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유일하게 이실리아의 영토 중 내륙에 있는 장소인 그린데피아.
그곳의 총책임자는 바로 말버러 공작이었다.
에밀턴 카이히 말버러 공작.
예카테리나 2세의 남동생임과 동시에 전대 말버러 공작의 데릴사위이기도 했다.
북도에 전시된 초상화에서는 그의 중후한 매력이 엿보였다.
짙은 남색의 머리칼과 정돈된 수염.
다부진 눈빛은 만민의 신망을 받기 충분했다.
실제로 황무지를 12년 만에 천혜의 땅으로 개간을 할 수 있던 것도 이 남자의 추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회의실에 있는 그 남자는 초상화 속의 모습과 달리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최근에 그린데피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면 영지의 주인인 그가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 소매치기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소매치기가 사람들에게 맞았거나, 성격 나쁜 행인에게 걸려 살해당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사건에는 거대한 악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다.
처음에는 한 명.
그로부터 닷새 뒤에는 두 명.
또다시 닷새가 지났을 때는 세 명.
그런 식으로 총 스물한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별개로 그를 잡으려던 다수의 치안군까지 살해당했으니, 살인마는 상당한 무력을 갖춘 이가 분명했다.
특이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살해당한 시체는 삐쩍 말라붙어서 피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살인 방법 또한 기괴했다.
마치 도축을 하는 것처럼 배를 갈라놓을 때도 있었고, 목을 베어서 광장에 던져놓을 때도 있었다.
여기서 가장 치욕적인 것은 아직 범인의 털끝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으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에리는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어요. 외숙부님.”
말버러 공작은 지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을 공표하고 현상금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마마.”
잠시 후.
말버러 공작과 이야기를 마친 에리는 호위 기사인 에드윈과 함께 방으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타국이 범인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아직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에리는 차가운 눈으로 에드윈에게 현재의 정세에 대해 일러주었다.
“샤텐을 땅을 살 당시에 이실리아는 주변국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긴 했지만 안도하기는 어려워요. 예전과 다르게 지금 그린데피아는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땅이니까요.”
“만약 타국이 범인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기괴한 짓을…….”
“그린데피아의 개간에 성공했을 때, 백성들은 그걸 말버러 공작이 일으킨 기적이라 칭송했어요.”
“…….”
에드윈은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리는 무뚝뚝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기에 그린데피아의 백성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바치죠. 아마 이런 기괴한 사건을 벌이는 이유는…….”
“신뢰를 떨어뜨리려는 거군요.”
에드윈은 그제야 에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끝까지 범인을 잡아내지 못했다가는 범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범죄를 일으킬 거에요. 그럼 다른 나라에서 이걸 트집으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르죠,”
“……심각한 상황이군요.”
“더 심각한 건 앞으로 이틀 뒤에 사람들이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파르르르.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게 분했는지 에리는 몸을 떨었다.
잔혹한 현실에 그녀는 일순간 두통을 느꼈다.
“고, 공주마마.”
에드윈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에리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한 다음 스스로 섰다.
피식.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그 남자가 생각나요.”
“칼리언트 슈타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머, 잘 아시네요.”
“그 남자는 위험합니다.”
에드윈이 보기에 칼은 데제스와 동급으로 위험했다.
‘잘 알지.’
에리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칼이 와서 그 미친놈을 박살 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간 칼이 해왔던 행보를 떠올린 에리는 그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녀는 조금 전과 다르게 나이대에 맞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드원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라면 이미 이곳에 와 있습니다.”
“아, 와 있었나 보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에리는 화들짝 놀라 에드윈을 쳐다봤다.
에드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릴리아나님에게 서신이 왔습니다. 그리고 같이 온 포도는 방에 두었습니다.”
얼굴을 붉힌 에리는 드물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해요!!”
* * *
아직 해가 뜨기 전인 고요한 새벽.
명상을 하고 있는 칼의 몸에서는 강렬한 붉은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사이.
슈미트는 검을 제작하는 데 전념을 했다.
그리고 칼은 아직 체내에 남아 있는 엘릭서의 힘을 몸을 성장시키는 데 사용하는 중이었다.
꿈틀.
단전에 자리를 잡은 마나가 한층 더 커지며 둥지를 틀듯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칼은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4성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군.”
한 번 막혔던 활로를 뚫으니, 그 뒤로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윽.
바로 그때, 영체화를 한 상태로 칼의 곁에서 머물고 있던 쿠라빌이 기척을 드러냈다.
“뭐지, 쿠라빌?”
