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청명한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
오랜만에 본 아름다운 동공에는 당황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머리에 작업용 두건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포도 수확을 도와준다던 귀빈이 릴리임을 알 수 있었다.
“우연히 들른 것뿐이야. 너는?”
당황한 칼은 무뚝뚝하게 반응하자, 릴리는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여기 있는 헬렌은 여름 방학 때 에리의 별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시녀거든.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서 며칠 전부터 여기서 포도 수확을 도와주는 대신 신세 지고 있었지.”
“아가씨, 괜찮아요?”
뒤늦게 헬렌이 배를 부여잡으며 다가왔다.
“누가 누구보고 괜찮냐는 건지……. 정말 배가 그렇게 불렀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릴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끼잉!
릴리를 넘어뜨린 바그로바는 미안함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꽁!
칼은 검지를 말아 바그로바의 머리를 가볍게 친 뒤,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아가씨. 그보다 너무 많이 딴 거 아니에요?”
“이 정도는 따줘야지. 기껏 힘들게 농사지었는데, 수확을 못 하면, 아쉽잖아.”
릴리는 다시 광주리에 포도를 담은 뒤,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며 가까스로 드는 모습에…….
칼은 바그로바에게 했던 것처럼 검지를 말아 그녀의 머리를 툭 쳤다.
“바바랑 같은 취급하지 마!”
발끈한 릴리가 소리를 쳤으나,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광주리를 빼앗아 들었다.
“…….”
갑작스런 배려에 릴리는 놀라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상상을 한 건지, 헬렌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칼과 릴리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
긴장한 릴리는 저도 모르게 헬렌을 쏘아봤다.
날이 저물었다.
포도 수확을 마친 릴리는 칼이 빌린 저택 안에 앉아 있었다.
“변변찮지만 맛있게 드셔주세요. 그린데피아에서 나오는 작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 와인은 이이가 담근 것이에요.”
헬레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남편을 소개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덩치는 대략 2미터로 거친 수염을 가졌음에도, 무척이나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한스라고 합니다. 손님분의 입맛에 잘 맞았으면 합니다.”
잔을 흔들던 칼은 와인 향을 맡았다.
쨍!
뜸을 들이는 칼에게 릴리는 잔을 부딪치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분위기라는 것도 있는데.”
릴리가 먼저 와인을 들이켰고, 칼 역시 와인을 들이켰다.
‘도수는 낮지만, 입맛을 돋우는 술이야.’
칼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따끈한 김을 풍기는 호밀빵을 살짝 뜯어 입에 넣었다.
“대체로 맛있군.”
“호호호,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에요.”
내심 조마조마했던지 한스와 헬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의 무뚝뚝한 분위기는 처음 만난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디아나랑 슈미트 님의 몫은?”
“알아서 먹겠지.”
“좀 챙겨주라고.”
“호호호호, 이미 저한테 말씀하시길래 갖다 드렸어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헬렌의 변론에 잠깐 놀랐던 릴리는 곧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 본 사이에 다정해졌네.”
“별로. 그나저나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에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한 칼은 뒤늦게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상당히 삐쳤는지, 릴리는 뾰로통 입을 열었다.
“원래는 같이 별장에 있었는데, 도중에 에리가 급한 사정이 있다고 자리를 비웠거든. 편하게 있으라고 하긴 했는데 좀 불편해서 헬렌한테 신세 지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그 녀석도 연관이 돼 있는 것 같군.’
칼이 진지하게 고심을 하는 사이, 헬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릴리에게 말했다.
“신세라니요? 저는 릴리아나 아가씨가 오셔서 정말 행복한걸요.”
“고마워. 나도 행복해.”
릴리는 수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다가 미소를 지었다.
괜스레 심술이 난 칼은 아까처럼 검지를 말아 그녀의 머리를 툭 쳤다.
“……뭐야? 불만 있으면 말해.”
“불만 없어.”
“아하, 그래?”
칼의 이런 무뚝뚝한 태도에 익숙해진 릴리는 포도잼을 바른 호밀빵에 건포도까지 얹은 다음 재빨리 칼의 입에 넣었다.
방심한 사이에 입에 그것을 넣은 칼은 인상을 구겼다.
“달아!”
“흐흠. 아까 복수다.”
릴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 * *
화르르륵!
용광로에 꺼낸 붉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거푸집에 부어 모양을 갖춘 뒤.
까앙! 까앙!
불똥이 튀길 정도로 힘차게 두들겼다.
히죽!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슈미트의 표정은 해맑았다.
‘이게 즐겁다는 감각이군요. 스승님.’
처음 검을 만드는 법을 배울 적에는 살육을 위한 도구를 만들고 있다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위대한 장인이었던 레밍호프는 목숨을 잃었고, 사형이었던 파브로는 레밍호프의 야금술 비전서를 들고 도망쳤다.
그로 인해 슈미트의 삶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러나 운명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슈미트는 소년과 만났다.
처음에는 생명의 은인임이긴 해도 동시에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인상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서 깨졌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쟁취해내고야 마는 남자였다.
그러나 절대로 비열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여자와 아이가 말려들게 하지 않았다.
차갑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약자를 보호하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카앙!
‘물론 말이나 행동은 여전히 재수 없지만.’
카앙!
‘난 그 녀석을 위해 검을 만든다. 이 순간 스승의 검을 뛰어넘는 명검을 내 손으로 탄생시킨다. 반드시!’
