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쥐새끼들이 꽤나 많이 모였군.’
그린데피아의 건물 사이를 걷는 칼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애써 미끼가 되어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음에도 적은 상당히 신중했다.
한 달 만에 말버러 공작에게 많은 정신적 고통을 주었을 정도로 영리한 놈이다.
겨우 이 정도 도발로 정체를 드러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효과는 있다.
칼이 뜻밖의 진실을 대중에게 유포하는 바람에 블러디아의 주인은 초조해졌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의 의심을 사버렸다는 것.
하지만 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몸에 힘을 조금씩 뺐다.
미행을 하도록 유도를 했지만,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되면 상대는 간만 보다가 도망칠 것이다.
따라서 약하다는 인상을 주어 자신을 습격하게끔 만드는 것이 칼의 목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범죄자와 밀당을 다 하고 있군.’
칼은 뜬금없이 맥캘리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흐흠, 망나니 제자야. 이래 보여도 내가 연애를 할 때는 밀당의 고수였단다. 아, 밀당이 뭐냐고?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물러서 홀딱 넘어오게 만드는 거야. 때때로 애간장을 태우게 만들기도 하고, 과감하게 몰아붙이기도 하는 거지.
당시 칼의 대답은 ‘그래서 밀당의 고수는 지금 어떻게 됐는데?’였다. 그에 맥캘리는 어김없이 닥치라고 외치며 연구실을 뒤집어 놨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던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이 대모나스냐?”
그런 칼 앞에 짙은 남색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칼은 어깨까지 흘러내렸고, 남청색의 눈은 밤하늘을 빼다 박은 듯했다. 또한 창을 빼든 그의 기세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이 녀석은 아니군.’
예사롭지 않아 보였으나 블러디아와는 상관없어 보였다.
눈앞에 있는 소년, 아니 청년의 나이는 약 18세로 추정됐다.
그때 염탐자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이탈해버렸다.
“하아, 망했군.”
칼은 한숨을 쉬며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정말 확실한 순간이 아니고서야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이 뭐지?”
칼의 질문에 남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에릭 듀란트다.”
“아, 그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대답과 함께…….
파앗!
칼은 발로 기습을 가했고, 에릭은 창대로 그 일격을 막았다.
콰앙!
하지만 생각보다 강한 칼의 각력에 몸이 밀려 건물 벽과 등이 부딪치고 말았다.
“뭐, 뭐야? 이 힘은?”
예상치 못한 칼의 강함에 에릭은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칼은 한마디를 남기며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 안 좋으니까 꺼져. 눈치가 없는 것도 유분수지.”
“어린 게 건방지긴!”
스릉!
칼이 보통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에릭은 곧장 창을 휘둘렀고, 칼 역시 검을 빼 들어 응수했다.
콰앙!
파지지직!
두 사람의 무기가 충돌한 순간 일순간 천둥이 친 것처럼 굉음이 일어났다.
‘강하다?!’
칼 역시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는지…….
“호오.”
곧 두 사람은 진심으로 공방을 나누기 시작했다.
휘리릭!
파앗!
능수능란하게 창을 휘젓던 에릭은 곧장 칼의 목을 향해 창날을 찔러 넣었다.
카앙!
칼이 휘두른 검이 반원을 그리며 에릭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어서 칼은 창끝을 눌러 벽에 박아 버렸다.
파앗!
이어서 칼과 에릭은 동시에 발을 박찼다.
콰지지지지직!
두 사람의 무기는 불똥을 튀기며 격렬한 충격파를 일으켰고, 그로 인해 벽이 박살 났다.
파앗!
가까스로 벽에서 창을 빼낸 에릭은 등 뒤로 창을 돌리더니, 그대로 간격을 좁히며 내질렀다.
검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궤도로 파고드는 창끝은 칼의 미간을 향해 있었다.
덥석!
콰앙!
칼은 쿠라빌과 격전으로 획득한 예측 능력과 동체 시력을 이용해 가까스로 창목을 붙든 다음 비틀었다.
손목에서 느껴진 엄청난 통증에 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푸욱!
그 사이 칼의 검은 에릭의 대퇴부를 베었다.
고통으로 인해 칼날의 궤도가 흐트러져 상처는 크지 않았다.
주륵.
위험을 느낀 에릭은 5미터 이상 칼과 거리를 뒀다.
“……너 뭐야?”
하마터면 힘줄이 잘릴 뻔했던 그는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이었다.
에릭은 칼이 대모나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쫓아왔었다.
처음에는 외견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칼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칼도 마찬가지였다.
중급 기사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데 에릭이 내뿜고 있는 기세는 칼의 형제인 프루아 슈타크를 상회했다.
“아무래도 대모나스는 아닌 것 같군. 블러디아는 뭐지? 넌 분명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피식.
에릭은 오랜만에 강자를 만나 기쁜지 환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칼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대모나스군.”
“엥? 자, 잠깐 무슨 소리야! 이쯤 되면,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친해지는 명분이 생기는 거잖아.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콰앙!
칼은 다시금 에릭과 기세를 일으켰다.
키기기기!
기분 나쁜 철의 이명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는 와중에 칼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래야 실수로 죽여도 용서받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잖아.”
