 증오가 들어차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긴 우리 땅이다. 간악한 이실리아의 수괴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샤텐의 사람인가 보군요.”
“꺼져라. 이 더러운 종자들아!!”
마검에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콰아아앙!
칼은 곧장 그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콰직!
하지만 마검에서 흘러나온 서슬 퍼런 예기는 단숨에 칼의 오러를 파고들어 바스타드 소드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칼!”
걱정이 된 에리는 칼에게 소리를 쳤고, 칼은 냉정한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짧아진 만큼 거리를 더욱 좁혀야 했다.
‘저게 블러디아군.’
칼은 지그시 눈을 가늘게 드며 주인의 기운까지 모조리 흡수해 광포한 기운을 방출하고 있는 블러디아를 쳐다봤다.
내구성, 강도, 그리고 예리함까지, 모든 면에서 칼의 바스타드 소드를 훨씬 상회했다.
흔히 오러는 무엇이든 절삭할 수 있는 기운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오러라는 것은 그 정도로 편의적인 힘은 아니었다.
검이 단단하지 못하면 오러가 검 끝에 맺히기도 전에 검이 부러지고 만다.
또한 검신에 오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숙련도를 요구한다. 오러끼리 충돌할 경우에는 보다 완벽히 정제된 오러가 이긴다.
그렇기에 오러는 무적이 아니다.
그런 기준에서 블러디아의 주인이 지닌 역량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살기는 공기마저 짓눌렀다.
또한 완력은 인간을 넘어섰으며 검 끝까지 도달한 흉흉한 오러는 기괴할 정도로 커다랬다.
“사, 상급 기사 수준이야.”
“순수하게 저 녀석의 힘이라면 그렇겠지.”
칼은 놀란 에리를 뒤로 한 채, 곧장 자리를 박찼다.
파직!
콰앙!
부딪친 오러와 오러는 서로를 휘감아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콰앙! 콰앙!
하지만 격차는 현격했는데, 특히 서로 지니고 있는 검의 격차가 너무 컸다.
칼의 검은 점차 마모돼서 균열이 일어나는 반면, 블러디아는 주인의 생명을 불태우며 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카앙! 카앙!
수세는 확실한 수세.
하지만 이 차이는 무기의 성능에서 나오는 차이일 뿐이다.
칼은 얼마 전 쿠라빌을 상대할 때 얻은 예측의 경지를 이용해 의연하게 공방을 펼쳤다.
부러진 검을 손에서 놓은 뒤 주먹을 꽉 쥐고……
콰앙!
그대로 적의 복부를 찔러 넣어 확실한 유효타까지 먹였다.
“쿨럭!”
예상치 못한 공격에 대모나스는 피를 토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검을 휘둘러 칼의 검을 완전히 박살냈다.
피잇!
부서진 검의 파편이 칼의 뺨을 살짝 그었다.
솨아아아아아!
뺨에서 난 핏방울과 닿은 블러디아에서 기괴한 검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악!!!”
검을 쥔 당사자는 폭주하는 블러디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다 곧장 자리를 박찼다.
“오호라. 그런 건가.”
기괴한 그 현상에 무언가를 직감한 칼은 곧장 자리를 박차려고 했다.
바로 그때.
꽈악!
“기, 기다려.”
에리는 그런 칼의 팔을 붙잡고 만류했다.
“놔.”
잔뜩 흥분한 칼은 릴리를 뿌리치려고 했다.
“무기도 없는데, 어떻게 상대하려는 거야?!”
“주먹으로 하면 되지.”
“안 돼.”
단호한 결의가 실린 에리의 눈을 본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이 뒤에는 그 녀석에게 맡겨야 하겠군.”
“그, 그 녀석?”
“……에클라 세트. 폭주하는 천재의 재능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라면 일단 이 소란을 종결시킬 수는 있겠지.”
‘에릭 듀란트가 이곳에 있다고?’
칼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에리는 곧 눈을 부릅떴다.
“잠깐 칼, 일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녀석이 눈치채면 어렵지 않게 끝나겠지만. 눈치채지 못하면, 오늘 사건은 반복되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지금 설명해줘도 의미 없어. 그보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뭐, 뭔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는 칼을 보며 에리는 벌써부터 불안해졌다.
* * *
“하아, 하아”
대모나스는 다급히 질주하며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본래 두 명을 표적으로 삼았었다.
하나는 해괴한 수법으로 자신들의 땅을 값싸게 사들여 부유한 영지로 탈바꿈한 이실리아의 왕족.
다른 하나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마검 블러디아의 정체를 알아낸 남자였다.
그리고 천하의 모든 것을 벨 수 있을 것만 같던 블러디아는 제대로 표적을 베어내지 못했다.
심지어 제멋대로 폭주하기까지 했다.
꽈악!
지금 이 순간에도 게걸스럽게 자신의 피를 빨아들이는 마검의 행동에 대모나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여기서 꺾일 것 같냐?”
가까스로 공작가에 벗어나 마을 어귀에 잠적하려는 순간이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은은한 달빛이 거리를 비췄다.
거리의 한 가운데에는 창을 어깨에 기댄 에릭 듀란트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모나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대모나스인가.”
“크윽! 이번에는 또 뭐야!!”
당황한 대모나스가 블러디아를 휘두르려고 했으나.
콰직!
에릭의 창이 먼저 대모나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칼리언트. 겨우 이런 조무래기를 상대로 애를 먹은 건가.”
순식간에 연쇄 살인마를 해치웠으나 에릭의 얼굴에는 오히려 실망감이 깃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
대모나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에릭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뭐?!”
깜짝 놀란 에릭은 다급히 창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일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흉갑이 베인 에릭의 몸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너 정체가 뭐지?”
“크흐흐흐, 네놈 피도 맛있군.”
분개한 에릭의 얼굴을 지켜보던 대모나스는 한마디 말과 함께 블러디아를 어디론가 던졌다.
덥석!
지붕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은 블러디아를 손에 쥐고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협력자가 있었군.”
에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모나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바스락. 스스스
이내 대모나스의 몸이 잿더미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