카앙!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망치질에 손이 아팠으나 슈미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륵.
망치 손잡이에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만류했다.
“슈, 슈미트님. 이제 그만!”
……캉!
디아나의 제지에 잠깐 망치질을 멈춘 슈미트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디아나. 나는 어떤 남자인 것 같냐?”
“그, 그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디아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늘 투덜거리긴 해도 다정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내 장점이긴 하지. 덧붙여 말하자면…….”
휘리릭.
망치를 빙그레 돌린 슈미트는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망치를 높이 치켜든 뒤.
“은혜는 반드시 갚는 남자다.”
카앙!
있는 힘껏 철을 두들겼다.
자화자찬은 계속됐다.
“또한 한다면 하는 남자지.”
지이이잉!
서서히 모양을 갖춘 검에서 지금까지 듣지 못한 검명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카앙! 카앙!
몇 날 며칠 슈미트가 철을 두들기는 동안, 칼은 몸을 단련하며 체력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정도면 하루 종일 뛰어도 숨이 차지 않겠어.’
칼은 기초 체력을 비롯해 근력 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것을 느꼈다.
릴리에게서 포도가 가득 들어있는 광주리를 빼앗아 한 손으로 들었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엘릭서가 근골에 영향을 준 건가?’
칼은 발바두스와 계약을 할 때, 받아낸 엘릭서를 떠올리며 피식 웃어 보였다.
목표로 한 경지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폭 좁혀졌기 때문이다.
“뭐야? 힘세다고 자랑하는 거야? 이리 줘.”
릴리는 칼에게서 광주리를 빼앗아 들려고 했지만, 칼은 약 올리듯 광주리를 더 높이 들었다.
“으으, 약 올라! 진짜!”
단단히 삐친 릴리는 씩씩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헬렌은 웃음을 터뜨리며 칼에게 말했다.
“마치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악동 소년의 모습이네요.”
“좋아한다는 감정이 뭐지?”
칼은 광주리를 검지로 빙그레 돌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게…….”
당혹스런 질문에 헬렌은 크게 놀라다 곧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혹시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알고 있으신지요?”
빠직!
“날 바보로 보지 마.”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칼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헬렌을 쏘아봤다.
헬렌은 난감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호호호호, 죄송해요.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저 같은 경우는 어째서 저렇게 곰 같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냐는 말을 많이 들었었죠.”
“곰이라…….”
헬렌의 남편, 한스를 떠올린 칼은 공감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정말 귀엽지 않아요?”
“귀엽다는 말부터가 공감이 안 되는데?”
엉뚱한 그녀의 발언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헬렌은 눈을 반쯤 감고서 애틋한 눈길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라고 할까? 처음에는 불편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성을 다해서 투박한 글씨로 편지를 써서 준다거나, 포도밭에서 일을 마치면, 우연이라도 저랑 마주치려고 우물가에 기웃거리는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제가 불편해할까 봐 어찌나 긴장하던지.”
남편인 한스를 떠올린 헬렌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뻤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이보다 제가 더 기웃거리게 됐죠. 그때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 남자라면 같이 살 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이와 결혼하게 됐어요. 왠지 말하고 나니까 쑥스럽네요.”
헬렌은 부끄러웠는지 씨익 웃어 보였다.
“시답지 않기는.”
뭐라고 답변을 할지 망설이던 칼은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로 그 순간.
털썩!
뒤에서 들려온 불길한 소리에 칼은 황급히 등을 돌렸다.
“하아, 하아.”
그곳에는 헬렌이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양수가 터졌군.’
칼은 재빨리 그녀를 안아 집까지 달려갔다.
* * *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헬렌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어찌나 놀랬던지 슈미트와 디아나도 대장간 일을 멈추고 달려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방 안에서는 헬렌이 비명을 지르며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한스는 양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 중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칼은 초조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려는 릴리에게 물었다.
“아이는 언제 나오는 거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가서 의사를 불러오는 게…….”
릴리는 양손으로 칼의 뺨을 꼭 누르며 말했다.
“침착해. 엄마는 강하니까. 이런 상황이 있을지도 몰라서 내가 온 거기도 하고.”
“…….”
그녀의 말을 들은 칼은 그제야 마음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릴리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출산이 끝난 것은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응애, 응애.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가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끼익.
방문을 열고 나온 릴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한스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싱긋.
“축하해. 남자아이야.”
“흐어어엉! 감사합니다.”
안도한 한스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칼은 헬렌과 아기의 상태가 걱정됐는지, 방문 앞에서 멍하니 대기하고 있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며 릴리가 나왔다.
“칼. 들어와.”
“내가 왜?”
“고집 그만 부리지?”
거절하려던 칼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릴리의 시선에 곧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헬렌이 아이를 안고서 자장가를 들려주고 있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으나 헬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아이를 한 번 안아 봐주시겠어요.”
따스한 그녀의 말에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았다.
파르르르.
아이를 안아 든 팔은 혹여나 떨어뜨릴까 싶어 떨리고 있었다.
새근새근.
아이는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솜털이 붙어있는 얼굴에는 보조개가 피어 있었다.
릴리와 헬렌은 그 모습을 보며 훈훈하게 웃다가…….
뚝.
“……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칼리언트님. 눈에 뭔가 들어갔나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칼을 보며 심히 당황했다.
“……모르겠어. 왜 눈물이 나는지…….”
칼은 생애 처음으로 흘려본 눈물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작은 생명의 격동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