“…….”
왠지 모르게 실수라는 말이 고의라고 들렸다.
“……너 지독하다는 소리 많이 듣겠네.”
“종종.”
‘이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에릭 역시 칼과 조금 더 싸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릭은 전신에 남청색 마력을, 칼은 붉은색 마력을 발산했다.
쿠구구구구구.
두 마력이 충돌하며 대기를 짓눌렀다.
“뭐, 뭐야?”
“저 둘. 완전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다 부셔놨어.”
대낮에 벌어진 두 사람의 칼부림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두 사람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충돌하려는 순간.
“거기까지!!!”
느닷없이 떨어진 치안군 대장의 불호령과 함께 치안군이 창을 들어 칼과 에릭을 포위했다.
* * *
대낮에 싸움을 벌인 칼과 에릭은 구금됐다.
절차대로라면 감옥에 구금된 다음 재판에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절차를 모두 건너뛰고 공작가의 자택에 도착하게 되었다.
현재 칼은 양손이 묶인 채로 한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금발의 우아한 소녀.
평소라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면사로 얼굴을 감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제쳐둔 상태였다.
후룩.
에리는 차를 마시며 칼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쁘다고 들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군.”
인사 같지도 않은 칼의 인사를 에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더 바쁘게 만든 게 누굴까?”
“에릭 듀란트라는 녀석이지.”
“칼, 너도 포함이야.”
찻잔을 내린 에리는 ‘에라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양손을 모아 턱을 괴며 미소를 지었다.
“릴리한테 편지 받았어. 그동안 잘 지냈어, 칼?”
“그럭저럭.”
“그래. 나는 놀고 싶은데, 놀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에리는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갖다 대며 투덜거렸다.
“허허허허, 공주님께서 그런 풀어진 모습을 보이다니, 아무래도 그 소년이 의지가 되나 보군요.”
때마침 뒤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말버러 공작이 그 모습에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화들짝 놀란 에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다시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날렸다.
“피곤하게 꼭 가식적으로 행동해야겠어?”
“흐흠 이건 우리나라의 문화야. 그리고 가식이라니, 나만큼 진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
이 순간 칼과 말버러 공작은 한 마음으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에리는 차분한 어조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해놓고도 부끄럽기는 했는지, 귀 끝이 빨갛게 변했다.
그런 그녀를 배려해 말버러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이곳에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서 그렇소.”
두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에릭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충분히 믿을 수 있으시겠지만, 저 남자는 믿어도 되는 남자입니까?”
칼의 실력은 낮에 대전으로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릭은 칼의 이력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 말에 에리가 칼을 대변했다.
“독은 독으로 제압한다는 말이 있죠.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칼리언트 공은 일찌감치 본국에 악영향을 끼친 흑마도사인 칸투버그를 처리한 경력이 있어요. 거기에 칸투버그가 부리는 조직인 ‘새벽의 이슬’을 반나절 만에 괴멸시켜버렸죠. 저는 그 과감한 행동력이 대모나스를 잡는데, 큰 공헌을 할 거라 믿고 있어요.”
“즉, 공주님의 추천이 있었다는 거군요.”
에릭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말버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에릭 듀란트를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저입니다. 아직 세상에 공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체는 에클라 세트, 바로 폭주하는 재능의 천재 중 한 명입니다.”
“에, 에클라 세트요?!”
예상을 뛰어넘은 엄청난 정체에 에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실리아를 지키는 거대한 기둥이 될 인재죠.”
주변의 감탄에 에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칼에게 말했다.
“직감이라고 할까, 너도 에클라 세트지?”
“아닌데.”
단호한 칼의 답변에 에릭의 얼굴이 빨개졌다.
“푸훗!”
에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에리는 급히 사과하고서 다시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칼리언트와 에릭 듀란트.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포상을 내리겠어요. 제 권한 내에서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말이죠.”
“오호.”
모처럼 반가운 소식에 칼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싹!
그와 동시에 에리는 몸을 떨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칼이 요구할 건 학교생활 중 벌어지는 사건들의 수습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면, 에릭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공주님과의 혼약을 조건을 내걸어도 됩니까?”
“에릭 공. 그것은?!”
이 상황만큼은 말버러 공작도 예상 못 했는지 크게 당황했다.
“…….”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운 조건에 에리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머릿속으로 에클라 세트인 그와 결혼을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였다.
‘싫어.’
침묵이 길어지려는 찰나였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들려오는 칼의 목소리에 에리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렸다.
“좋아요.”
“?!”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에릭과 칼이 눈을 부릅떴다.
씨익.
에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칼리언트, 당신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줄게요. 미인을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죠?”
“왜 나까지 끌어들여?”
칼은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속닥거리는 그 모습을 보니 에릭은 심기가 불편해져서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에리는 차가운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또 여덟 명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 그리되면 그린데피아에서 벌어질 혼란을 더는 걷잡을 수 없겠지. 이걸 막기 위해서는 혼약이든 뭐든 할 수 있어. 그린데피아는 그만큼 중요한 땅이니까. 그러니 에클라 세트인 당신의 활약은 기대하겠어. 하지만…….’
면사 너머로 칼을 쳐다본 에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믿는 건 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