[수련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일전에 일러주셨던 붉은 검을 들고 있는 남자가 이곳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어디 있는지는 찾아냈나?”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원령들의 기억을 조사해 상대의 계획은 알아냈습니다.]
“계획? 살인마가 계획이 있던가.”
칼은 인상을 찡그리자, 쿠라빌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인위적인 마검을 제작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그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마검을 블러디아라고 칭했습니다.]
“호오? 재밌는 짓을 벌이는군.”
칼은 명상을 그만두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앉으며 쿠라빌의 말에 집중했다.
[블러디아는 최강의 마검이라 일컬어지는 타르빙의 파편과 조합해 만든 검입니다. 그래서 타르빙의 능력 중 한 가지인 ‘선혈 폭식’이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를 빨아들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피를 빨아들일수록 마검은 더욱 강해집니다. 동시에 검의 주인은 점차 광기와 살육에 미쳐서 블러디아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에 대한 단서는 찾아낸 게 있나?”
[아직 단서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죽어간 이들은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자였습니다.]
“흐음.”
칼은 죽어간 이들이 약자들이란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수고했다.”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넌 오늘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어.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쿠라빌은 다시 기척을 감췄다.
“벌써 아침이군.”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에 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일 때인가.”
잠시 후.
“어? 칼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네. 오늘은 농사 안 도와주는 거야?”
부엌에서는 릴리가 요양 중인 헬렌을 대신해 아침밥을 하고 있었다.
앞치마를 걸치고, 머리는 뒤로 모아 묶은 모습은 묘하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칼은 문득 생각했다.
‘출세해서 귀족이 돼도 저럴까?’
시종일관 꾸준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했다.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칼은 허리춤에 검을 착용하며 문으로 향했다.
스윽.
하지만 그런 칼의 앞을 릴리가 막아섰다.
“안 돼. 아침밥은 먹고 가야지.”
“바빠.”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릴리는 뚱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미리 만든 샌드위치를 칼의 입에 쑤셔 넣었다.
“…….”
‘왜 이 패턴은 파악을 못 하는 건지.’
그토록 빠른 쿠라빌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건만, 릴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언제나 칼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우물우물.
버터의 풍미가 어우러진 갓 구운 빵과 그 안에 들어간 야채는 무척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또 칼의 취향에 맞게 비교적 담백했다.
“맛있지?”
얄궂게 미소를 짓는 릴리를 보며 칼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럭저럭.”
빠직!
“그러면 다음에는 잼을 가득 발라줘야겠네. 우후후”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릴리가 서슬 퍼런 표정을 짓자, 칼은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칼은 릴리가 잼을 바르려는 샌드위치를 잽싸게 빼앗아 입에 넣었다.
“간다.”
툭.
그러고는 무뚝뚝한 얼굴로 검지를 말아 그녀의 머리를 살짝 쳤다.
“우씨. 요즘 들어 손버릇이 안 좋아졌는데?”
칼은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 *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어.”
평화로웠던 그린데피아의 주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걱정이 가득했다.
닷새 간격으로 벌어지는 대량의 살인사건.
영주인 말버러 공작은 어떻게든 사건을 은폐시키며 일을 처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자, 결국 세상에 사실을 공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광장에는 얼굴이 그려지지 않은 수배서가 떡하니 걸려있었다.
「공개 수배서.
-죽음 또는 생포.
-현상금 300골드.
-인상착의 설명 불가.
-설명: 닷새 간격으로 살인을 벌이는 연쇄 살인마. 통칭, 대모나스의 살해수단을 입증하고 그의 목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말버러 공작가의 최대 은사를 내릴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300골드라는 어마어마한 포상금에 눈이 멀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살인자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수배서를 확인한 칼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악몽의 협곡에서 봤던 희끄무레한 실루엣과 블러디아 특유의 새빨간 검신.
이런 눈에 띄는 살인을 저지른 녀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이 광장을 활보하고 다닐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일일이 찾기는 귀찮으니 별수 없나.”
칼은 주변의 인파를 파헤치며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다.
“뭐, 뭐야? 저 녀석.”
“한참 어린 게 건방지게…….”
까득!
그러곤 엄지를 깨물어 피를 낸 뒤, 그대로 수배서에 슥슥 글자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당황한 군중이 일제히 비난했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블러디아는 절대 완성될 수 없는 미완성품이야. 겁쟁이.」
글을 다 적은 칼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웅성웅성.
“블러디아?”
“뭐야? 저 자식 미쳤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칼의 기행에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우연히 칼이 스쳐 지나간 곳에서는 짙은 남색 머리칼을 지닌 남성이 싸늘한 표정으로 칼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